한 달 내내 시끌벅적한 10월이었습니다. 철도, 지하철, 병원, 연금, 보험 등 공공부문 노동자의 파업이 지난 9월 말부터 이어졌고 철도노조는 역대 최장기 기록을 갈아치우며 파업을 한 달 가까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화물 노동자의 파업(노동자가 아니라면서 파업을 파업이라 부르지 못하고 ‘집단운송거부’라는 이름을 붙였더군요)은 경찰의 진압에 맞닥뜨려 전투를 방불케 하는 싸움을 열흘 가까이 이어갔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현대차 노동자이 파업에 나서자 대부분 언론은 ‘귀족노조’ 딱지를 붙였고, 고용노동부 장관은 긴급조정권을 꺼내 들며 정부가 나서서 파업을 못 하게 엄포 놓기도 했습니다.
‘파업’하면 으레 연상되는 말들이 있지요. 불법파업, 귀족노조, 이기주의, 경제적 손실, 시민불편 등등. 과연 파업이 권리인 것은 맞는지, 아니 법전에 파업권이 적혀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악법은 어겨서 깨뜨”리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건 항상 정부와 자본이었습니다. 아무리 합법적 절차를 거쳐도 파업은 결국 불법이라고 규정합니다. 파업이 노동자의 권리로 인정받느냐는 법전에 명시돼 있느냐가 아니라 노동자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파업의 정당성은 결국 얼마나 강력한 파업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 싶은 거죠.
이번 호에서는 파업에 대한 생각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좀 뻔한 답으로 흐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 파업에 대해 뿌리내린 갖가지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바꿔낼 건가 고민할 기회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A 타입 : 일베 형
노조건, 파업이건, 투쟁이건 종북좌빨 불순분자들의 선동이고 모략이라고 생각하는 당신. ‘어디에나 있지만 그 어디에도 없다’는 일베가 아닌 가요? 선동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팩트’를 꼼꼼하게 챙기는 당신의 눈에 파업은 고연봉 귀족노조의 소요이자 폭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파업을 지지한다는 불순한 대자보를 찾아 학교를 어슬렁거리다가 마침내 발견한다면 살짝 주변을 살핀 뒤 통쾌하게 찢어버리고 인증 샷까지 남기는 당신은 애국 보수의 전위대. 그러면서 놀랍게도 스스로 파업에 나설 때도 있습니다. 낙태의 권리를 인정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섹스파업을 해서라도 낙태권을 저지하겠다’는 결의를 보여주었지요. 부디 그 ‘파업’ 영원히 계속하시길 바랍니다.
B 타입 : 이건희 형
투철한 경영마인드로 무장한 당신은 무노조 경영의 끝판왕 이건희 유형입니다. 직원의 본분은 주는 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일하는 건데, 노조를 만들고 파업까지 하는 건 신성불가침의 경영권을 침해하고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는 퇴행적이고도 괘씸한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직 중한 것은 하루라도 쉼 없이 제품을 만들고 팔아 한 푼이라도 더 남기는 일이니, 파업이 벌어지면 대체인력 뽑고 대체생산을 해서라도 파업을 무력화시키려고 합니다. 노동법이 눈에 거슬리지만 현실에서 무시하면 그만. 노조가 소송을 걸어도 대법원 판결까지 나오려면 어차피 몇 년은 걸릴 테니까요. 당신에게 노조와 파업은 파괴해야 할 무언가일 뿐입니다.
C 타입 : 노사정위원회 형
내 임금을 위해 노조는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회사와 싸우는 건 반대하는 당신은 노사정위원회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조의 목적은 교섭을 통해 나의 임금과 고용을 지켜주는 것이지, 공연히 회사와 싸우거나 무리한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고 느낍니다. 회사와 싸우면 불똥이 튈 테고,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심하면 해고될 수도 있으니까요. 회사가 없으면 노조도 없는 것, 타협과 양보를 통해 서로 합의해나가면서 회사와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당신을 그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동료들이 하나둘 잘리고 비정규직이 들어차고 있다면, 그 다음은 당신 차례가 될 수도 있습니다.
