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도스가 준 특이점 측정기가 가리키고 있는 남자는 미강과 지민을 발견하고는 잠시 머뭇거렸다. 헝클어진 머리에 창백한 얼굴, 반백의 머리카락. 손에는 서류가방 크기의 알루미늄 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남자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군복을 입은 두 여자를 바라보고는 그들에게 다가갈지 뒤돌아 도망칠지를 고민하는 몸짓을 보이고 있었다.
“아, 젠장.”
“왜 그래요?”
미강의 물음에 지민이 인상을 찡그렸다.
“에이도스와의 통신이 두절되었어요. 음영 구역으로 진입한 것 같아요.”
미강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린 다음 손을 흔들어 남자를 불러세우려 했다.
“잠시만요! 선생님! 선생님?”
남자는 미강의 말에 도망치기로 했는지 곧바로 등을 돌리고 달아나려 했다. 그는 다리를 다쳤는지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힘겹게 부서진 도로 위를 뛰어갔다. 하지만 멀리 가지도 못하고 미강과 지민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바닷물에 젖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남자의 행색은 그가 생존을 위해 포기해야 했던 품위와 체면들이 빠져나간 빈자리였다. 꺼칠한 수염이 솟은 뺨은 푹 꺼져 있었고 충혈된 눈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다리를 다치신 것 같은데, 치료해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잠깐 앉으세요. 소독액과 붕대가 있으니까 일단 상처 부위만이라도 응급처치를 해야 합니다.”
미강은 다리에 매고 있던 구급낭을 꺼내 남자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곪기 시작한 상처 사이로 고름이 맺혀 있었다. 급한 대로 소독을 하고 붕대를 매어주던 미강은 지민과 번갈아가며 질문을 이었다. 가족분들이 근처에 있나요? 다른 생존자들을 보셨습니까? 대피소 위치를 확인하셨습니까?
남자는 계속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지민은 어느 정도 악취에는 적응하고 있었지만, 사방에 널려 있는 시체들에는 도저히 눈길을 둘 수 없었다. 지민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남자가 끌어안고 있는 알루미늄 케이스로 옮겨졌다. DELL 로고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충격과 방수능력이 극대화된 모델의 노트북이 아닐까 싶었다. 케이스 한 귀퉁이에는 NCDR② 로고가 새겨져 있었지만 지민은 그 로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미강은 남자와 계속 대화를 시도 하면서 자신의 배낭에 들어있던 음료수와 칼로리 바를 꺼내 남자에게 먹였다. 남자는 미강이 건넨 물을 마시고 난 다음에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했다.
“세 시간 내로 다시 옵니다…. 세 시간 내로….”
남자는 지민과 미강을 번갈아 보며 목소리를 보다 뚜렷하게 가다듬었다. 아니, 뚜렷하다 못해 폭발할 것처럼 날카로웠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제저녁에 온 것은 본진本震이 아니었어요. 진짜 본진이 올 겁니다. 그때까지는, 모두 고지대에 있어야 해요, 벌써 내려오면….”
“선생님? 선생님? 잠시만요…. 진정하시고 질문에 대답해주세요.”
미강이 남자의 어깨를 잡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선생님, 어젯밤을 이곳에서 보내셨습니까? 선생님 말고 다른 생존자들을 보셨습니까? 그리고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남자는 다른 생존자라는 단어에 반응한 듯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는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말했다.
“어제 첫 번째 지진이 있던 순간에 이곳 해운대에 있었습니다. 다른 생존자는… 내 딸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 이름은 장명국입니다. 이곳에서 일하고 있어요.”
남자는 노트북 케이스 한쪽의 NCDR 로고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 우선 선생님이 일하시는 곳 이야기는 나중에 듣고요, 따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생존자가 있다면, 선생님과 함께 대피소로 가셔야 합니다.”
남자는 두리번거리다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긴 지민은 욕설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맙소사, 이 아저씨가 아니었어요.”
“뭐라고요? 잠깐, 어디 가는 거예요?”
지민은 미강이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무너진 호텔의 잔해 사이로 달려갔다. 귀밑으로 깡총하게 친 단발머리, 나이는 아홉 살 정도의 여자아이. 외모는 달라졌지만 지민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웬즈데이.”
“오랜만.”
간판 밑으로 삐져나온 시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소녀가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네가 한 짓이야?”
웬즈데이는 두 손을 들어 보란 듯이 주변 풍경을 가리켰다.
