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ㅡ 이라크 쿠르드족 출신 난민, 이스마엘 메르샴 박사
정은희 기자
“어제도 바그다드에선 테러에 100여 명이 죽었어요.” 이스마엘 메르샴 씨가 말했다. 50대 초반의 그는 이라크 쿠르드족 출신이다. 1994년 사담 후세인의 박해를 피해 피난 길에 오른 그는 1995년 한국에 도착해 만 20년 넘게 살았다. 3D 업종, 선박 회사를 비롯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는 이스마엘 씨. 1997년에 난민 신청을 했고, 2001년 ‘인도적 체류’ 신분을 보장받아 현재는 결혼하고 중동 정치 강의와 번역 등의 일을 한다. 최근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이라크 종파주의 정치와 민주주의 전환의 난제들’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다. 이라크/시리아 내전과 로자바(시리아 쿠르드 자치 지역) 혁명, 세계적인 난민 위기와 무슬림 혐오 확대 등의 이슈가 터져 나오는 지금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을 통해 만난 그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지난 13일 저녁 서울 한국외대 앞에서 진행된 인터뷰와 통역은 뎡야핑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의 도움을 받았다.
한반도에서처럼 제국주의와 독재로 모진 근현대를 산 쿠르드인. 2003년 노무현 정부가 한국군을 파병한 지역도 쿠르드족이 사는 이라크 아르빌이었다. 쿠르드족은 약 3500만 명이 터키와 이라크, 이란,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딱 100년 전, 1차 세계 대전 뒤인 1916년 5월 영국과 프랑스가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국경을 나누면서 세계 최대의 분단 민족이 됐다. 쿠르드는 각 지역에서 자치를 위해 싸워 왔다. 하지만 자신의 체제를 강화하려 한 중동 각국은 박해로 응답했다. 터키나 이란 쿠르드 민족도 각기 고통스러운 역사를 살았지만 이라크에서도 그랬다. 1958년 이라크 왕정에 맞선 공화주의 혁명에 쿠르드인도 참가해 일정한 자치를 보장받았지만 결국에는 무산됐다. 1968년 범아랍주의와 아랍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바트당이 쿠데타로 집권한 뒤 1970년도에도 자치권을 보장받았지만, 석유가 나는 키르쿠크는 제외된 채 아랍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다시 박해를 받았다. 아랍인과 인종과 언어가 다른 쿠르드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 아랍인을 이주시키고 대신 쿠르드인을 타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했다.
“미국, 사우디, 터키 모두 사담의 박해를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마엘 메르샴 씨가 이라크 정권의 박해를 직접 경험한 때가 이즈음이다.
“1970년 자치를 약속했을 때 쿠르드 사람들은 앞으로 평화롭게 살 것이라며 매우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자치는 실패했고 대신 아랍화 정책이 시행됐죠. 밤에 군인이 와서 마을을 둘러싸고 각 집에 트럭을 한 대씩 배치해 모든 짐을 싣고 당장 이동하게 했습니다. 나는 남을 수 있었지만 언제든 이주시킬 수 있었죠. 누나 가족과 형 가족은 이때 각기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했다가 2003년 사담 정권이 물러난 후에야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1974년 쿠르드족은 아랍화 정책에 맹렬히 반발했지만 이라크 정부는 다시 폭력으로 대응했다. 방화와 살인을 자행했고 석유가 나는 키르쿠크 마을에서는 석유 산업 단지 노동자를 추방하고 아랍 부족 사람들과 정부 공무원들로 대체했다. 쿠르드인의 토지 매매는 금지하고 토지를 몰수해 아랍 농민들이 쉽게 구매할 수 있도록 대부를 진행하기도 했다. 1975년 쿠르드인이 사는 북부 자치 지역 술라이마니아 합병 때는 20만 명의 쿠르드인을 남부로 강제 이주시켰다. 당시 이라크 쿠르드인들은 소련과 경쟁했던 미국과 친미 정권이 들어선 이란의 후원을 받고 있었는데 이라크 정권은 쿠르드인을 제압하기 위해 갈등 관계였던 이란과 타협도 했다.
이후 집권한 사담 후세인은 애초 쿠르드에 유화 정책을 추진했다. 바트당을 지도한 그는 1979년부터 미국 부시 정권의 침공으로 몰락할 때까지 이라크를 통치했다. 그러나 사담이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뒤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을 감행하면서 독립을 위해 이란과 협력한 쿠르드인들은 다시 끔찍한 박해를 당하기 시작했다. 특히 쿠르드 정치 세력은 1988년 이라크 쿠르디스탄 전선을 결성해 정치 군사 협력체를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이라크뿐 아니라 쿠르드를 지원하던 이란까지 이를 위협으로 보면서 사담은 곧장 대학살에 돌입했고 이란도 가세했다. 1988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화학 무기 공격으로 쿠르드인 1만 명이 사망하고 5만 명이 터키로 망명했다.
