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6일. 삼성동 코엑스 전시관에서 열린 <시간선택제 일자리 채용 박람회>. 오전 10시부터 8시간 동안 진행된 이날 박람회에는 무려 3만여 명의 구직자들이 몰려들었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사람들,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에는 핫한 이슈였다. 정부와 언론은 말했다. 단순히 아르바이트가 아닌 정규직과 똑같은 복지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특히 이날 박람회에는 한국 10대 그룹이 최선봉에 섰다. 10대 그룹 82개 회사에서 무려 1만 개의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만든다고 했다. 단시간 노동이라 할지라도, 정규직과 똑같은 혜택을 누리는 대기업의 안정적인 일자리. 누가 봐도 매력적인 일자리였다.
10대 그룹의 불안한 ‘시간선택제’
그로부터 2년 뒤. 대한민국 10대 그룹이 채용한 시간선택제 일자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고용형태공시제를 분석해 삼성과 현대차, 롯데, 신세계, CJ, 한진, LG, 한화, GS, SK 등 10대 그룹의 시간선택제(단시간 근로) 일자리 현황을 살펴봤다.
2014년 상반기까지 6천 개의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밝힌 삼성그룹. 2015년 3월 말 기준, 삼성그룹에 채용된 단시간 노동자는 총 3,647명. 하지만 이 중 정부가 말한 ‘무기 계약 일자리’는 극히 드물었다. 36개 중 3개의 회사에서만 무기 계약직 시간선택제 일자리가 존재했다. 전체 단시간 노동자 중 무기 계약직은 고작 4.3%(159명). 95%가 넘는 대다수의 시간제 일자리는 불안정한 기간제 일자리였다.
현대차그룹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현대차그룹은 2014년 총 1천 개의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2015년 3월 말 기준, 현대차그룹 단시간 노동자는 519명. 이 중 무기 계약직 노동자는 89명(17.1%)이었고, 기간제 노동자는 430명(82.8%)이었다.
현대차그룹 계열사 중 시간선택제 노동자를 가장 많이 채용한 곳은 현대자동차였다. 2015년 기준, 단시간 노동자는 총 270명. 이 중 기간의 정함이 없는 무기 계약직 노동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기아자동차 역시 총 65명의 단시간 노동자 중 무기 계약직은 없었다.
한화그룹에 소속된 총 445명의 단시간 노동자 중 기간제 노동자가 83.8%(373명)였다. 롯데그룹 중 아르바이트가 많은 ‘롯데리아 ‘를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의 시간제 일자리는 2,855개. 이 중 71.1%(2,032명)가 기간제 일자리였다. 심지어 한진그룹 계열사 및 관계 법인에 채용된 750명의 단시간 노동자 중 비정규직 기간제 노동자 비율은 98.66%(740명)에 달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년 이상 고용이 유지된 시간선택제 노동자 비율은 38.9%가량이다.
물론 무기 계약 형태의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대량으로 생산해 낸 기업들도 있다. 신세계 그룹은 ‘스타벅스 코리아'(5,643명)와 ‘이마트'(896명)에서, CJ그룹은 ‘푸드빌'(9,332명)에서 집중적으로 무기 계약직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만들었다. 모두 서비스 업종이다. 엄진령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사무국장은 “애초 노동력 자체가 안정적이지 못한 저임금 일자리로 장기적인 고용에 대한 부담이 없는 직종”이라며 “이미 아르바이트 같은 단시간 노동이 이뤄지고 있는 곳은 시간선택제가 새로운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정부와 기업이 ‘정규직’이 아닌 ‘무기 계약직’ 일자리를 양산하는 것도 문제다. 우문숙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 국장은 “무기 계약직은 최저임금 수준의 낮은 임금 및 승진의 기회나 노동 기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질 낮은 일자리가 대부분”이라며 “고용 안정에서도 ‘기간의 정함이 없다’는 것뿐, 경영 방침에 따라 사용주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어 ‘고용이 보장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민주노총에서는 무기 계약직 역시 비정규직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소기업은 노동부가 지원금 막 퍼 줘도 그냥 ‘저임금 일자리 ‘
정부가 노동 시간 단축, 일 가정 양립, 일자리 창출 등의 명목으로 추진한 민간 기업 시간선택제 일자리. 2년이 지난 지금, 대기업 시간선택제 노동자들은 또다시 고용 불안과 마주해야 한다. 고용노동부도 이를 인정하는 바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대기업은 주로 기간제를 뽑았다”며 “정부에서는 이와 관련해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을 유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강제할 사항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정부가 시간선택제 일자리 정책을 시작하기 이전이나 이후나 대기업이 기간제를 채용하는 건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고용노동부는 시간선택제 민간 도입 이후, 시간선택제 성공 사례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정부 말처럼 ‘일 가정 양립, 점진적 퇴직 준비 등을 위해 근로 형태를 선택할 수 있고, 최저임금 등 기본적인 근로 조건과 임금과 복리 후생 등이 전일제 근로자와 차별 없이 보장되는 일자리 ‘는 존재하는 것일까.
고용노동부 측에 ‘성공 사례 사업장’을 연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노동부로부터 소개받은 자동차 부품 업체 A 사. 이곳은 직원 128명 중 48명이 무기 계약직 시간선택제 노동자다. 정부로부터 지원금도 받는 곳이다. 고용노동부는 무기 계약직 및 최저임금 130% 이상을 지급하는 시간선택제 일자리 창출 기업에 인건비의 50%를 1년간 지원하고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한영혜(가명) 씨는 하루 6시간씩, 주 5일 근무를 하고 있다. 근로 조건을 물었다. 시급 7,260원을 받는다고 했다. “최저임금이 6천 얼마잖아요. 이 금액에 상여금 개념으로 조금 더해 지금의 시급이 된 거예요. 짧게 일하니 기존에 있던 분들에게 안 좋을 수도 있지만, 엄마들 위주로 많이 배려해 주셔서 그런 부분을 복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급 7,260원, 세금을 제하고 나면 한 달 월급이 100만 원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 지원금을 받으려면 최저임금의 130%(7,839원) 이상을 받아야 한다. 회사 측 관계자에게 ‘시급 7,260원이 맞느냐’고 재차 확인했다. 그는 맞다고 했다. 심지어 “시간선택제 근로자 임금이 파견, 일용직 근로자보다 20%가량 높다”고 말했다. A 사는 2015년에 경기도 여성 고용 우수 기업으로 뽑혔고, 올해 3월에는 ‘시간선택제 일자리 우수 사례 경진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노동부로부터 의약, 의료 용품 제조 업체 소기업인 B 사도 소개받았다. 이곳에서 시간선택제로 일하고 있는 김미영(가명) 씨는 육아를 위해 전일제에서 시간선택제로 전환했다고 밝혔다. 올 초까지 8시간 전일제 근무였지만, 3월부터 시간선택제로 전환해 하루 6시간 일하고 있었다. 김 씨는 “임금은 노동 시간과 비례해 일부 줄었지만, 복리 후생 등에서 차별은 없다”며 만족스럽다고 전했다. 하지만 6시간 노동으로 채워지지 않는 업무의 공백도 존재한다. 추가 노동은 개인의 몫이다. “아침에 30분이라도 일찍 오고, 점심시간을 줄여서 업무를 최대한 목표치에 도달하도록 하고 있어요.”
대기업은 고용이 불안하고, 중소기업은 임금이 불안하다. 노동 강도도 불안하다. 시간선택제 일자리, 그것은 뭐 하나 불안하지 않은 것이 없는 전시용 일자리였다.
(워커스12호 2016.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