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으로부터 이런 문자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다. ‘○○학보사에서 자문을 구하고자 전화가 왔습니다. 예술대에서 취업을 위해 새내기들을 강압적으로 훈련하는 것에 대해 취업 문화와 관련해서 여쭤 보고자 한다는데요.’ 내 연락처를 가르쳐 줘도 되느냐는 메시지였다. 그러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근데 저번에 학내에서 어떤 선생님이 학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발언을 했다가 제재를 받았다고 누가 그러던데 살짝 걱정되네요.’ 그는 친절하게도 내 신변까지 걱정해 주었다.
그러나저러나, 다른 전공도 아니고 ‘예술’대에서! 다른 학년도 아니고 ‘1학년’을! 그것도 ‘취업’ 훈련을! 심지어 ‘강제’로! 이건 너무한 게 아닌가. 가뜩이나 프라임 사업이다 뭐다 해서 교육부까지 나서서 취업 교육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마당에, 누구보다 감각의 첨단에 서야 할 예술의 동량들마저 각자도생의 취업 전선으로 내몰다니.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다.
한 끗 차이, 치얼업과 취업
내가 해 줄 얘기가 있으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학생 기자와 전화 통화를 나눴다. 그런데 웬걸. 서로 동문서답만 주고받는 것처럼 대화가 겉돌기만 했다. “정말, 봄마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게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네? 봄마다요? 그래도 그게 한번 시작하면 계절을 가리겠어요? 대학교 4년 내내 시달리게 될걸요.” “네? 제가 알기론 주로 신입생들만 그렇다던데….” 이상하지 않은가. 신입생들만 취업 교육에 시달리는 문제라니.
알고 보니 중간에 다리를 놔 준 지인의 ‘사오정’ 버금가는 청력 덕분에 생긴 해프닝이었다. 예술대, 1학년, 강제, 훈련까지는 전해 들은 이야기가 맞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취업’이 아니라 ‘치어(cheer)’였던 것. 세상에, 강압적 치어 훈련! 웃음이 빵 터졌다. 서로 한참을 웃고 나서야 진정이 됐는데, 결과적으로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제재를 각오하고 강제 취업 훈련에 대해 짜 놨던 이런저런 내러티브가 별무소용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치어 문화라는 걸 그냥 흘려들을 수도 없었다. 몇몇 독자들은 치어리딩(cheerleading) 강제 훈련이란 게 뭔지 전혀 감이 안 올 수도 있을 것이다. 10년이 조금 넘은 것 같은데, 모 대학 지방 캠퍼스에서는 봄철마다 학과 대항 체육 대회 일환으로 치어리딩 경연이 열리곤 했다. 그런데 그게 과열 양상을 띠면서 캠퍼스 전체가 치어리딩으로 들썩이게 됐다. 대회 두 달 전부터 캠퍼스 곳곳에서는 과별로 음악을 틀어 놓고 군무를 짜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연습에 매진해 자정을 넘기는 날도 더러 있었다. ‘동작이 맞지 않잖아!’ ‘좀 더 분발해야 한다고!’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나 들었을 법한 불호령은 다반사. 간혹 연습 시간을 맞추지 못한 후배들한테는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얼차려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생소한 풍경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정체 모를 전통에 대한 집착이 캠퍼스 전역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자생적이고도 집합적인 대학 문화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나 역시도 치어리딩 열풍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이 같은 양가의 감정에서 오락가락이다. 어떻게 해서 대동 놀이도 아니고 하필 치어리딩이 학생들을 광란에 빠뜨린 걸까. 어쩌다 서로들 주체 못 할 정도로 집착하게 되어 폭력적인 상황까지 연출된 것일까. 복잡한 감정과 풀리지 않는 의문이 똬리를 튼다.
강압적 선배들에 대한 ‘소박한’ 변론
어쨌든 새내기를 동원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요즘 같은 세태에 ‘하나 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 매우 의미 있는 일이긴 하지만, 거기에 ‘강압’이라는 요소가 있다면 캠퍼스 안팎에서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가 되기 위해 강제적으로 후배를 동원하고 거기서 ‘우리’라는 범주를 내세워 다른 목소리들을 억제하는 관행들은 공동체가 개인을 억압할 수도 있다는 고전적인 문제들을 제기하게끔 한다. 때때로 엽기적인 신고식이 물의를 일으키고 ‘다나까’체를 강요하는 선배들이 빈축을 사는 것도 다 같은 이치가 아닐까.
