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워커스

facebook
 
월간 워커스월간 워커스
월간 워커스
  • 정기구독 신청
Menu back  

아무말 아무말 아무말

2018년 3월 22일Leave a comment40호, 아무말 큰잔치By 성지훈

사계

성지훈(국민TV 기자)


“그래서 청년의 문제가 뭔데?” 물으면서 <아무말 큰잔치>를 시작했다. 청년 문제를 주제로 매달 15매의 원고를 써내라는 도무지 무리한 청탁을 받았고, 청년 문제 같은 건 없다는 말로 첫 회 원고를 때웠다. 써놓고 보니 너무 아무말이나 지껄인 것 같아 내친김에 코너 이름도 <아무말 큰잔치>로 지었다. 지난 29호에서 시작했고 이 원고는 아마 40호에 실리게 될 테니, 1년 동안 그렇게 아무말이나 막, 그리고 잘 떠들어댔다. 아무튼, 지나 생각해보니 (실은 구색을 끼워 맞춰 보니) 코너 이름을 잘 지었구나 싶다.

애초의 기획의도였던 청년의 문제란 어쩌면 우리가 언어를 상실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아닐까. 400자의 트위터, 사진과 해시태그의 인스타의 세계에는 담을 수 없는 긴 이야기. 진지충의 오글거리는 이야기. 설명충의 따분하고 재미없는 이야기.

얼마 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자기의 ‘배우론’을 이야기하던 젊은 배우에게 면박을 주던 진행자들을 봤다. ‘오그라든’ 손발을 내밀면서 “혹시 아직 싸이월드 하세요?”라고 묻더라. 그러게, 싸이월드를 하던 때만 해도 우린 사이좋은 사람들과 함께 오글거리는 이야기를 지금보다는 많이 나눴다. 삶이 어쩌고, 세계가 저쩌고. 내가 처음으로 PC통신이라는 걸 시작했을 땐 더 했다. 그때 파란 바탕의 ‘BBS’에서 만난 누나와 형들은 짤방 한 장, 3분 순삭되는 요약으로는 차마 전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떠들고 욕하고 싸우고 그랬던 것 같다. 원고지에 눌러쓴 주의와 주장을 투고하고 연애편지에 마음을 담던 시대는 더 진지하고 오글거렸겠지. 시대는 변하고 기술은 발달하고 거기에 맞춰 사람도 취향도 트렌드도 변해가겠지만 그 흐름의 방향을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언어를 잃어가는 과정’이겠다.

오글거린다는 말이 나온 게 언제더라. 그 말이 나온 후부터 우리는 진지한 이야기를 견딜 수 없게 된 것 같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인터넷이 가장 빠른 나라가 된 이후 텍스트의 자리를 이미지가 차지하게 된 것 같다. 긴 글을 올리고 삭제당하지 않기 위해 올리던 ‘짤림방지용 사진’이 이제 긴 글을 대신한다. 스마트폰과 트위터가 등장하자 400자가 넘는 글은 길다며 읽지 않는다. 조금 진지한 글이 올라오면 ‘진지충’, 조금 긴 글이 올라오면 ‘설명충’이라는 놀림이 따라붙는다. 쿨과 담백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사유의 언어는 유실됐고 비디오와 스킵과 유동성의 세계에서 텍스트에 정주하며 행간을 비집는 상상력의 언어는 도태됐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내고 있지만 정작 언어는 상실했다.

저마다 힙스터가 되겠다고 하지만 정작 몰개성화하는 일이란 자기를 들여다보고 자기의 언어로 자기를 피력하지 못 하는 일이다. 수십 명이 같은 장소에 모여 비슷한 옷을 입고 모두 똑같이 급식체로 말하는 게 무슨 힙스터야. 타자를 혐오하는 일은 타인과 주고받는 언어가 사라진 일이다. 타인의 언어를 받아들이지 못하니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리 없다. 생리휴가를 말했더니 군대나 가라고 말하는 빈약한 언어 말이다. 세계를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그 단순한 논리에 끼워 맞추지 못한 모든 것들을 배제하는 광기도 마찬가지. 그의 언어가 단순하기 때문이다. 세계에 선과 악만이 있고 우리 편이 무조건 좋은 편이라는 단순한 세계의 단순한 언어.
과거로 돌아가자, 스마트폰을 파괴해라, 옛날이 좋았어, 20대 이 ‘멍청한 개새끼’. 이런 얘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러다이트 운동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다만 우리가 쿨과 담백, 편의와 유행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위해 무엇을 버렸는지 상기해 볼 일이라는 거다.

