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못지않게 강고한 반공주의와 민족주의의 결을 지닌 미국사회에서 ‘사회주의’는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왔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자연자원, 인적자원, 그리고 기술혁신을 통해 다수 미국인들(=백인들)에게 풍요의 맛을 일정부분 제공하고 이들의 잠재적 불만을 포섭해왔던 역사가 있다. 20세기 초 ‘진보의 시기(The Progressive Era)’라 불리는 개혁기를 거치며 성장했던 사회주의 노동운동은 대공황 이후 뉴딜정책이 펼쳐지며 대체로 민주당에 흡수됐다. 전후 팍스 아메리카의 풍요는 냉전시대 반공주의 메카시즘과의 광풍과 맞물리게 되면서 이후 사회주의 운동의 객관적 조건과 문화적 토양은 상당부분 고갈돼 버린다.
미국의 정치사회학자 시모어 마틴 립셋은 이처럼 특수한 미국정치과정에서 형성된 자유주의, 개인주의, 공화주의, 시장경제 등의 가치를 사회주의와 양립하기 어려운 미국 예외주의의 핵심으로 꼽기도 했다. 실제 경제정책과는 무관하게 사회주의는 미국적이지 않다는 문화적 믿음이 강고하게 자랐고 사회주의는 종종 나치와 연결돼 이해됐다(나치의 공식 당명이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었다). 60년대 시민권 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 킹은 공산주의자라는 근거없는 비난과 맞서 싸워야 했으며, 미국의 우파는 더 많은 미국인들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확대하고자 했던 오바마의 의료개혁(오바마케어)을 사회주의적이라 낙인찍고 그를 히틀러에 비유하기를 즐겼다.
사회주의 부상의 배경들
이런 미국의 역사적 맥락에서 새롭게 싹트고 있는 사회주의의 기운을 어떻게 봐야 할까? 무엇이 이러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을까? 이 변화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은 거대한 돌풍이 될 것인가, 아니면 작은 파동으로 남을 것인가? 그리고 미국에서의 변화를 보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두말할 것 없이 미국에서 성장하는 사회주의자의 배후에는 신자유주의의 극한적 심화와 이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70년대 경제위기를 맞아 “정부는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라며 민영화와 기업 규제완화, 노조파괴 정책 등을 밀어붙였던 레이거노믹스는 수십 년 지속됐던 복지국가 패러다임을 무너뜨렸다. 그 이후 2008년 경제위기의 비용이 고스란히 노동자 서민들에게 전가되면서 불평등 지수는 더욱 큰 폭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줄어드는 일자리와 임금에, 학생들은 점점 더 비싸져가는 학비와 빚 감당에, 그리고 도시 서민들은 치솟는 월세와 높은 의료비용에 허덕이고 있는데, 그나마 노동자 서민을 대변한다 믿었던 민주당은 노골적인 친기업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렇게 쌓였던 불만과 불신은 2011년 가을 오큐파이월스트리트(#OWS)의 모습으로 폭발했다. 같은 해 아랍의 봄으로 촉발돼 스페인, 그리스, 이스라엘 등지에서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에 고무되어 뉴욕과 미국 전역으로 퍼져 몇 달 간 지속됐던 #OWS의 역사적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우리는 99%’라는 슬로건은 가장 부유한 1%와 대다수 미국인들 사이의 부의 불평등을 효과적으로 각인시키면서 사람보다 이윤을 앞세우는 파괴적인 자본주의의 민낯을 드러냈다. 그 결과 양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미국의 자본주의와 그 문제들이 주류 언론까지 포함하는 공론장에서 토론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후 공공담론에 사회주의가 등장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을 제공했다.
동시에 #OWS는 미국 사회운동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정치권에 호소하던 전통적인 운동 형태를 벗어나 ‘공공질서’를 깨는 직접행동 방식을 택함으로써 사회운동 커뮤니티 안에서 보다 전투적인 전술의 효과와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높였다. 그 결과 2013년부터 시작된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 운동(#BlackLivesMatter), 트럼프 당선 이후 활발해진 극우 백인우월주의와 파시즘 경향에 맞서는 안티파 운동(#antifa), 그리고 최근 트럼프의 반이민정책 반대운동(#AbolishICE) 등에서 도로나 건물 점거 등과 같은 저돌적인 직접행동 방식이 퍼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미국 운동진영의 급진화 양상은 선거 공간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9년 초국가적 반WTO 연대투쟁의 진원지였던 시애틀에서는 인도 이민자 출신 IT 전문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 크샤마 사완트가 사회주의 대안(Socialist Alternative)이라는 트로츠키주의 경향 정당의 후보로 2013년 시애틀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됐고, 당선 후 미국에서 처음으로 시애틀에 최저임금 15달러를 도입하는 촉매 역할을 하면서 재선까지 성공했다. 2016년 대선 민주당 당내경선에 참여한 버니 샌더스는 민주당 주류에 실망했던 유권자들을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깃발 아래 규합하게 된다. 비록 선거에서는 졌지만, 샌더스는 이전까지 정치에 무관심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을 새롭게 정치의 장에 끌어들이고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미국 공공담론의 장에 안착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것도 긍정적인 의미로!
