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효정(정치학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올바름이란 개념은 들어오자마자 ‘설명충, 진지충, 선비질, 깨시민’과 비슷한 사용법을 갖는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말이 됐다. 제대로 사유되기도 전에 도태부터 당한 용어가 ‘정치적 올바름’이란 개념일 것이다. 원래 이 말이 소수자 운동과 차별 철폐 운동에 얼마나 큰 힘을 실어준 말인지 그 역사를 알면, 이렇게 조롱하는 의미로 변질된 것이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또한 왜 그렇게 됐는지도 알아야 할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정치적 올바름이란 이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옳다’라는 문장부터 봐야 한다. 이 문장은 의미 해석이 필요한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정치적으로(politically)’라는 말과 둘째, ‘옳다(correct)’라는 말. ‘옳다’는 것은 옳고 그름이라는 진위의 판별을 뜻하며 이는 진리의 문제와 관련된다. 인간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끊임없이 판별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그런데 옳고 그름이야 쉽게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아주 단순한 예를 들어보자. 1 더하기 1은 2, 이것은 참이다. 단 그것은 수학적으로 옳다. 물체는 위에서 아래로 낙하한다, 이것은 참이다. 단 과학적으로 옳다. 그러면 이 옳음이 정치적으로 옳지 않을 수도 있는가. 정치적 올바름이란 개념은 그런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옳다’는 이 문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적으로’라는 부분이다. 정치적으로 옳다는 것은 수학적으로 또는 과학적으로 옳은 것이 정치적으로는 옳지 않을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정치 세계에는 그런 식으로 확증될 수 없는 ‘옳음’이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정치적으로 옳은 것은 때로는 저 수학적 진리나 과학적 진리를 파기할 수도 있다. 즉 정치적으로는 ‘1 더하기 1은 2’라는 정식이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정치적 진리 판단의 어려움이 발생한다. 무슨 말인가. 정치적 진리는 ‘정의’를 수립하는 과정이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법칙이고 진리다. 이 자연의 질서에 따라 사는 동물들에게 우리는 ‘정의’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세계에 살아가는 정치적 존재인 인간에게는 자연법칙과 다른 법칙이 요구되며 그것을 정치적 진리로서, 오직 정치공동체 안에서 정의로 수립한다.
예를 들어 빵 한 덩어리를 열 사람이 ‘똑같이(equally)’ 나누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 때 ‘똑같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가장 쉬운 방식은 빵을 똑같은 양으로 열 조각으로 나누는 것이다. 1/n이라는 이 방식은 수학의 나눗셈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옳은’ 방식이 아닐까. 그런데 ‘정치적 올바름’은 여기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방식의 ‘똑같음’은 빵에 대해서만 옳은 것이며, 수학적으로만 옳은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 빵이 관념 속의 빵이 아니라 정치적 세계에 놓여있는 빵이기 때문이고, 빵을 나눌 사람들이 ‘똑같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몇 년째 창고에 밀가루 포대가 썩어나가도록 가득 쌓인 사람도 있는 반면에 지난 며칠 동안 빵이라고는 구경도 못 한 사람도 있다. 그들이 빵을 똑같은 크기로 나누는 것을 과연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치적 판단은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정의가 아니다.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데 있어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또 다른 형식의 진리 판단이 요청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대 그리스말로는 이러한 정치적 분별력을 ‘프로네시스(phronēsis)’라고 부른다. 이론적·사변적 판단·이성과 구분된다는 점에서 프로네시스를 윤리적 판단, 실천 이성, 정치적 이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프로네시스가 현대적 의미로 재구성돼 서구 정치라는 현실의 장에서 부활한 것이 PC, 즉 ‘정치적 올바름’이란 개념이다.
