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라는 곳에서 연구원 겸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중문화와 하위문화를 연구해 왔고, 최근에는 대중의 정서 구조 변동에 관심을 두고 있다.)
처음엔 낯설었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스멀스멀 입기들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에는 캠퍼스의 봄날을 알리는 지표가 마치 과잠(학과 잠바)인 것처럼 돼 버렸다. 과잠 입은 친구들이 늘어났네. 과잠은 벚꽃보다 빨리 핀다. 봄이로구나.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엔 기이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고딩 쩐내를 털어 버리고 의기양양 A 대학 과잠을 입은 학생이 버스에서 자기보다 커트라인 낮은 B 대학 과잠을 발견한다. 의기양양하다. 잠시 후 버스에 자기보다 커트라인이 높은 C 대학 과잠이 탑승한다. 이때의 공교로운 감정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의기소침하다. B 대학 과잠을 봤을 때의 아찔한 우월감과 C 대학 과잠을 봤을 때의 괜한 위축감. A 대학 과잠은 버스에서 내린 다음에야 비로소 평안함을 느낀다.
노스 패딩을 벗고 과잠을 입다
여러 감정이 교차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과잠을 맞추고 입는다.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체 과잠을 왜 입는 걸까. 대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마치 준비라도 한 듯 기본 레퍼토리를 반복 발화한다. 크게 세 가지다. ‘저렴하다.’ 그럴듯하다. 공동 구매 하니까 일반 점퍼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편이긴 한 것 같다. ‘기능적이다.’ 맞는 말이다. 일교차 심한 봄가을에 제격이고 패션 센스 없는 이들에겐 가장 최적화된 문화적 선택일 수 있다.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 같은 옷을 입고 동류의식을 확인하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의식의 필터를 거쳐 번역된 답변으론 과잠을 둘러싼 놀라운 일들이 제대로 해명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오류를 저지르더라도 때때로 강한 해석을 내놔야 할 때가 있다. 그러지 않고서는 새로운 인식을 얻을 수 없으니까.
한 가지 확실한 건 과잠이 대학에 진입한 청년들에게 일종의 통과 의례가 되었다는 데 있다. 그것을 착용하든 하지 않든, 거의 모든 대학생이 회비를 걷어 과잠을 맞추는 게 마치 필수 코스처럼 됐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대단히 흥미로운 가설 하나를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이 가설은 (사람들의 호들갑과는 달리) 요즘 대학생의 상당수가 과잠을 즐겨 입지 않는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획일적인 패션 그리고 이를 통한 신원 확인과 각종 문화적 폐해. 이미 그들은 알고 있고 따라서 가급적 이 혼전에 뛰어들려 하지 않는다.
재밌는 사실이 있다. 과잠이 캠퍼스를 시각적으로 지배했던 시기는 2010년대 초반이었다. 이 시기는 바로 노패(노스페이스 패딩)가 전국을 강타했던 직후다. 흥미롭지 않은가. 노패를 입던 세대가 대학에 들어가서 과잠을 입었다니 말이다. 이른바 ‘N포 세대’ 사이에서도 세대 구분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이 시기 사람들을 ‘노스 세대’ 또는 ‘노패 세대’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은 가설 수준이니 지나친 비약은 삼가야겠지만 말이다.
과잠에 의례적 성격이 있다면 그것은 과잠이 대학생, 즉 성인이 됐다는 징표로 기능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과거에는 새터(새내기 새로 배움터)에 참가하거나 사복을 입는 것만으로도 대학생으로서의 상징을 취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각종 사건 사고로 새터가 유명무실해졌고, 화장·흡연·음주·스타일 등으로 고딩 시절과 문화적으로 구별하는 건 의미가 없어졌다. 그 정도야 요즘 청소년들도 이미 다 하고 있으니까. 그런 맥락에서 과잠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성인됨의 표식이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물론 노패와 과잠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필자의 전작 《18세상》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노패가 남자 청소년들에겐 ‘가상적 알통’으로, 여자 청소년들에게 ‘각선미 보정 아이템’으로 자기 신체를 연장하는 기능이 있었다면, 과잠은 야구 점퍼의 캐주얼한 차림으로 학교와 학과를 상징 자본 삼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고딩 시절 그들이 성인이 될 수 있었던 유일한 출구가 노패를 걸침으로써 일종의 ‘육체 노동자’ 이미지를 획득하는 것이었다면, 대딩이 되어 이미 성인으로 대우받게 되면서부터는 자기 자신에게 ‘지식 노동자’ 이미지를 상상하게끔 하는 것이랄까.
과잠이 ‘과’잠인 이유
과잠이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긴 하지만, 사실 옛날에도 과잠 비슷한 게 없진 않았다. 그 옛날 부모 세대도 청년 시절엔 대학교 배지를 차고 다녔고, 불과 10여 년 전 선배 세대들은 대학교 이름을 수놓은 백팩을 메기도 했다. 과잠이 학벌주의를 조장하고 위화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호들갑을 떨곤 하지만, 기성세대와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질적인 차이는 거의 없다.