이후 ‘버니 효과’라 불리우며 사회주의는 조금씩 친숙한 개념으로 미국인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으며 가장 낮은 지방의회의 수준에서부터 민주적 사회주의의 깃발을 내건 후보들의 참여도 늘기 시작했다. 2017년 선거에서는 해병대 출신 사회주의자 리 카터가 버지니아 주의회 의원으로 당선되는 등 상당한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올해만 해도 오카시오-콜테즈와 틀래입 외에도 벌써 세 명의 여성 사회주의자 후보가 펜실베니아주 의회선거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해 상하원 자리를 노리는 등 50명 가까운 사회주의자 후보들이 시의회부터 주지사에 이르기까지 최종선거에 나서고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미국의 민주적 사회주의자들(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 DSA) 소속이다.
▲ https://www.thenation.com/article/in-the-year-since-trumps-victory-democratic-socialists-of-america-has-become-a-budding-political-fo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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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사회주의자들
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DSA는 독자적인 정치정당이 아닌 정치조직이다(법적 지위는 교육단체). 마이클 해링턴이라는 사회주의자가 1982년 민주당 내 사회주의적 경향을 가진 이들의 모임과 뜻을 모아 1982년 창설했는데, 오랫동안 모호하고 별 의미 있는 활동도 보이지 못하는 무수한 미국 좌파단체들 중의 하나로 남아 있었다. 1999년 반WTO 투쟁과 2011년 #OWS를 거치면서 젊은층의 참여가 늘긴 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모임에 나가보면 6-70대 이상 백인 월남전 세대가 대다수였다.
DSA는 그러나 ‘버니 효과’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2015년까지만 해도 5000명 조금 넘는 정도였던 회원수는 트럼프 당선과 맞물리며 1년 새 3만 명으로 늘었고, 오카시오-콜테즈의 승리 이후 다시 광폭 증가하며 곧 회원 5만 시대를 내다보게 됐다. 다른 많은 정치조직들과 달리 DSA 회원은 회비납부의 의무를 져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증가세는 가히 전무후무하다 할 것이다. 2018년 현재 DSA는 미국 50개 주에 200개 넘는 지부를 가동하고 있으며 가장 큰 뉴욕시지부는 5천 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대학 캠퍼스는 물론 이미 수십 개의 고등학교에서도 DSA 조직이 세워졌는데, 2016년 새로 가입한 이들의 80% 가까이는 35세 이하의 젊은층이다.
흔히 밀레니얼이라 지칭되는 미국의 젊은 세대가 DSA로 끌리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의 젊은 세대가 자신들의 나라를 헬조선이라 부르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수년 전부터 많은 연구들은 밀레니얼 세대가 그들의 부모 세대보다 못한 삶의 질을 영위하는 첫 세대가 될 것이라 예측해왔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젊은 세대도 대학 졸업 후 감당해야 할 학자금 빚과 좁아진 취업문으로 인해 엄청난 불안감을 안고 있다. 2017년 하버드 대학에서 실시한 한 조사는 18에서 29세 사이 젊은층 2,037명 중 67%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연히 이들이 살면서 포기해야 할 것들도 많다. 미국판 ‘n포세대’라고나 할까.
이렇듯 불평등과 제약된 경제기회로 고통받는 밀레니얼들에게 자본주의가 무작정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리 만무하다. 최근 여론조사들은 미국 젊은층의 절반 정도가 자본주의에 반감을 보이고 있음을 일관되게 보고해왔다. 반면 같은 연령층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는 평균보다 훨씬 높다. 예를 들어 미국 여론조사 전문기관 ‘YouGov’가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와 함께 실시한 2016년의 설문조사를 보면 사회주의에 대한 전체 호감도는 30%인 반면 18세에서 29세 사이 집단에서는 43%가 사회주의에 호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사회주의자라면 부러워할만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를 보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이 개념이 기간 산업의 국유화나 사회적 계획경제와 같은 측면이 아닌, 서유럽이나 캐나다식 복지국가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YouGov’와 이코노미스트의 조사에서도 미국인들이 가장 사회주의적인 정책으로 꼽은 것은 보편적 의료보험과 공립대학 무상교육 순으로 나타났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콜테즈도 TV 인터뷰 도중 사회주의를 정의해달라는 요청에 “나에게 민주적 사회주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너무 가난해 살기 어려운 미국인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사례로 누구나 의료혜택와 교육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함을 들었다.
