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라는 곳에서 연구원 겸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중문화와 하위문화를 연구해 왔고, 최근에는 대중의 정서 구조 변동에 관심을 두고 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다. 4월 1일이면 대학 캠퍼스에선 엄청난 이벤트가 열린다. 1년에 단 하루 만우절, 재기 넘치는 모든 거짓말이 용서받을 수 있는 날이지만, 대한민국 대학 캠퍼스에서 그날은 다름 아닌 ‘교복 데이’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캠퍼스를 활보하는 군상을 본 적이 있는가. 멀리서 보면 재잘재잘 견학 온 고딩들처럼 보인다. 캠퍼스 유서 깊은 곳마다 포진해 단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조금씩 가까워지면 하나둘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교복이 제각각, 한 학교에서 온 고딩들이 아니다. 심지어 고등학생들이라 하기엔 화장도 진하다. 종종 염색 머리도 보이고. 어떤 때에는 그냥 ‘코스프레’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심지어 해가 저물면 그 차림으로 술집에 들어가지 않는가. 그렇다. 만우절 캠퍼스 풍경이다.
엽기적인 그녀, 더 엽기적인(?) 대학생
언제부터 만우절이 교복 데이가 됐는지는 불분명하다. 불현듯 교복 입은 대학생들이 나타났고, 해를 거듭하면서 그 수가 불어나기 시작했다는 것밖에는 딱히 다른 이야기를 할 게 없다. 굳이 기원을 찾자면, 2001년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전지현과 차태현이 만우절에 교복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민증을 까 보이며) 술집에 들어가던 에피소드가 고작인데, 대학생들이 단순히 영화 명장면을 따라 해서 이렇게 됐다고 말하는 건 어쩐지 침소봉대 같기만 하다. 설마 우리 시대 대학생들이 그저 따라쟁이이기만 하려고.
만우절 교복 코스프레의 진풍경은 여기저기로 확장된다. 교복이 없는 사람들은 쇼핑몰에서 스쿨룩을 주문해 갖춰 입기도 한다. 사실, 이 정도면 게임 끝 아닌가. 따로 스쿨룩을 사 입을 정도로 만우절 교복은 일종의 의례(ritual)가 됐다는 이야기니까. 심지어 전역한 예비역들은 교복 대신 군복을 입고 돌아다닌다는 소문도 있다. 물론 예비군 훈련도 아닌 날에 그 차림으로 캠퍼스를 돌아다니면 그야말로 꼴불견이니, 주로 캠퍼스 바깥을 배회할 테지만.
코스프레의 진면목은 의복을 갖춰 입는 게 아니라 그 옷을 입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표적인 게 사진 촬영. 각자 교복 품평하랴, 기념 사진 핫스팟 찾아다니랴 부산하기 그지없다. 캠퍼스에 상업 공간이 들어서다 보니 심지어 어떤 대학에서는 기념 사진을 엽서로 만들어 파는 업소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학교 바깥에서도 코스프레로 할 건 많다. CGV는 이번 만우절에 교복이나 히어로 코스프레를 하면 7천 원에, 군복 코스프레를 하면 6천 원에 영화 티켓을 판매하기도 했다. 좌석 등급제를 도입해 관객들 등골을 빼먹고 있는 작태를 감안하면 매우 공격적인 마케팅인 셈이다.
대학생이 교복을 입고 가장 공격적인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건 어쩌면 출신 고등학교로 쳐들어가는 걸지도 모른다. 후배들 교실에 들어가 도강을 하기도 하고, 추억의 급식이라도 먹어 볼까 기웃거리기도 하고, 친했던 교사를 찾아가 환담을 나누기도 하고. 매우 애석하게도(?) 출신 학교를 찾아 깽판 쳤다는 이야기가 나온 적이 없는 걸로 봐선, 어쨌든 얌전하게 그리고 건전하게 만우절을 즐기는 모양이다.
이쯤이면 만우절 교복 코스프레가 하나의 의례가 되었다는 데 모두들 동의하게 됐을 것이다. 모든 대학생이 참가하는 건 아니지만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참가하는 중대한 의례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처음엔 그냥 몸짓에 불과했겠지만 이제는 그들 고유의 집단적 리듬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비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의미가 되었다.