그렇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이런 현상들에 단순히 조소나 냉소를 보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들은 단지 시대에 뒤처져서 군사 문화를 흉내 내기만 하는 걸까. 정말 아무런 비판 의식도 없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해 보자. 지금의 청년들은 유사 이래로 (그나마) 가장 민주화된 시대에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거친 가장 똑똑한 세대들이 아닌가. 어쩌면 자기를 보존하려는 차원에선 그 어떤 선배들보다도 더 투철한 인권 의식을 가졌을 테고.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일단 우리나라에 대학생 숫자가 너무 많은 것부터가 문제가 아닌가 하고. 사람들은 이런저런 뉴스를 볼 때마다 경악을 금치 못한다. 어느 대학 학생회는 조폭이 접수했고, 체육 계열을 비롯해 일부 전공 분야에선 아직도 후배 얼차려 문화가 횡행한다. 사람들이 놀라는 배경에는 이런 생각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때가 어느 때인데. 그리고 아니 어떻게 대학생들이나 돼 가지고. 하지만 2년제와 산업대까지 포함하면 대학교 입학 정원이 고등학교 졸업 정원보다 더 많은 시대다. 대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저들을 나무라기는 좀 그렇다는 이야기다. 한국 사회에서 저 정도면 유별나기만 한 ‘대학’ 문화는 아니지 않겠나.
대학생들이 어떤 식으로든 유대와 결속을 통해 공통의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을 깡그리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파편화된 줄 알았던 대학생들이 알고 보니 다른 누구보다도 하나가 되려 하지 않는가 말이다. 달리 생각해 보면, 엽기적인 사발식이나 얼차려 같은 건 과거엔 일종의 통과 의례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걸 거치면 비로소 대학생이었다. 그런데 의례만 남고 의미가 사라졌다면 사태는 뻔한 게 아닌가. 이들이 사람들 편견대로 헛짓거리를 일삼고 있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대학생으로서의 의미를 찾겠다고 아등바등하고 있거나.
강압이 아닌 이상 어떠한 공동체적 결속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오늘날 대학 문화가 처한 특정한 한계 상황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음주 문화가 가진 폭력성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술 없이는 그 누구도 초자아의 ‘뚜껑’을 연 채 진솔한 집합적 관계를 만들 수 없다. 으름장과 얼차려가 나쁜 건 안다. 하지만 그것 없이는 하나 되는 경험을 누리기도 어렵다. 불행히도 우리 중 그 누구도 강압이 아닌 다른 효과적인 동원 방식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전체주의적인 대학생보다 더 전체주의적 대학
그런데도 사람들은 청년들 사이에 전체주의에 준하는 어떤 현상이 있을 때 이를 기현상 내지는 하나의 스캔들쯤으로 여기고 그들 사이에 출몰하는 ‘공동체주의의 유령’을 무심히 간과해 버리곤 한다. 그러나 이런 수용 태도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문제를 초래한다. 하나는 사회적·사교적 결속을 향한 그들의 열망을 경시하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치어리딩·다나까·얼차려·조폭 문화 등을 대상화하면서 정작 우리 자신이 행하는 문화적 실천들이 얼마나 전체주의적이며 또한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학보사에 다리를 놨던 지인의 오해에는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그는 왜 ‘치어 문화’를 ‘취업 문화’로 들었던 것일까. 단순한 청력 문제만은 아닐 성싶다. 어쩌면 캠퍼스의 치어 문화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캠퍼스 전체의 취업 문화도 문제가 있다는 잠재의식도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우리는 최근 들어 고등 교육 구조조정이라는 대학 사회 안팎의 또 다른 ‘강압’ 문화와 만나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조폭 같은 대학생 선배들의 만행에 비해 대학의 공공성과 학문성이 압살당하는 현실에 대해선 그다지 민감하지 않은 듯하다.
대학교와 대학생 숫자가 많은 게 비정상적이라면 비정상적일 수 있다. 비정상적인 것의 정상화…. 이러저러한 이유로 취업을 비롯한 기타 실적이 저조한 학과들을 축소하거나 폐지하고, 상대적으로 고시 교육이나 취업 교육에 관한 예산을 늘리는 추세가 한국의 대학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게다가 교수도 학생도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국민도 취업과 출세를 지상 과제로 삼는 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현상이 돼 버렸다.
정확히 말해, 치어 문화 따위의 강압성보다 취업 중심 구조조정의 강압성이야말로 더 무서운 문제다. 별다른 문제 제기가 통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자면 그 어떤 폭력 문화보다도 훨씬 전체주의적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형태의 폭력만 아니라면, 그리고 적절한 보상만 약속된다면 그 어떤 강압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일까. 위험에 처한 건 폭력 문화에 위협당하는 신입생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아닐까…. 치어리딩 때문에 시작한 의문이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라는 곳에서 연구원 겸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중문화와 하위문화를 연구해 왔고, 최근에는 대중의 정서 구조 변동에 관심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