D 타입 : 한상균 형
“민주노총이여 노동의 큰 희망이여 노동자 주인 되는 날까지 힘차게 투쟁하여라.” 민주노총과 민주노조라는 이름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진 당신은 옥중에서도 총파업을 독려하는 한상균 위원장을 떠오르게 합니다. 파업은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 더구나 20년 전 들이닥쳤던 정리해고제-파견제의 최신 버전인 노동개악을 막아내려면 정권에 맞선 총파업 외에 답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라던가, 뭔가 사람들의 불만은 분명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 같은데 경천동지할 총파업은 기미가 보이지 않고 세상은 조용합니다. 뻥파업 하느니 차라리 파업하지 말자는 사람들도 많군요. 총파업이 아니라 쫑파업이라는 비아냥도 들립니다. 이런다고 세상이 바뀔까 고민도 해보지만, 답은 현장에 있다는 믿음으로 오늘도 조합원을 만나러 가는 당신은 파업의 전사입니다.
E 타입 : 장그래 형
“불편해도 괜찮아, 철도파업 이겨라.” 얼마든지 파업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정작 스스로는 노조도 없고 파업은커녕 집회 한 번 나오기도 힘든 직장에서 일하는 당신. 어쩌면 당신은 장그래처럼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조차 고된 미생인 비정규직 노동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만 명이 모이는 노동절 집회, 대규모 도심 집회도 남의 일이고 그림의 떡일 뿐, 관리자들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현장에서 노조라는 말도 꺼내보기 힘듭니다. 노조 만든다고 했다가 단번에 잘려나간 다른 동료들을 목격했을지도 모릅니다. 총파업 깃발이 나부끼고 “동지”, “투쟁” 등을 부르짖는 파업집회의 모습은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세상인 것 같습니다. 흔히 꼰대 같은 어른들이 이런 말을 하죠.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다 힘들어.”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불만을 가진 게 나 혼자는 아닐 겁니다. 일 끝내고 술 한 잔 넘기면서 푸념만 늘어놓던 동료가 새빨간 머리띠를 둘러주는 ‘동지’가 될 날을 기대해봅니다.
F 타입 : 외부세력 형
하루라도 세상이 조용하면 몸이 근질근질한 당신, 조합원은 아니지만 발품을 팔아서라도 스스로 파업현장과 집회를 찾아다니는 당신은 조선일보가 너무나도 좋아해서 포켓몬 찾듯이 스마트폰 들이대며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바로 그 ‘외부세력’입니다. 파업이 터지면 당신은 생의 활력을 얻습니다. 대화와 타협은 기만일 뿐, 파업이야말로 노동자의 학교이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고 굳게 믿고 오늘도 힘차게 팔뚝질합니다. 귀족노조니 뭐니 지겹게 들어온 말은 그저 파렴치한 이데올로기 공격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어쩌면 조합원들보다 더 파업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노동자 권리 찾기를 위해 자기 일처럼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당신은 바로 프로개입러~
G 타입 : 김 대리 형
노조도 있고 때로는 파업도 거부하지 않지만 정치파업은 안된다는 당신은 평범하고 일반적인 직장인 ‘김 대리’로 부를 수 있습니다. 노조는 조합원의 이익공동체이고 파업도 그 목적에 충실해야지, 정치나 이념에 휘둘려선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정권 퇴진을 외치거나 정부정책을 문제 삼는 건 직접 와 닿지도 않고 거창하게만 느껴집니다. 정치적인 문제는 선거로 뽑아놓은 국회의원들이 할 문제이지 노조가 나설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죠.
H 타입 : 무관심 형
노조도, 파업도 당신에겐 관심 밖의 일입니다. 노조가 만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파업을 왜 하는지, 파업이 권리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지만 파업한다고 기차나 전철이 제때 안 오고 집회한다고 차가 막히는 건 짜증나고 불편한 일입니다. 모나지 않게 조용히 살아가는 것에 만족을 느끼는 당신, 다만 모든 반대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