“이걸 내가? 두 쌍의 지각판을 비틀고 서로 엇나가게 했냐고? 그것도 여섯 시간 차이로 충돌하도록? 그럴 리가. 그것들은 항상 움직이고 있어. 지질학적 시간③ 규모의 움직임이라 정지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정지한 것처럼 보일 뿐, 정지한 것은 아니야. 비록 복제 인스턴스 안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어. 에이도스라고 해도 말이야. 어떤 변수를 넣을지 짐작조차 못 하는 규모란 말이야. 그러니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지금은 2036년이야! 그리고 2036년에 한반도 남부에 지진은 없었어. 지금 이 세계가 변형된 거라고! 적어도 내가 본 바에 의하면 그걸 할 수 있는 사람… 아니, 너 사람이 맞긴 하니? 하여튼….”
“이 세계에서 우린 다 정보일 뿐이야.”
웬즈데이는 간판에 깔린 시신의 손을 발로 툭툭 걷어찼다.
“그거 알아? 우주의 최소 단위는 정보란 걸.”
지민은 웬즈데이가 시신을 가지고 발장난을 치는 모양새에 불쾌감이 밀려왔다. 물에 불어 부풀어 오른 손가락을 밟았다 떼었다 하며 가지고 노는 모습은 바닷가에서 장난치는 어린아이 같았다. 악의 없는, 그렇기에 더욱 악랄하게 보이는 순수함.
“하지 마. 죽은 사람에게 그런 장난 치지 마.”
“이건 사람이 아니야. 그냥 죽은 정보일 뿐. 어땠는지 얘기해줄까? 이 남자는 서울에 가족이 있어. 이곳에는 출장을 핑계로 내연녀와 함께 온 거고. 저기 호텔 보이지? 저기서 묵었어. 지진이 났을 때는 내연녀고 뭐고 자기만 살겠다고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까지 밀치며 도망 나왔지. 뭐, 그러다 간판에 깔려 죽긴 했지만.”
웬즈데이는 다시 시신의 손을 발로 걷어찬 다음에 말했다.
“생명의 법칙에서 완벽하게 공정한 것은 단 하나야. 죽음이지. 지금 우리는 우주적인 규모의 완벽한 공정함을 보고 있어. 지질학적 시간 규모에서 찰나보다 짧은 시간 동안에 이루어진.”
지민은 허리춤에 매고 있던 권총을 뽑아 들었다.
“도저히 못 참아주겠어! 너 여기 온 목적이 뭐야?!”
“그거 쏠 줄은 알아?”
웬즈데이의 입가에 냉소가 피어올랐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미강이 화들짝 놀라 달려오고 있었다.
“정 박사! 무슨 짓이에요?”
지민은 그제야 자신이 총으로 겨눈 상대가 아홉 살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총을 내려놓으려 했지만, 순간 장명국의 외모로 추정하는 나이와 비교해 볼 때 아홉 살은 너무 어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정말 이 아이가 따님 맞습니까?”
미강과 함께 달려온 장명국은 피로한 듯 눈을 껌뻑이며 웬즈데이와 지민의 얼굴, 그리고 그사이의 권총을 번갈아보았다. 남자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단어를 잊어먹은 사람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희미하게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정말… 잠자는 아이 같았어요.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나온 다음 지쳐서 잠든 아이 같았지요. 바닷물에 휩쓸렸다가 멀리 떠내려가지 않아 온전했다고… 경찰이 그랬어요.”
미강은 장명국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지민에게 말했다.
“저, 이분이 누군지 알 것 같아요. 기억 안 나요? 우리 어릴 때….”
“얼마큼 어릴 때요? 한 서른 살?”
“지진 예언가 장명국 박사. 저 초등학교 때였나? 동해 지진 예언했는데, 그것 때문에 전국이 난리 났었잖아요. 라면이며 생수며 몽땅 사재기하고….”
“아! 기억나요. 하지만 지진은 없었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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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Bob Dylan. 1975.
② 대만 국가재해 저감과학기술센터(national science and technology center for disaster reduction)
③ 지구의 탄생에서부터 지질시대의 연대를 구분하는 시간 규모. 시대를 구분하는 단위 중 가장 큰 것은 이언(Eon)이며 약 10억년을 의미한다.
[지난 줄거리]
멸망을 앞둔 태양계의 지구 문명을 다른 행성계로 복원하는 오메가 플랜이 진행 중인 가까운 미래. 오메가 플랜의 데이터 분석학자 지민은 복원을 위해 백업하는 역사 데이터에서 주요 전환점의 사건들에 개입하여 역사를 바꾸는 실험 중이다.
[인물 소개]
지민: 인공 지능체 에이도스에 저장된 역사의 분기점에 개입하는 시간 여행자.
에이도스: 새로운 행성에 복원할 인류의 문명과 역사를 백업하는 인공 지능체.
하미강: 오메가 섹터의 격리 구역 보안 책임자.
웬즈데이: 국제적 해커 연대 고스트라이더의 리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