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주, 박다솔, 윤지연 기자/ 사진 정운 기자
2005년. 지하철에서 개의 배설물을 치우지 않은 20대 여성을 ‘개똥녀’라고 불렀다. 2006년. ‘된장녀’라는 은어가 유행처럼 번졌다. 여성들은 스타벅스 커피 한잔 마시는 것도 눈치를 봐야 했고, ‘개념녀’로 등극하기 위해 정신 개조도 불사했다. 2007년. 운전에 서툰 여성은 ‘김 여사’라는 신조어로 조롱을 당했다. 2012년. 보수 사이트 일베에서 여성 비하 용어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된장녀’에 이어 ‘김치녀’가 등장했다. 여성을 조롱하는 은어는 미디어와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됐다. 2014년에는 무명 가수였던 ‘브로’가 여성 비하 노래를 발표하며 가온 차트 1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 개그 트리오 ‘옹달샘’은 팟캐스트에서 “여자들은 멍청해서 남자한테 안 돼, 머리가”,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건 처녀가 아닌 여자야” 등의 여성비하 발언을 쏟아 냈다. 그리고 2016년. 강남역 노래방 건물의 공중화장실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는 범행 이유를 “여성에게 무시를 당해서”라고 밝혔다.
배제와 무시, 차별, 비하로 시작해 ‘혐오’까지 왔고, 결국 살인이 일어났다. 도대체 무엇이 발화해 ‘여성 혐오’라는 끔찍한 불길을 만들어 낸 것일까. 사람들에게 물었다. 여혐의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느냐고. 김미래(20 ·여) 씨는 “여성의 권리 신장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을 여성 혐오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석(24 · 남) 씨는 “남자들이 (경제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전체 여성을 상대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효경(21 · 여) 씨는 “여성의 권력이 남성성을 위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사람들은 극단적 여성 혐오의 발화 지점을 ‘남성의 경제력 상실’에서 찾았다. 1990년대만 해도 청년 실업률은 4~6%. 하지만 외환 위기 이후 2000년대 들어서는 청년 실업률이 두 배 이상 급증했다. 임시직, 일용직과 같은 불안정 노동도 퍼졌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10년 동안 임시, 일용 노동자가 168만 명 증가했다.
경제 위기 전만 해도, 여성은 차별과 종속의 대상이었다. 남성은 가부장제를 유지할 만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고, 여성을 통제할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 위기는 남성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분노와 혐오의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정리 해고의 일차 표적이 되는 이들, 여전히 비정규직 비율이 높고 임금 수준이 낮은 여성들에게로.
사회 단체 활동가 A(44 · 남) 씨는 “10~20년 전만 해도 남성의 경제적 지위가 월등했다. 하지만 남성들이 경제적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어려움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기 시작했다”며 “한국 사회에서 가장 쉬운 혐오의 대상은 외부 타자인 이주노동자와 내부 타자인 여성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성장의 과정
한국 최대의 연쇄 살인은 여혐 살인이었다. 유영철은 2003년 9월부터 10개월 동안 노인 8명과 여성 12명을 살해했다. 검거된 그가 밝힌 범행 동기는 ‘부유층에 대한 반감과 여성에 대한 막연한 혐오감’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여성들이 함부로 몸을 놀리거나 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검거 후 유영철이 남긴 말이다.
하지만 사건의 중심에 ‘여성 혐오’는 없었다. 연쇄 살인 방법의 잔혹성, 엽기성에만 관심이 쏠렸다. 언론은 시신을 토막 내고, 지문을 도려내는 등의 잔혹한 살인 방법만을 리메이크하기 바빴다.
2004년 7월 18일, 유영철 검거 시점부터 네이버 등록 기사 100건을 분석해 봤다. 그중 ‘여성 혐오’라는 범행 동기를 다룬 기사는 27건. 그마저도 ‘부유 계층 증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사건 발생 한 달 후에야 소규모 페미니즘 운동이 일었다. 여성 400여 명이 인사동에 모여 안전한 밤길을 되찾자며 ‘달빛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달빛 시위를 보도한 언론사는 <매일경제>와 <YTN>, <미디어 일다(여성주의저널)>, <민중언론 참세상> 정도였다. 정부 차원의 대책도 없었다. 사건 사흘 후 정부, 여당의 민생 관련 협의에서 사건을 잠깐 언급했을 뿐이다. 미흡한 수사로 도마 위에 오른 경찰청장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됐다.
12년 뒤 또다시 반복된 여혐 살인. 강남역 살인 사건에서 역시 정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건 발생 3일 후, 강은희 여성가족부 장관은 “사건을 단순한 여성 혐오 범죄로만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놓은 대책은 정신 질환자의 관리, 남녀 화장실 분리 같은 것이었다.
사건의 변곡점
한국 사회에서 여성운동이 본격화된 지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불평등이라는 벽은 여전히 견고하고 혐오의 말은 넘쳐 난다. 그래서 과거의 정제된 페미니즘 운동과는 확연히 다른 여성운동이 등장하기도 했다. 혐오의 언어를 미러링하며 혐오에 대항하는 방식이다. 여성 커뮤니티 ‘메갈리아’는 일종의 ‘충격 요법’을 택했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혐오와의 전쟁에 여성운동 진영은 나름의 지지를 보냈다.
강남역 10번 출구 앞 추모 문화제를 최초로 제안한 양지원 씨는 “메갈리아는 억압을 당한 여성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판을 깔았고, 여성들이 스스로 각성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메갈리아는 기존 운동 단체의 언어와는 별개로, 실제 여성들이 겪는 일상적인 폭력을 속 시원히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열었다. 하지만 ‘미러링’은 방어적인 측면이 컸다. 종국에는 ‘젠더 혐오’라는 공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대중적인 지지를 얻어 내는 데 성공하지 못한 한계도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들은 소통과 집담의 공간을 원하고 있었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온라인’에만 한정돼 있던 공간이 ‘오프라인’으로 확장됐다. 강남에서, 홍대에서 여성들이 모여 입을 열기 시작했다. 모든 언론의 관심이 그녀들의 입으로 모여들었다. 이제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혹은 이야기는 지속할 수 있을까를 궁금해하며.
반다 평화 활동가는 “여성들이 분노하는 현실을 잘 해석해 내는 담론, 대중적이고 급진적인 비전을 생산해 내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설명했다. 양지원 씨는 “여성을 향한 폭력을 개인의 일로만 치부해 버렸던 국가와 공권력이 사태를 키웠다”며 “구조적, 제도적 변화를 위해 국가와 공권력을 향해 ‘너희도 책임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여성뿐 아니라 성소수자, 철거민, 노동자 등 소수자와 약자는 언제나 조롱과 낮음의 대상이 된다”며 “이들의 혐오 문제가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밝혔다. 아직도 우리는 혐오를 끊어 내기 위해 해야 할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많다. 현재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목소리가 향하는 지점. 그곳은 오랜 억압을 반전시킬 변곡점이 될 수 있을까.
(워커스12호 2016.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