사상적·실천적인 ‘정치적 올바름’
도구적·합리적 이성에 대한 반성과 함께 실천적 이성에 대한 요청이 서구 사회에서 대두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였다. 핵기술을 개발하는 데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자신의 실험실에서 ‘옳음’으로 입증된 가설들이 실험실 밖의 세계를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목도했다.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 인간 이성에 희망을 걸었던 철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알고 가장 똑똑하며 가장 계몽된 인간들이 만들어낸 가스실을 보았다. 정치적 판단이 마비된 결과였다. ‘프로네시스’라고 하는 새로운 이성에 대한 요청은 그런 물음 속에서 재탄생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요구는 처음에는 사상적·실천적 차원의 운동으로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이 개념은 유럽 68혁명의 장에서 그동안 시민정치 영역에서 배제돼온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정치화하는 데 힘을 발휘했고, 미국의 60년대 민권운동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은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이라고 불리는 ‘소수집단에 대한 적극적 우대조치’를 행정명령으로 시행했다. 1964년에 완전히 법제화된 이 법안은 처음에는 흑인 차별금지가 핵심이었지만 점차 여성할당제, 장애인 의무고용제 등 다양한 범위와 대상으로 확대됐다. 어퍼머티브 액션은 미국의 PC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PC운동의 성과이자 핵심이다. 그런 이유로 미국 내 보수주의자들과 극우세력들은 끊임없이 이 소수자 우대정책을 흔들고 공격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1978년부터 시작된 ‘위헌 소송’이었다. 1978년 한 백인 학생이 이 정책을 백인에 대한 역차별이라며 위헌 소송을 냈지만 대법원은 합헌으로 판결했다. 이후 2003년까지 미국 대법원은 유사사건에 대해 계속 합헌 판결을 내렸다. 그 과정에서 역차별 반론에 대해 중요한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것이 바로 이 ‘정치적 올바름’의 개념이었다. “당신 말은 옳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옳지 않다.” PC운동의 주체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13년 대입 역차별에 문제를 제기한 에비게일 피셔 소송 사건부터는 다소 유보적인 판단이 최초로 내려졌고, 2016년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법무부가 내부적으로 역차별 사례를 조사하고 집단소송을 조직하는 등 이 우대조치를 적극적으로 폐지하기 위한 시도를 정부 차원에서 감행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 개념이 처음 도입된 때는 1990년대 냉전이 끝나고 한창 포스트 모더니즘 사조가 들어오던 시기였다. 특히 리처드 로티 등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성을 부정하고 다원주의를 주창한 미국의 프래그머티즘 사상가들을 통해 유입됐기 때문에, 정치적 진리란 종종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상대주의적 진리로 오해됐고 PC개념 역시 협소하게 이해됐다. 이미 그때 서구 사회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이란 주제가 현실성과 운동성을 상실하고 상당히 관념화돼 있던 때였다. 한국에서도 그런 ‘관념으로서의 PC’가 학술장에서 먼저 수입됐다. 학계나 관련 분야 등에서 유통되던 이 용어가 대중적으로 다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특히 촛불 광장에서 여성, 장애인 등 소외되고 배제된 비시민적 주체들이 자기 목소리를 드러내면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주장과 함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공격이 동시적으로 나타났다.
“PC를 박살내겠다”
당시의 미국 대선은 PC논쟁을 재점화했는데 페미니즘을 선거운동에 활용한 힐러리는 미국 중산층의 상징인 PC의 계급적 아이콘이었고, 안티 페미니즘과 인종차별주의를 공공연히 내세우며 ‘대안-우파 alt-right’를 결집한 트럼프는 PC를 박살내겠다고 호언했다. 이제 정치적 올바름의 전선은 인종과 종교, 젠더 사이, 주류기득권층과 소수자 약자 사이에 놓인 것이 아니라 중산층 엘리트 집단과 노동계급 사이에 놓여졌다. 1990년대 이후에 그것은 ‘계급의 문화’가 돼 있었다. 서구사회에서 PC는 변질됐고, 냉소와 조롱의 대상이 됐다.
트럼프가 ‘정치적 올바름을 박살내고 싶다’고 했을 때 열렬히 박수친 사람들은 KKK 단원들이 아니라 미국의 노동계급이었다. 그 속에는 이전의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도 포함돼 있었다. 8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하던 PC운동이 대중의 외면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PC가 정치적 지향성과 운동성을 상실하고 진보적 엘리트들의 품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반전운동의 주축이었던 히피가 월가의 여피가 되고 부르주아 문화에 대항하는 반문화의 상징이었던 보헤미안 그룹이 ‘보헤미안-부르주아’ 창업가로 재탄생하는 과정 속에서 PC는 엘리트 교양시민계급이 공유하는 문화적·도덕적 공통분모가 됐다. 노동계급에게 PC란 그들만의 진리이며 그들만의 문화였다.
