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력근로제는 말뜻만으로 해석하자면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영한다는 뜻이다. ‘자율적으로’ 노동 시간을 각자 사정에 맞게 늘였다 줄였다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하니 사용자뿐 아니라 노동자에게도 나쁠 것이 없는 것처럼 들린다. 실제로 정부와 기업은 이런 식으로 탄력근로제를 홍보해 노동자로서도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제도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을 대표하는 ‘노동유연화’의 ‘유연성’ 개념도 도입 당시 사람을 그렇게 속였다. 많은 경제학자는 노동시장 유연화가 노동자에게도 더 좋은 조건의 회사로 이동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노동자에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 게 아닌, 기업에 해고의 자유를 보장한 것이었다. 이처럼 개념의 중립적 사용은 노동과 자본 간의 정치적 힘의 불균형과 입장의 차이를 은폐한다. 자본가 입장에서 유연한 것은 노동의 입장에서는 불안정한 것이다. 고용이 ‘유연화’될수록, 노동은 ‘비정규직화’되고 ‘불안정화’된다. 이처럼 개념을 중립화하거나 실제 현실을 그와 전혀 다른 반대 개념으로 바꿔치기 하는 것은, 지식 자본주의가 사용하는 대표적인 언어통치 기술이다. 탄력근로제도 마찬가지다. 사정에 따라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 사정은 누구의 사정이며, 그 조절의 주체는 누구일 것인가. 당연히 사용자의 사정에 따라 사용자가 결정하는 것이다. 노동자가 자기 사정에 따라 업무 시간을 자율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허구적 이야기일 뿐이다.
재계가 집요하게 탄력근로제를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쉽게 말해서 성수기에는 기계를 쉴 새 없이 돌리고 비수기에는 세워놓는 것처럼, 인간도 그렇게 쓰고 싶다는 것이다. 쟁점은 노동시간으로 나타나지만, 핵심은 노동력의 수요 공급을 업무량과 빈틈없이 매칭하는 것에 있다. 최소 인력으로 최대 이익을 산출하는 것이 목표이며 이를 위해 철저히 자본의 관점에서 인간을 기계화 도구화하는 방법이다.
노동계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주로 임금 손실과 안전 문제다. 탄력근로제는 주 52시간 단축의 입법 취지를 무력화해 실질임금을 깎고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한다. 주 52시간제는 일일 8시간 노동을 기준으로 주5일간 40시간 이내로 노동하도록 하며 연장노동 시에도 12시간까지만 허용해 산출된 주당 최대 노동시간이다. 그 이상 노동이 필요하면 사람을 더 뽑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전보다 노동시간이 단축되면 그만큼 고용을 늘려야 하는데, 기업이 고용은 늘리지 않으면서 노동강도를 높이거나 대체 수단으로 탄력근로제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걸 관리 감독해야 할 정부도 앞장서서 탄력근로제를 밀어붙이고 있다.
임금은 어떤 식으로 감소하는가. 노동시간이 1일 8시간으로 ‘고정’돼 있을 때는 노동자가 그 이상 노동할 때 야간근로 수당을 주어야 하고, 주말이나 휴일에 일하게 되면 휴일 수당을 줘야 한다. 그런데 그 노동시간에 ‘탄력성’을 부여한다는 말은 ‘주 52시간 이내’ 기준만 지키면 단위 기간 내에서 노동시간을 마음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계산법으로 노동시간과 임금을 계산하면 어떤 날은 하루에 12시간을 일하고, 다른 날에 4시간 일하면, 그 값은 8시간, 8시간씩 일한 것과 똑같은 임금으로 산정된다. 예전에는 12시간 근무에 대해 4시간에 해당하는 초과수당(통상임금의 1.5배)을 받을 수 있었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받을 돈을 못 받는 것이고 사용자는 그만큼 줄 돈을 주지 않아도 되는 셈이다.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최저임금은 쥐꼬리만큼 올려주고 나서 탄력근로제로 소꼬리만큼 다시 빼앗아가는 격이다.
노동시간을 법으로 강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안전 때문이다.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의 건강을 해치고, 집중도를 떨어뜨리며, 그만큼 산재 사고의 위험을 높인다. 또한 작업장 사고는 개인의 위험에만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대형 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노동시간을 국가의 법으로 정하지 않고 시장 원리에 맡기면 결국 개인과 사회를 모두 위험에 빠트리게 될 것이다. 지금 이 탄력근로제는 법정 노동시간이 갖는 공적 의미에 대한 사회적 합의 기준을 그 원칙에서부터 파괴한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자의 임금 손실, 안전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탄력근로제라는 시간의 분할 통치 방식이 계급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장시간 노동’으로 대표되는 근대적 노동착취가 시간에 대한 양적 착취였다면, 탄력근로제는 노동자의 시간에 대한 질적 통제권을 자본에 고스란히 넘겨주는 질적 착취의 방식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산업사회에 일반적이던 노동의 형태를 완전히 변형시키는 것으로, 주야 교대근무나 파트타임 제도에서 나타나는 시간 할당 원리와도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최근 대학에서는 노동현장의 탄력근로제와 대응하는 유연학기제와 선택학기제 등을 이미 도입해 학생의 일정이 모두 다르게 짜이도록 하고 있다. 일종의 ‘탄력적 학사 운영제도’라는 제도를 통해, 대학에서는 ‘학생 사회’가 사라지고 교육 서비스 구매자로 낱낱이 쪼개진 ‘학생 개인’만 남게 됐다. 3시간 단위 강의는 모두 1시간 15분, 1시간 45분 단위로 쪼개졌다. 이는 강의 인력과 강의실의 공실률을 최소화하려는 방법이었다. 탄력근로제가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인데, 눈여겨볼 것은 이런 변화들이 모두 기술적 혁신과 연동됐다는 점이다. 개별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매번 줄였다 늘렸다 하면서 개인 단위로 관리하는 일은 일괄적 관리보다 품이 많이 든다. 사용자 입장에서도 또 다른 관리 비용이 늘어나는 것이다. 이를 손쉽게 해결한 것이 수학적 소프트웨어 기술이다.
