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훈(옥천신문 기자)
#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다
대학에선 두꺼운 철학책을 끼고 앉아 사랑이니 삶이니 실존이니 하는 말을 지껄이고 싶었다. 어릴 때 본 드라마에 나온 형들은 그랬다. <우리들의 천국>이나 <카이스트> 같은 드라마. 나이를 더 먹고 취직을 하면 자기 일을 사랑하고 열의가 넘치는 신입사원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 야근 중에 눈 맞은 직장동료와 시작한 불 같은 연애 같은 것도 상상했다. <미스터큐> 같은 드라마를 보면 그런 장면이 꼭 있었다. 그런 장면에서 여배우는 주로 김희선이었다. 꿈이 참 컸다. 난 장동건이나 김민종이 아닌데.
생각해보면 한 20년쯤 전, 드라마엔 캔디들이 참 숱하게 나왔다. 그런 드라마의 캔디는 자고로 돈 앞에 의연해야 했다. 나쁜 짓하고 돈으로 대충 때우려는 재벌 2세에게 “돈이 전부인 줄 아느냐, 일단 사과부터 하라”는 대사를 날려주는 게 자고로 모든 드라마 속 신데렐라, 캔디의 첫 대사였다. (그럼 그 당당하고 올곧은 성품에 재벌 2세가 홀딱 반한다. 하지만 사실 그녀가 엄청 예뻐서 반하는 거다. 캔디 역도 주로 김희선이나 최지우가 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캔디는 돈 앞에 의연하지 않다. 드라마 속의 대학에도 삶이나 실존, 사랑, 낭만 같은 오글거리는 말보다 알바와 최저임금과 등록금, 취업난 같은 말이 더 많이 등장한다. 돈이 지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말로 꿋꿋하던 캔디들은 이제는 지고의 가치인 돈을 벌기 위해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내는 꿋꿋함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돈보다 꿈과 사랑을 택하던 대학생들은 꿈과 사랑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번다. 예전엔 직장에서 야근하다 눈 맞는 커플의 가장 큰 방해가 ‘연적’이었지만 지금은 ‘신분’이다. 남자 주인공은 주로 정규직, 여자 주인공은 비정규직이다.
그건 아마 사랑과 낭만으로 살아 갈 수 있었던 시대의 드라마 주인공들과 달리, IMF에 사춘기를 보내고 FTA의 시대에 연애하고 취직해야 하는 신자유주의형 주인공들이 갖는 삶의 태도 때문이겠다. 세상의 모든 가치가 돈에 맞춰지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고 있는 지금 우리들의 드라마.
#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다”
지난해 10월, CJ E&M의 예능채널인 tvN에서 드라마를 만들던 이한빛 PD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드라마 <혼술남녀>의 종방연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이한빛 PD가 만들던 <혼술남녀>는 노량진 고시학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다. 친구가 없고 돈이 없고, 시간과 여유가 없어 홀로 술을 마시는 ‘혼술족’들의 이야기다. 공식 홈페이지의 기획의도는 그들을 ‘위로’하고 ‘공감’하려 한다고 드라마를 소개했다. 그러나 이한빛 PD의 일은 위로와 공감이 아니었다. 이한빛 PD는 <혼술남녀>의 조연출을 하면서 촬영 중간에 촬영팀에게 계약파기를 알리고 계약금을 환수 받는 일을 담당했다. 드라마 현장의 계약직들에게 ‘정리해고’를 통보 하는 일이다. 이한빛 PD는 계약직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일에 대해 선임 PD에게 문제를 제기했지만 돌아온 것은 비난과 욕설이었다. 이후 그에게 살인적인 강도의 노동이 강요됐다. 선임의 눈 밖에 난 그에게 인격적인 모독과 집단 괴롭힘도 뒤따랐다. 이한빛 PD의 유가족들은 CJ E&M을 ‘괴물’이라고 불렀다. 이한빛 PD가 사망한 이후 회사는 유가족에게 “이한빛 PD가 불성실했고 비정규직을 무시해 갈등을 초래했다”고 비난했다. 사건은 6개월 가까이 은폐됐고 4월이 돼서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수면 위로 올랐다.
기륭전자, 서울대 점거 농성장, KTX 해고 승무원, 416 연대. 이한빛 PD가 1년차 월급을 쪼개 돈을 보낸 곳들이다. 신출내기 드라마 PD는 아마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나보다. 마음과 힘을 모아 더 좋은 세상, 따듯한 마음을 그리는 그런 드라마. 돈 보다는 사랑이 중하고 삶에는 희망이 남아있는 그런 드라마. 외로운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드라마. 그러나 세상은 드라마와는 달랐다. 정리해고, 계약직, 욕설과 따돌림. 어딜 봐도 드라마 같지 않던 현장에서 그는 조금씩 죽어간 셈이다. 차라리 그보단 이제 드라마조차 더 이상 따듯할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토록 비정한 세상의 삶이야말로 드라마처럼 사는 일일까.
# 드라마처럼 살 수 있을까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김과장>은 ‘사이다 같은 드라마’라고 호평 받았다. 말단 사원들이 재벌기업의 부조리에 맞서는 내용이었다. 몇 해 전 크게 히트한 <미생>은 비정규직 노동자 들에게 ‘장그래’라는 대명사를 만들어줬다. 그 드라마들을 꼬박꼬박 챙겨봤지만 어린 날 그랬던 것처럼 그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경리부 말단직원들이 대기업의 분식회계를 밝혀내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믿을 수 없고, 비참한 비정규직의 삶을 견뎌내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제 드라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
고다르가 말하길,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반영의 현실이라고 했다. 영화란 현실을 그려내는 것보다는 만드는 이가 그리는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비정규직을 막무가내로 해고하고 이에 문제를 제기한 PD가 죽어나가는 세계에 사는 이들이 그려낸 현실을 구태여 보고 싶지 않다. 이제 이 세계에서 어느 누구도 희망 같은 걸 감히 찾아낼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쩐지 자꾸 옛날 드라마만 찾아보게 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서울의 달>을 유료 결제했다. 홍식이는 비참한 가운데서도 삶의 희망을 부여잡을 수 있었는데.[워커스 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