미국 노동계급의 몰락을 한 개인사를 통해 담담한 필체로 반추하고 있는, <힐빌리의 노래>라는 책에서는 미국의 몰락한 공업지대인 러스트 벨트(Rust Belt) 출신의 주인공이 동부의 명문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알게 된 ‘PC’에 대해 놀라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새로 사귄 친구들은 모두 타인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밴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무도 초라한 자신을 대놓고 비웃거나 경멸하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주인공은 배려당할 때마다 열등감이 증폭되는 경험을 한다. 그들이 말하는 PC의 원칙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왜 나는 정치적 올바름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치적 올바름의 대상이 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미국 중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난 친구들 모두가 알고 있는 ‘비폭력 대화’라는 용어도 태어나 처음 들어본 말이다. 그는 고향 사람들의 거칠고 상스러운 말들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교양 있는 사람들의 상냥하고 배려 깊은 언어들’을 통해 알게 되지만 그 폭력적인 말들의 단순성과 정직함에 비해 이 비폭력 대화가 얼마나 내적인 위계와 폭력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또한 자각한다. 고향의 길거리에서 애들에게 욕하는 어른들에겐 똑같은 욕설로 돌려줄 수 있었지만 상냥하게 지적질 하는 친절한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그는 알 수 없다.
스웨덴에서 만들어진 <스퀘어>란 영화도 유럽 부르주아의 도덕적 가면이 된 PC에 대해 고발한다. 그들은 ‘PC스러운’ 사람이라는 평판을 위해 정치적 올바름이라 배운 행위의 준칙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꾸준히 요청되는 정치적 윤리적 판단과 실천의 문제는 계속 외면하고 회피하며 살고 있다. 그 때 그들이 신봉하는 정치적 올바름의 원칙이라는 것은 자신이 ‘우리, 북유럽의 좋은 시민들’에 속해 있음을 입증하는, 부르주아의 정신적 고급 수트 같은 것에 다름 아니다.
지켜야 할 것과 거부해야 할 것
‘소수와 약자에게는 이렇게 저렇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 주류 강자 기득권들의 도덕적 준칙이 되었을 때 그러한 원리는 가장 먼저 소수와 약자들로부터 거부됐다.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패배와 트럼프의 당선, 유럽 전역에서 나타는 극우정당의 득세와 전통적 진보세력에 대한 노동계급의 지지 철회는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소수자 운동으로부터 만들어온 PC운동에서 저항적·비판적·현실적 힘을 거세하고, 운동의 주체로부터 개념을 빼앗아 그것을 자기의 도덕적·문화적 우위의 수단으로 삼은, 기득권화한 진보에 대한 노동계급의 좌절과 정치적 응징이라고. 하지만 우파는 그 좌절감을 이용해 그것을 모든 진보적 사회운동을 싸잡아 비난하는 말로 변질시켰다. 이제 PC는 운동진영의 새로운 낙인이 됐다. ‘깨어 있는 시민’이 ‘깨시민’이 된 것처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두 가지 PC를 구분해야겠다. 지켜야 할 것과 거부해야 할 것. 지켜야할 것은 트럼프가 파괴하려는 정치적 올바름이다. 거부해야 할 것은 노동계급에게 조롱당하는 PC다. 둘은 같은 것처럼 보이나 같은 것이 아니다. 전자는 정치적 진리에 대해 사유할 줄 아는 생각하는 민중의 힘이다. 후자의 PC는 중산층 엘리트들의 위선과 허위의식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묻기 위해 PC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목표는 정치적 올바름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적 맥락에서 보면 ‘PC’나 ‘정치적 올바름’이나 용어 자체가 수입 단계에서 이미 일종의 문화자본적 성격을 가진 것이어서 현실에서 이 말을 굳이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정치적 올바름은 이것이다’라는 문장을 ‘그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가?’라는 의문문으로 바꾸어보자. 그 물음은 개념으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키지 않고 오히려 지금껏 옳다고 정의된 세계를 뒤흔드는 힘을 주지 않는가? 그러니 물음은 계속하자. 심지어 ‘PC의 원리들’에 대해서도.[워커스 48호]
“무엇이 옳은지 틀린지 절대적 기준이 없다” 이 말들의 결말은 대체로 ‘지구 온난화는 거짓말쟁이들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실 감기랑 다를게 없습니다.’ 같은 허튼 소리가 만연해지는 거죠.
눈 앞에 보이는 것도 틀리다 말하기 귀찮아서 절대적 기준 같은 것을 들고 옵니까?
그래서 1+1=2가 아닌 사회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나요?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는 것 조차 옳은지 그른지는 절대 기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1+1=2라는 거.가 수학적으로 옳다?
그건 규약입니다…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1/n으로 나누는 건 방법론이지 가치결정론이 아니기 때문에 옳고 그름으로 보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비유라 봅니다.
어떤 바보 부모도 빵 한 조각을 가족이 정글에서 남겨졌을 때 1/n로 나누는 얼간이는 없지요.
PC의 한계는 60억 인류의 다양한 욕구에 가능한 충돌하지 않는 방법론의 문제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이 옳고 그름의 절대 기준입니까? 껄껄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