하지만 사담의 박해가 쿠르드족만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수니파 출신인 그는 종파적 지배 체제 속에서 시아파를 비롯해 타 종파와 비판 세력을 탄압했다.
“시아파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정치 지도자보다 종교 지도자의 말을 따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담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었죠. 이란-이라크전에 가지 않으면 겁이 많아 전쟁을 회피한다면서 이마에 아랍어로 ‘겁쟁이’라는 인두를 찍었고, 사담을 저주하면 혀와 귀도 잘랐어요. 미국의 경제 제재 때문에 이라크 사람들은 모두 어려웠지만 사담 추종자들은 잘살았어요. 사담은 티크리트 지역 출신인데
그 지역 사람들과 자신의 부족, 친족은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이때 수니 지역 사람들과 아랍족으로 구성된 특공대를 만들었는데, 이들은 2003년 이후 새 정부에 대항하다가, 현재는 대부분이 자칭 이슬람국가(IS)로 합류했습니다.”
쿠르드는 지속적인 저항으로 해방될 뻔한 적도 있었다. 1990년 8월 사담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뒤, 미국과 동맹군이 이듬해 1월 바그다드를 공습하자 군인들이 사담에 맞서 봉기하기 시작했다. 쿠르드족도 여기에 동참하면서 사담의 지배에서 해방될 기회를 얻게 됐다. 탈영 군인과 함께 쿠르드족뿐 아니라 시아파도 동참해 봉기는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국제적 공습과 내부 봉기 속에서 약화된 사담은 유엔과 미사일, 화학 무기를 파괴하는 협상을 체결해 쿠웨이트에선 물러났지만 미국과 터키, 사우디아라비아의 묵인 속에서 국내 봉기를 다시 철저하게 진압했다. 이스마엘 씨는 사담과 대결하며 쿠르드인을 이용했던 정부들이 다시 외면했다고 설명한다.
“미국은 이란 호메이니보다 사담 후세인이 더 근대적이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사담을 선호했습니다. 사우디는 수니파 국가로 시아파를 견제하려 했고, 터키는 자국 내 문제 때문에 쿠르드가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모두 각자의 이익 때문에 후세인이 이라크 사람들을 죽이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이스마엘 씨가 고국을 떠나겠다고 결심한 것도 이때였다.
“당시 봉기를 일으키고 싸웠던 많은 친구들이 죽었습니다. 나는 그 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1994년에 결심을 하고 요르단으로 떠났죠.” 이스마엘 씨는 요르단에서 비자를 얻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 나라도 이라크 국적자에게 비자를 주지 않았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요르단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이를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표현했다.
2003년 미국 침공으로 악화한 이라크 사회
1991년 걸프 전쟁(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뒤 이에 맞서 미국이 주도한 대이라크전)이 끝난 뒤 이라크 사회는 더욱 피폐해졌다. 미국 주도의 경제 제재가 지속했고 사담 후세인의 폭정도 심해졌다. 2003년, 사담이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거짓말로 시작된 이라크 공습은 아무 소득 없이 무고한 주검만 남겨 놓았다. 희생자는 20만에서 100만 명까지 추산되지만 아무도 정확한 수를 알지 못한다. 또 미국이 후원한 시아파 정부 아래 종파 간 갈등과 폭력은 더욱 심화됐다. 더구나 2014년에는 종파주의와 제국주의 전쟁 속에서 성장한 IS가 이라크 모술을 점령하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제 이라크는 시리아와 함께 대테러전의 중심부가 됐다.
“쿠르드인은 예전에도 억압받았지만 2003년 이후 갈등은 더 깊어졌습니다. 내 경우에도 2003년 이전에는 대학에 수니파, 시아파 출신의 여러 친구가 있었지만 지금은 옛날처럼 그렇게 못 지낼 것 같아요. 2003년 이후 얻은 게 있다면 정당 결성과 언론, 표현의 자유 딱 세 가지뿐이에요. 경제나 사회적 정의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마엘 씨는 2003년 미국의 침공 뒤 이라크 사회는 더욱 악화됐다고 지적했다.
이스마엘 씨에 따르면,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수니가 몰락하고 시아파 정부가 들어서자 사실상 인종 청소가 진행됐다. 시아파 민병대 20~30개가 주도했다고 한다. 이스마엘 씨는 친형의 경험을 빌려 이 인종 청소에 관해 설명했다.