실제로 DSA 홈페이지의 소개글도 “우리 사회주의의 뿌리는 수단과 목표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신뢰와 헌신”이라 밝히고 있다. 이는 90년대 DSA의 정치적 입장을 천명한 문건에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부정의에 맞서 “사적 이윤에 의해 돌아가는 국제적 경제질서와 소외된 노동, 인종과 성적 차별, 환경파괴, 그리고 현 상태를 지키기 위해 가해지는 폭력과 잔혹성을 거부하기에 우리는 사회주의자이다”라고 한 것보다도 희석된 것이다. 미국 내 전통적 사회주의자들이 DSA가 표방하는 사회주의가 결국 뉴딜식으로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한 이념”이라 비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DSA의 사회주의 개념이 친자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만나본 DSA 멤버들은 하나 같이 자본주의 철폐를 굳건히 지지하는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렇게 모호한 사회주의 개념을 표방하는 것은 미국의 정치지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DSA는 독자적인 정치정당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조직이자 민주당내 좌파 정파이다. DSA 창립자 마이클 해링턴은 민주당이 좌파의 주된 정치적 경연장이 돼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애초부터 독자정당으로서의 야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과 협력한다는 것은 흡수(coopt)된다는 것”이라며 그를 비판했던 버니 샌더스 마저 민주당 텐트 안으로 들어와 경선을 치뤘던 것에서 볼 수 있듯 미국의 정치-선거제도는 한국보다도 크고 높은 진입장벽을 갖고 있다.
어디까지 닿을 것인가
양당 체제가 굳건히 자리잡은 미국 정치판에서 민주, 공화 양당은 어디든 상관없이 자동으로 선거참여가 보장된다. 그러나 제3당이 지방의회 선거에라도 참여하기 위해서는 공탁금 외에도 각 주마다 수천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서명을 받아 신청을 해야 한다. 녹색당과 같은 제3당이 대통령 선거에라도 참여하려면 각 주마다 이 많은 서명을 받아야 하니 조직이 약한 주들에서는 아예 득표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장 대규모로 참여했던 지난 2016년 대선에서조차 녹색당은 6개 주에서는 투표용지에 오르지도 못했다. 이런 진입장벽에다 비례투표도 없는 상황에서 유권자들의 사표심리나 전략적 투표 경향까지 감안하면 DSA의 전략이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다. 한국에서처럼 한두 명의 진보정당 후보라도 국회에 진출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
이런 조건에서 이들의 사회주의는 이념적 순수성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DSA의 사회주의 활동가들은 한결 같이 각 개인이 사회주의를 해석할 여지를 남겨두는 게 필요하다고 한다. 이는 민주당 밖에서 독자적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시애틀 시의원 사완트가 하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트럼프에게 표를 주었던 사람들을 포함해 더 많은 이들에게 다가가지 못한다면 사회주의로의 근본적 변혁은커녕 사회민주주의적인 개혁을 위한 대중운동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지금 미국의 좌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중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운동을 구축하는 것이다. 억압의 문제와 관련해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계급적 관점에서 다수 노동자 서민들과의 접촉점을 찾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의 DSA는 이런 과제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실제 DSA는 단지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깃발을 꼽고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대중의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방식으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보편 의료혜택, 15달러 최저임금, 공립대학 무상교육, 그리고 자의적이고 폭력적인 구금과 추방을 일삼는 미국 이민국 해체 등 전국적 차원에서의 공통적인 요구를 담은 투쟁 외에도 이들은 경찰폭력, 젠트리피케이션, 높은 월세, 홈리스 문제 등등 각 지역마다 이슈가 되는 문제들을 찾아 지역민들과 손잡고 싸우고 있다. 이들의 활동이 곧바로 혁명으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많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정치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확산시키며 새로운 대중운동의 동력을 만들어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DSA를 비롯한 미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이미 커다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이 돌풍이 중장기적 차원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강화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답은 트럼프 이후의 정세와 역관계 속에서 이들이 얼마나 독자성과 대중적 지지를 유지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만큼 오늘날 미국의 드세지는 저항의 기운이 트럼프로부터 기인하는 탓이다. 보다 상식적이고 개혁적인 민주당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도 미국의 사회주의자들이 지금과 같은 대중활동을 지속하고 조직세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미국 정치의 토양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들의 사회주의가 모호한 ‘민주적 사회주의’라 할지라도.[워커스 46호]
사회주의의 처음은 민주적이 힘들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