‘재미’라는 블랙박스
왜 이들은 서슴없이 고딩 시절과 연결되는 것일까. 물론 단순히 유희적인 차원에 그치는 것일 수도 있다. “교복을 왜 입죠?” “재밌잖아요.” 다소 난감한 대답이긴 하다. 그네들의 행복해 보이는 표정 앞에서 더 이상 진지해지는 건 실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재미’가 어쩌다 유행을 타게 된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더 캐물을 필요가 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재미’ 너머로 그들조차 알지 못하는 새로운 일들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고딩 시절로 돌아간다는 건 순전히 거짓말이겠지만 만우절이니까 가능하다. 축제 동안 일상 탈출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가벼이 여길 일도 아니다. 무엇보다 고교 시절을 좋았던 시절로 남(겼거나 남)기려 한다는 점만큼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교복 코스프레와 행복감. 이 둘이 등식 관계를 이루려면 상식적으로 두 가지 가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첫째, 지금이 힘들다 보니 그 옛날이 그리워져서(퇴행적 향수). 둘째, 그 시절로 연결되면 새로운 활력을 느낄 수 있어서(심리적 보상).
시간을 달려서 되도록 빨리 성장하는 게 거의 대다수의 지상 과제일 테지만, 단 하루쯤 쳇바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만큼 다행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빠르면 1학년 2학기부터 취업 전선에 서는 게 오늘날의 대학 생활이라면 입시생 시절은 차라리 행복한 나날이었을지 모른다.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여기서 교복은 마법의 아이템과도 같다. 교복 코스프레는 쉼 없이 진보하는 시간을 멈춰 줄 뿐 아니라 심지어 과거로 되돌리기까지 하는 마술인 셈이다. 게다가 교복을 입은 현실 속의 ‘나’는 입시 지옥으로부터도 벗어나 있으니 교복이 자기 몸을 옥죄더라도 불편함 따위는 절대 있을 리 없다. 입시 지옥과 취업 지옥, 그 어느 곳으로부터도 이날 하루만큼은 해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복 코스프레를 단순히 퇴행적 향수로 재단하기엔 섣부른 감이 있다. 과거로 여행을 다녀와서 에너지를 재충전한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로는 채 담을 수 없는 감응들이 있다는 것이다. “뭐가 재밌죠?” “어른 같은 머리와 화장을 하고 교복을 입는다는 게 나름 스릴 있어요. 들키더라도 민증만 까면 아무 문제 없잖아요.” “그런데, 왜 하필 다들 이런 재미를 느끼는 걸까요?” “에이, 혼자선 힘들죠. 다들 하나가 되는 느낌이랄까요? 출신 학교는 다르지만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고 볼 수 있죠.”
‘어른’의 몸을 하고 ‘청소년’ 코스프레를 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교복을 입고 ‘같은’ 존재가 된다…. 거짓말이 용인되는 하루 동안 이들은 적어도 하나 이상의 아이러니를 마치 게임처럼 즐기는 것 같다. 확실히 요즘 대학생은 그 옛날 대학생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학출’의 몸으로 ‘위장 취업’을 하고, 서로 ‘같은’ 작업복으로 ‘같은’ 존재가 됐다던 전설(?)과는 사뭇 다른 구도이지 않은가. 지금은 더 어려 보이는 코스프레를 하고 있고, 훨씬 닮아 있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려 한다.
아무 문제 없는 ‘스릴’
여기서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을 발견하는 게 과한 처사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대학생으로서 교복을 입는 것만으로도 이미 자신들에게 주어진 생애 경로를 긍정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고딩 시절의 과거는 이미 흘러간 무의미한 것이라거나 부정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긍정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와 현재가 매끄럽게 이어지고 있다는 안락감 같은 것 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교복 코스프레란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선 전혀 나타나지 않는 의례라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복을 입은 채로 활보하고 사진을 남기는 일 등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대학에 들어왔다’는 안도감을 기념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증만 까면 아무 문제 없다”는 대답에서 이미 직감할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말을 통해서 그들이 말하는 ‘스릴’이란 사실 하나도 위험하지 않은 스릴이라는 게 만천하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실 스릴이 꼭 위험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기도 하다. 애초에 게임은 게임일 뿐이고, 진즉부터 교복 코스프레는 단순 유희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날 대학생 문화로부터 중요한 인류학적 사실 한 가지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교복 코스프레에 참여하는 이들이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전화시키기보다는 현재의 긍정을 위해 기꺼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거기서 자신의 기원을 파괴하는 일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욕망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가진 본연의 이끌림일 수 있다. 안락감만큼 강력한 갑옷이 또 있을까.
어쩌면 진짜 문제는 중간 관리자 내지는 지식 노동자로 나아가는 여정에 그 누구도 대안적인 지도나 나침반을 제공해 주지 못하는 현실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다 큰 성인들이라면 그런 일쯤은 본인들이 스스로 깨치고 거뜬히 해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해마다 만우절이 되면 주체 못할 행복감에 마음이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워커스 5호 2016.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