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서울나들이를 오겠다며 갈만한 곳을 추천해달라고 물으면 종종 청계천을 말한다. 청계천을 권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주말이면 관광객이 붐빌 정도로 행사도 많고 겉보기에 예쁘게 꾸며 놓은 천변 산책로 때문이다. 가족이나 동료와 함께 걸으면서 볼 구경거리가 많다. 무엇보다 청계광장은 서울 도심 한가운데 있고 광화문광장이나 서울 시청 앞 서울광장과 더불어 3대 도심 집회 장소이니 한 번쯤 와도 좋겠다 싶어서 추천하곤 한다.
다른 이유는 청계6가에 있는 평화시장 앞 전태일다리(버들다리)와 청계7가 황학동 벼룩시장 때문이다. 큰 건물과 깔끔하게 닦은 청계천 주변은 가난한 노동자와 노점상이 살던 빈민들의 거처이자 빈곤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그래서 이번엔 오랫 동안 빈민운동을 한 활동가이자 청계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최인기 씨를 인권기행의 길잡이로 했다. 우리는 동묘에서 만나 황학동이 자리한 영도교를 지나 평화시장과 전태일 다리까지 걸었다.
빈민들을 쓸어버린 복개공사와 복원공사
최인기 씨는 청계천에서 “오래전 빈민운동과 야학이 활발했다”고 했다. 근처 대학교가 많아 연대도 많았다고 했다. 동묘 건너편 창신동은 빈민가로 유명했다. 국민화가로 칭송받는 박수근의 집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에는 다닥다닥 붙어있는 달동네의 모습이나 어린 아기를 업고 있는 소녀의 그림, 개천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아낙의 모습 등 50~60년대 서울 가난한 동네의 삶이 담겼다.
“창신동에 있던 철거민들이 여기 복개공사하면서 이 주변에 있던 철거민들을 경기도 광주로 이주시키려고 했어요. 민주노동당 대표였던 김혜경 씨가 젊었을 때 수도권선교사위원회 활동가로 들어갔는데 경기도 광주로 강제 이주되는 게 너무 황당해서 주민들을 조직해 서울시를 상대로 집회를 개최합니다. 빈민운동사의 기록에 남을만한 싸움을 했죠. 청계천에서는 제정구나 손학규 등이 빈민야학활동을 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수많은 학생들이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죠.”
복개공사는 일제로 거슬러간다. 중일전쟁 때 일본은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교통로 확보를 명목으로 청계천 복개(하천에 덮개 구조물을 씌워 겉으로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가 시작됐다. 해방 후에도 공사는 이어졌다. 전쟁 후에는 피난민들이 허물어진 청계천가에 판잣집을 만들고 살았다.
복개로 판잣집이 철거되면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봉천동이나 신림동 등으로 이사했고 장사하던 상인들도 떠나야 했다. 복개공사가 끝날 무렵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청계고가(삼일고가)를 만들자고 한다. 주변의 반대에도 예산도 설계도 없이 기공을 하더니 1967년 기어이 착공했다. 복개공사는 77년에야 끝났다. 사람들에게 복개공사는 더러운 도심을 깨끗하게 정비하고 그에 따라 빈민가도 사라지는 것으로 인식돼 전국에 복개공사가 유행했다.
그런데 빈민들이 쓸려간 자리에 다시 빈민들이 들어섰다. 새로운 현대식 건물인 평화시장 주변, 복개천 위에 노점상들이 들어선 것이다. 옷가지나 풀빵 같은 먹을거리를 팔았다. 황학동에는 골동품 거리로 유명한 벼룩시장(일명 도깨비시장)이 자리 잡았다. 최 씨는 초등학교 때 서울로 이사 왔는데 그때 집이 영도다리 근처 삼일아파트였다. 당시에는 잠실이나 강남에 아파트가 대대적으로 들어선 때라 낙후된 아파트 축에 든다고 했다. 청계고가 옆으로 당시로는 고층인 삼일빌딩과 삼일아파트가 늘어섰다. 60~70년대 청계로는 박정희 시대 경제발전의 상징이었다.
[출처: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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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힐까지 가는 최단 거리를 만들려고 삼일고가를 만들었다고 해요. 그런데 저런 집(낡은 한옥)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니까 삼일고가를 축으로 삼일아파트를 지었대요. 발전한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시각적 효과를 노렸던 거예요. 제가 초등학교 때 서울로 왔을 때 동대문에 고속터미널이 있었어요. 강남으로 터미널이 이사하기 전에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다 저기서 내렸어요. 거기에 내리면 삼일고가가 보이죠. 작은아버지가 광교까지 가서 저를 데리고 삼일고가도로를 쭉 구경을 시켜줬어요. 첫 번째 서울구경이었지요. 서울에 갔더니 하늘 위로 차가 다니더라, 그렇게 자랑할 수 있는 곳이었죠.”