우리는 ‘아무말’을 떠들어야 한다

우리는 ‘아무말’을 떠들어야 한다. 나는 청년의 문제는커녕 당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심지어 내 문제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떠들어야 한다. 나는 아무말을 떠들고 그걸 들은 당신은 내게 욕을 한 바가지씩 던져야 하고, 난 발끈해서 또 아무말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 상호작용이 쌓이고 쌓여야 우리는 서로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 될 거다. 세계에 대해 질문하고 주장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3분 순삭을 위해 편집하고 잘라내는 자투리들에 실은 진실이 담길 수 있고, 400자로는 표현해낼 수 없는 더 진지하고 구구절절한 이야기에 삶의 비밀 같은 게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에게 더 진지하고 장황하고 느끼하고 오글거리는 아무말을 던져야 하고 그걸 견뎌내야 한다. 한없이 빈궁해지는 언어를 채우는 것만이 나와 당신과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는 일이다.

예전에는 아무도 자기를 잉여라고 부르거나 바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자기를 땡중이라고 부르는 스님들을 보면 대단한 고승대덕처럼 보이기도 했다. 요즘은 다들 자기를 한없이 가벼이 여기고 잉여라고 여기니까,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만으로라도 아무말을 내뱉으며 조금 더 진지해지고 조금 더 허세를 부려보자. 진지충이라고 불리면 어떻고, 오그라든다고 놀림 받으면 또 어떤가. 사실 요즘 같을 때라면 그게 바로 힙스터다.

모쪼록 쓸데없이 진지하고 괜히 아무말이나 지껄이는 졸고에도 1년이나 지면을 내준 워커스에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그 아무말을 읽으면서 작자에게 욕설 협박 메일 한 번 보내지 않은 선량한 독자 제현들껜 더 큰 감사의 말씀을. 우리 더 허세 부리고 더 진지하게 삽시다. 그럼 전 안티에이징과 보습에 바빠서 이만. 코 찡끗.[워커스 40호]

추천기사

  • 2017년 10월 25일 서울에서 집 구하는 이야기, 살면 또 삽니다만
  • 2018년 3월 4일 운동사회의 미투, 들리십니까
  • 2017년 11월 24일 당신의 삶은 ‘스튜핏’하지 않다
  • 2017년 4월 5일 ‘청년 문제’ 같은 건 없다
  • 2017년 4월 24일 드라마처럼 살 수 있을까
  • 2018년 2월 26일 지엠 구조조정, 비정규직 목소리는 묻혔다
  • 2018년 2월 27일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압박 정책과 한반도 정세
  • 2018년 3월 28일 잊히길 강요당하는 어떤 죽음
About the author

성지훈
acesjh@jinbo.net


성지훈의 다른 기사 →

update: 2018년 3월 22일 15:51
연관된 다른 기사
『노동자연대 성폭력 사건』 관련 반론보도
2018년 6월 6일
[알림] ‘『노동자연대 성폭력 사건』 관련 반론보도’에 대한 <워커스> 입장
2018년 6월 6일
약속은 내가, 이행은 알아서들 하세요
2018년 3월 29일
종북
2018년 3월 28일
잊히길 강요당하는 어떤 죽음
2018년 3월 28일
‘노동존중특별시’에서 노동 살인이 일어난 까닭
2018년 3월 27일

댓글 남기기 응답 취소

많이 본 기사
  • 삼성서울병원은 왜 성균관대 부속 병원이 아닌가
  • 뒤르켐의 ‘자살론’
  • 서울 랜드마크 빌딩의 소유주를 찾아서
  •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
  • 플라톤의 교육 사상
  • ‘헬스키퍼’로 일하는 시각장애인 노동자입니다
  • 칸트의 ‘영구 평화론’

60호 / 조국을 떠난다

RSS 참세상 기사
  • 부실한 의료 체계 속 코로나19 중환자 고통 가중 2022년 5월 18일
  • 군인의 성적 권리를 지키는 군대 2022년 5월 17일
  • 성소수자들이 대형 무지개 현수막을 국회 앞에 펼친 이유 2022년 5월 17일
  • 전쟁으로 돈 버는 부동산 임대인 2022년 5월 16일
  • 간호인력인권법 폐기 시도에 반발하는 간호사들 2022년 5월 16일
  •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가 한국 사회운동에 던지는 질문들 2022년 5월 15일
  • 레인보우 패밀리, 딸 인보와 두 아빠의 이야기 2022년 5월 13일
  •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2022년 5월 12일
  • 임종린 지회장 단식 46일차…5년간 더욱 심해진 SPC의 노조혐오 2022년 5월 12일
  • ‘단 몇 초’만에 노동자가 사업소득자 되는 수법 2022년 5월 12일
  •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취재하던 기자, 이스라엘군 총 맞아 사망 2022년 5월 12일
워커스

워커스 등록번호: 서대문-라-00126
등록일자: 2017년 3월 13일
발행인 : 강내희, 편집인: 윤지연
서울시 서대문구 독립문로 8길 23, 2층
FAX : (02)701-7112
E-mail : workers@jinbo.net

«워커스»에 실린 글, 사진 등 저작권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모든 자료의 저작권은 «워커스»에 있으며, «워커스»의 동의하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login

60호 / 조국을 떠난다

월간 워커스
  • 정기구독자 가입
  • 제보
  • 워커스 소개
  • 광고안내
  • RSS
  • 이번호/지난호 보기
  • 기사 검색
  • facebook
footer-me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