정도의 차이라면 대략 네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대학교 표식을 내세워 ‘부심’ 부리는 게 소위 SKY에서 거의 모든 학교로 보편화됐다는 것. 둘째, 상징물이 배지에서 가방으로, 가방에서 점퍼로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 셋째, 학교 자랑을 넘어 소속 학과까지 표기하는 식으로 상세해졌다는 것. 넷째, 이제는 고딩들이 대학교 중고 과잠을 웃돈 주고 구입하는 기이한 풍경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것. 다시금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믿기 힘들겠지만 이 모든 것은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물론 예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갖가지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래서 때때로 사람들은 경악하기도 한다. 소수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한국 같은 학벌 사회에서 커다란 글씨를 등판에 박은 채로 길거리를 다닌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그래서 버스 안 A 대학 과잠처럼 C 대학 과잠 앞에선 등판이 드러나지 않도록 버스 의자에 몸을 잔뜩 눕히고 가급적 가슴 문양이 드러나지 않도록 옷매무새를 다듬는 일이 벌어진다. 어디 그뿐일까. 수도권 대학 과잠이 ‘인서울’로 외출한다거나 D 대학 과잠이 신촌을 활보한다거나 하는 일들은 좀처럼 드문 일이 되곤 한다.
어림잡아 학령기 청년의 80%가 대학생인 세상. 수적으로만 보면 대학생들의 전성시대가 되어야겠지만, 역설적으로 대학생이란 사실만으론 별 의미가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심지어 서로를 구별 짓는 관행은 학교를 넘어 학과 단위로 진화하기도 한다. 그러니 ‘과’잠 아니겠는가. 같은 학교에서조차도 커트라인이 높은 학과나 계열의 과잠은 뭔가 활기가 넘쳐 보인다. 기분 탓 같은가. 실제로 E 대학에선 학교 이름 아래에 ‘UNIV.’가 아니라 공대를 뜻하는 ‘TECH’나 의대를 뜻하는 ‘MED’를 새긴 과잠을 볼 수도 있다.
학력 자본이 무색한 세상에 학벌 자본이 판친다. 사람들은 청년들이 괴물이 되어 가고 있다는 듯 신기해한다. 자기들끼리 학벌을 자랑하고 또 위축된 채로 살고 있다니 말이다. 하지만 대개는 씁쓸해하거나 놀라 까무러치는 것 말고는 별 고민이 없는 것 같다. 사실 이 같은 문화적 관행들은 애초부터 있었던 현상 아닌가. 결국 기성세대들이 짜 놓은 위계질서 위에서 청년들이, 대학생들이 단지 몸부림치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소속감”이 의미하는 것들
여러 폐해가 반복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과잠을 맞추고 입는다. 만약 정말로 대학생들 말처럼 과잠이 그들에게 소속감을 선사하는 것이라면, 그 실체는 자기 자신이 지식 노동자로의 길을 걷는 가운데 마주하게 되는 일종의 거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과잠의 학벌 표식은 단순히 어딘가에 안착했다는 정적인 안도감만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자기 자신이 성장할 것이라는 동적인 성취감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이것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다른 한편 과잠은 거울의 바깥과 자기 무리를 구별시켜 주는 이중 삼중의 복잡한 문화적 장치이기도 하다. 고딩과 대딩을 구별하고, 대학생들 사이에선 학벌(학교와 학과)을 구별하는. 그런 까닭에 과잠 문화가 보여 주는 풍경은 낙관적이기만 한 게 아니다. 대학이라는 고학력에도 불구하고, 소수를 제외하면 거의 대다수는 나락으로 떨어질 게 뻔하니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미래란 게 그렇지 않은가. 대학 졸업장만으론 행복하기 어렵지 않은가.
지난번 칼럼에서 ‘리셋’을 요청하는 청년들이 희망하는 미래의 1순위가 ‘붕괴와 새로운 시작’이라 말한 바 있었는데, 여기서 퍼뜩 떠오르는 질문은 비교적 자명하다. 어떻게 붕괴시킬 것이며 또한 무엇을 새로이 시작할 것인가. 붕괴 이후의 시작점을 ‘소속감’과 같은 수평적 연대로 한정시키는 건 무척이나 순진한 일일지 모른다. 수평적 연대가 다른 집단에 대한 차별을 품고 있을뿐더러,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수직적 적대가 횡행한 마당에 아래에서 위로 치닫는 대항적 적대를 거의 아무도 상상하지 않는다는 건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장에 대한 사회적 압박에 시달리면서 정작 성장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는 생각보다 우울한 일이다. 사회학적 성장과 경제학적 성장. 또는 심리학적 우울(depression)과 경제학적 공황(depression). 물론 세상사가 단순하지만은 않아서 성장 아니면 우울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오늘날 우리가 성장과 우울의 교차로에서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