그런데 2003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환경복원, 문화재복원, 그리고 주변 낙후시설 개선’을 내걸고 청계천 복원공사를 시작한다. 단시간에 끝낸 청계천 복원공사는 차수막을 설치한 시멘트 바닥의 인공수로라 환경적이지도 않았다. 2003년부터 2005년 10월까지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는데 2003년 겨울 근처 노점상을 대대적으로 철거하면서 공사를 시작했다. 청계천 주변에서 생계를 잇는 노점상과 제대로 된 협의도 없었다. 최 씨는 청계천을 뜯어내던 2003년 겨울을 잊을 수 없다. 성동기계공고 근처였다.
“노점상 천 명 정도가 모였는데 걔네들(경찰과 용역들)이 새벽부터 치고 들어온 거예요. 여기가 대치선인데, 사람들이 폐타이어를 세워서 불태웠지만 경찰들이 워낙 막무가내여서 금방 무너졌어요. 그때 동자동에 있던 노숙인 활동가에게 전화가 왔던 게 기억나요. 우리 아저씨들이 청계천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그래서 가까이서 보니까 노숙인이 맞아요. 앞에 있는 사람들이 11월이면 추운데 슬리퍼 신고 츄리닝 입고 이상해요. 서울시가 맨 앞에 노숙인을 세운 거예요. 일당 주고 비겁하게. 나중에 노숙인들한테 일당을 안 줘서 서울시에 항의한 게 신문에도 작게 보도됐어요.”
그렇게 밀려간 사람들은 결국 서울시와 협의해서 동대문 축구장에 풍물시장을 만들고 거기에 들어가기로 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기본시설도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 후 오세훈 서울시장이 디자인서울을 내세우며 그 자리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만든다고 해서 결국 노점상들은 또다시 쫓겨났다.
변하지 않은 노점 단속
서울시가 도심개발을 할 때마다 노점상들은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렸다. 이에 대해 동묘근처에서 장사를 하는 민주노련 감사 안호 씨는 말한다. “어찌됐든 빈민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려서 살아야 하는데 인위적으로 이리 몰고 저리 몰고 하니까. 정말 그건 불행이잖아요. 정감도 없어지고…. 마음이 아프죠.” 그렇다. 개발이란 빈민공동체를 깨는 일이다.
우리는 80년대부터 장사를 하고 있는 과일 노점상 양춘석 씨에게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할 만한 데가 없고, 사회정책이 부재해서 노점이 생기는 건데. 노점은 세계적으로 없는
나라도 없고, 빈민들한테는 노점을 허용해주는 게 맞는 정책인데 자꾸 단속하니.” 그는 정부가 바뀌었어도 노점정책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고 했다.
황학동 근처 영동다리에서 만난 노점상의 이야기와 똑같았다. 동묘 근처 벼룩시장은 단속하지 않으면서 영도다리 노점은 아침저녁 하루 두 번 단속을 한다. 단속으로 구청이 가져간 물건은 2~3일 뒤 8만 원을 내고 찾아와야 한다.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데 8만 원이라니. 최인기 씨는 종로구청이 노점상이 확대되는 걸 막기 위해 영도다리만 단속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빈민들을 쓸어내는 행태는 복개공사나 복원공사 같은 큰 개발만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헌책방이 있는 평화시장을 지나니 청계6가 전태일 다리가 보였다. 버드나무가 멋있어 버들다리로 불리다 전태일 동상이 세워지면서 지금은 전태일 다리로도 불린다. 그는 평화시장에서 먼지와 저임금에 시달린 봉제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애썼다. 그의 평전에 쓰여 있던 ‘여자아이들(시다)이 잠도 못자고 일만 하면서도 돈이 없어 점심을 못 먹는 게 안쓰러워 전태일은 그들에게 차비로 풀빵을 사주고 터벅터벅 걸어왔다’는 일화가 떠올랐다. 그 풀빵을 여기 노점상들이 팔았다. 노점은 지금도 가난한 이들이 기댈 수 있는 생존수단이다.
빈민들의 거처가 조금 남아있는 청계천에서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한” 노래, ‘청계천 8가’를 속으로 불러본다. ‘어느 핏발 솟은 리어카꾼’이 더 이상 비참하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광장시장으로 향했다.[워커스 3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