“내 형은 2003년 즈음 바그다드 인근에서 살았는데 ‘3일 안에 이 집에서 나가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메시지가 집에 전달됐어요. 형의 외아들도 2006년 법대를 다녔는데 마지막 시험 뒤 납치를 당했고요. 그 뒤 아들을 붙잡고 있다는 전화가 왔었고 ‘시아’냐 ‘수니’냐라고 물어서 쿠르드라고 대답했더니 아들을 바로 죽였다고 합니다. 또 사담 때 바그다드 인구의 약 60%는 수니파였지만 지금은 약 40%로 줄었습니다. 지금은 약 70%가 시아파예요. 20% 정도가 인종 청소 같은 방식으로 쫓겨났습니다. 바그다드가 수니파가 대세이던 상황에서 2003년 이후로는 시아파가 대세가 된 상황으로 바뀐 것이죠. 바그다드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내 형이 당한 방식으로 사라졌을 거예요. 시아파는 다른 부족의 집을 아무 대가도 주지 않고 취했어요. 진짜 동기는 경제적인 것이었지만 정치나 종교, 인종을 이용한 것이죠. 2004년 즈음 정부는 아무런 힘도 없었죠.”
현지 주민의 힘을 지원하고 키우는 과정이 평화
IS 대테러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이라크 주민들은 여전히 죽어 가고 있다. IS가 약화하면서 시아파 지역 테러는 더욱 늘어났다. 또 이라크 정부가 반정부 시위대에 발포하면서 비극은 또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면 중동에는 어떻게 평화가 찾아올 수 있을까? 이스마엘 씨는 무력은 답이 아니며 현지 주민에 힘을 주는 정치적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IS가 칼리프 국가를 만드는 것은 실패하더라도 알카에다처럼 조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해결에 긴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죠. 미국, 러시아, 사우디, 이란 등의 합의가 있어야 IS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군사적인 문제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에요. 국내, 중동 지역과 국제적 수준의 세 층위에서 서구가 아니라 현지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방식으로 지원해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 씨는 이 점에서 지금 시리아 아사드 정부와 싸우는 반군이 쿠르드족을 인정하지 않는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IS가 부상한 이후로 국제적 경각심으로 인해 쿠르드 이슈가 더욱 부각되어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쿠르드 민병대와 여성 대원이 IS에 대항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 지역에서 큰 역할을 감당해 내며 최선을 다하고 있죠. 로자바에서 쿠르드인들이 매우 잘 싸우고 있지만 정부가 쿠르드인들의 법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듯이, 반군도 쿠르드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아요. 고질적인 패권주의 때문이죠. 하지만 쿠르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중동의 평화는 어렵다고 봐요. 쿠르드족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핍박 아래 살아왔고 지금은 또 IS와 맞서 싸우면서 많은 희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권리와 합법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인종 차별은 일상… 이주노동자 차별은 자본주의 문제
마지막으로 한국 정부에 대한 그의 의견이 궁금했다. 우선 그는 1997년 난민 신청 뒤 4년 동안 많은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사담의 언론 통제가 효과적이었고 인터넷이나 페이스북 같은 미디어도 없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사담이 쿠르드를 핍박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먼 나라 한국은 더 몰랐겠죠. 정부는 아무 때나 조사를 요구했는데 여러 번 얘기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점이 있거나 사담 정부의 쿠르드인 핍박에 대한 얘기를 하면 의심의 눈으로 바라봤죠.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IS 전쟁과 난민 위기 속에서 한국 정부가 난민의 인권을 존중하고 또 더 많이 받아들여야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확대를 막을 수 있다고도 했다.
한국 정부의 파병에 대해선 미국과의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이 참전했다고 볼 수 없지 않을까요? 전투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고 총알도 한 발 쏘지 않았잖아요.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너희가 시키는 걸 잘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파병한 것이죠. 한국군은 당시 가장 안전한 아르빌에서 쿠르드 민병대의 호위를 받기도 했고요.”
이스마엘 씨는 이주노동자 정책에 대해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든 이윤을 내려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처음에는 도움받을 수 있는 NGO도 없었고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화학 공장에서도 일했는데 그때 손에 난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어요.” 그가 내보인 손바닥에는 흰 부스럼 자국이 선명했다.
인터뷰는 밤 11시까지 지속됐지만, 이스마엘 씨는 서두르기보다 좀 더 사실을 알리고자 했다. 때론 자신의 아픈 기억에 힘들어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 이라크와 쿠르드인들은 내가 예전에 받은 것과 똑같은 고통 속에서 헛되이 죽고 있어요. 나는 이유도 모르고 고통 받아 왔는데 학문적 공부를 통해 그 이유를 알고 싶었고 또 알리고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개인적 경험과 학문을 통해 한국인들이 이러한 이슈들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원해요”라고 강조했다.
(워커스12호 2016.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