빅데이터 기술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위협하는지 분석한 캐시 오닐의 책 《대량살상 수학무기》는 디지털 자본주의의 기술적 노동착취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₁ 미국 직장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말 중에 ‘클로프닝(clopening)’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클로징과 오프닝을 결합한 이 단어는 “상점이나 카페의 노동자들이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매장 문을 닫고 퇴근한 다음, 불과 몇 시간 후 새벽 동도 트기 전에 다시 출근해서 매장 문을 여는 것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두 명이 필요한 일을, 한 명의 노동자가 하는 이 클로프닝은 기업의 입장에서 물류(logistics)적으로는 최적의 방식이지만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삶이 파탄 나는 것이다. 이 책은 기업의 노동시간 관리가 탄력적일수록 노동자의 일정 계획은 엉키고, 아이가 있는 노동자들이 일과 병행할 수 없는 양육 문제로 재앙과 같은 혼란에 빠지게 되는 상황을 고발한다. 미국에서는 불규칙한 시간으로 이뤄지는 노동 형태가 갈수록 보편화하는데, 여기서 최대 피해자는 스타벅스, 맥도널드, 월마트 같은 기업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이다. 한국 기업이 탄력근로제 도입을 강하게 주장하는 분야가 바로 운수, 통신, 의료, 서비스업이다. 이 분야는 지금도 불안정성이 높은 영역인데 여기에 노동 시간의 불규칙성까지 더하겠다는 것은 가장 취약한 노동자들을 더 취약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다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노동착취 기술을 자본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일정관리 시스템에서라면 노동자들은 자신의 근무시간을 예측하고, 자율적인 노동 할당을 할 수도 있었다. 한가한 시간에는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기도 하고 동료와 잡담을 하기도 한다. 사용자 입장에서 아무리 못마땅하다고 해도 그런 시간까지 모두 감시, 통제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노동자가 일하는 모습까지 녹화된 CCTV 화면이 관리부서에 실시간 전송된다. 그 기술이 구현하는 것은 ‘디지털 파놉티콘’을 넘어선다. 자동 관리 소프트웨어는 시간대별 방문자 수와 매출을 계산하고, 시간당 지출하는 임금 대비 수익률을 정확히 산출하는 프로그램과 연동돼 사용자들이 노동자의 시간을 분 단위로 통제한다. 반면 빈틈없이 계산된 시간 속에 배치된 노동자들은 잠깐의 여유도 갖지 못하게 된다.
이런 관리 기술은 응용수학의 한 분야인 오퍼레이션 리서치(Operation Research, OR)에서 비롯됐다. 이 OR은 원래 전쟁의 필요에서 개발된 기술이었다. 2차 대전 당시 영국과 미 연합군은 전쟁에 필요한 자원의 투입과 배분을 최적화하려고 수학자들을 동원했는데, 그들은 아군이 사용한 자원과 파괴된 적국의 자원을 비교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교환비율(exchange ratio)을 만들어 냈다. 전쟁의 승리와 패배를 이익과 손해라는 개념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후 OR은 생산한 물자를 시장에 유통하는 방식을 변화시켰는데 이것이 ‘물류과학(logistics)’의 시작이었다. 1960년대 일본 자동차 업계에서 도입한 ‘적시 생산 시스템’도 유사한 사례다.
이전의 방식은 조립공정에 필요한 부품을 창고에 모두 준비해놓고 유휴부품을 관리하며 생산하는 방식이었는데, 이것을 필요할 때마다 부품을 적시에 주문 공급받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도요타와 혼다는 이를 위해 복잡한 자재 및 부품의 공급 사슬을 구축했다. 이것이 단계적 하청과 외주화의 시작이다. 이 공급 사슬을 인간 노동력, 즉 노동자에게 적용한 것이 파견 노동을 허용한 ‘비정규직법’이었다. 탄력근로제는 이를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개인화시켜 노동시간을 개인 단위로 하청화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탄력근로제는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의 종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시장 유연화가 공간적 이동을 통해 노동계급을 해체한다면 탄력근로제는 시간적 분할과 교란을 통해 노동계급을 해체한다. 그것은 노동자들을 단결하지 못하도록 공통성을 조각내며 개인화, 파편화, 고립화하는 전략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인간의 노동을 ‘인간 자원’으로 변형하고 물류화시켜 인간성 자체를 파괴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기계는 물량이 적을 때 전원을 꺼두었다 물량이 많을 때는 밤새 돌려도 되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는 존재다. 그는 무시간적 존재가 아니라 밤과 낮으로 이루어진 하루를 살아가는 생명의 존재이고, 그런 하루들을 쌓으며 일생을 살아가는 ‘시간적 존재’이며, 동시에 그런 존재들과 공동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사회적 존재’다. ‘노동하는 인간’은 ‘노동하는 기계’와 달리, 일한 만큼 쉬어야 하고, 밤에는 잠을 자야 하며, 집에서 아이를 돌봐야 하고, 주말에 친구도 만나 살아야 하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탄력근로제는 바로 이 시간의 존재로부터 시간성을 약탈하는 기술이며, 계급적 존재로부터 계급성을 말살하는 제도다. 탄력근로제의 진짜 위험성은 여기에 있다.
1) 캐시 오닐 지음. 김정혜 옮김. 『대량살상 수학무기』 (흐름출판 2017), 7장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