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혁명의 대부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1918년 독일의 혁명적 상황과 스페인 그리고 러시아 등 역사상 해방을 위한 수많은 투쟁들이 계속 실패하는 이유를 프로이트에게서 찾았다. 특히 충격적이었던 것은 세계 혁명의 전위이며 계급 의식이 가장 투철하다고 여겨진 독일 노동 계급이 반동적인 나치즘의 가장 큰 지지 세력이었다는 현실이다. 이런 현실은 개인들이 지배 체제에 스스로를 편입시키는 이유에 대해 인간 존재의 심리적 차원의 분석이 필요하다는 절박한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
이제 이론은 노동 계급이 아니라 개별 인간이 부패하고 소외된 세상을 초월하고 스스로에게 자유와 행복을 가져올 재능을 부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한 혁명 역학의 변화는 개인에 대한 강조 특히 그 본능적 감성의 변화에 주안을 두게 된다.
마르쿠제는 프로이트 이론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새로운 해방론을 전개한다. 마르쿠제가 인간 해방의 가능성을 본능의 차원에서 논하는 것은 욕망 이론이다. 인간의 욕망이나 현실의 변경은 이미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회에 의해 조직된다. 이러한 조직은 인간의 근원적인 “본능의 욕구를 억압하고 변질시킨다. 만일 억압의 부재가 자유의 원형이라면, 문명은 자유에 대한 투쟁이다”(《에로스와 문명》, 29쪽).
프로이트가 억압 없는 문명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반면, 마르쿠제는 억압 없는 문명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의 존재 조건을 타파하고 새로운 문명을 추구함으로써 인간 해방을 위한 단초를 마련한다.
프로이트는 문명을 본능에 대한 억압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억압은 필요악 혹은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성 본능의 억압은 언젠가 지불해야 하고, 이는 공격 본능 혹은 파괴 본능(타나토스)의 증대로 나타난다. 여기서 마르쿠제의 문제 의식은 출발한다.
과연 성 본능의 해방이 개인의 쾌락 추구에 의해 문명의 파괴로 이어질 것인가라는 점이다. 이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인데, 그 시선에는 ‘사회 속의 인간’이 가정되고, 본능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구성될 수 있는 것이라는 명제가 들어 있다.
진정한 해방은 에로스의 해방
우리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물질적 풍요와 자유를 누리고 있다. 즉, 이성의 목적이다. 하지만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필요한 동력으로 보이는 이성이 실제로는 인간을 억압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성’을, 자유를 향한 도정인 역사를 지배하는, 그리고 현실 변혁적인 ‘부정의 힘’으로 규정해, 모순 개념을 역사를 추진하는 원동력으로 파악한다. 그는 인간의 진정한 욕망을 억압하고, 인간의 노동을 소외시키는 현대 고도 산업 사회의 비인간적 합리성을 비판한다.
문명의 역사는 억압의 역사이다. 문명이 발달한다는 것은 그만큼 억압이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억압이 문명 사회에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지만, 이러한 억압이 과잉되어 인간을 지배한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마르쿠제는 과잉 억압과 수행 원칙이라는 인류의 문명적 생존에 필요한 기본 억압과 구별되는 사회적 지배에 필요한 억압과 원칙을 제시하면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고발한다.
사회는 인간의 아버지에 대한 살인 충동을 노동이라는 행위로 제어한다. 사회는 인간을 노동의 도구로 삼고, 지배를 사회 전체를 광대한 규모로 유지하는 것으로 만든다. 지배 자체가 비인격화되고, 사회의 지배가 합리화, 정당화되면서 인간의 반항은 그 자체로 죄가 된다. ‘지배-반항-지배’의 순환 구조는 지배의 새로운 방식을 낳으며 인간을 또 다른 방식으로 지배하는 현상을 낳을 뿐이다. 그러한 이유로 모든 혁명은 새로운 지배 방식이 탄생하는 원인이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현실의 이데올로기는 생산과 소비의 지배를 정당화하며, 그 속에서 사람의 의식은 축소된다. 현실 원칙에 따른 문명의 진보는 인간의 본능마저 약화시키고 사회를 비인격적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선진 산업 사회가 ‘일차원적 사회’이기 때문이다.
마르쿠제는 선진 산업 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라고 칭하고, 이에 상응하는 사고를 ‘일차원적 사고’라고 부른다. 일차원적 사고란 긍정적 사고로서 현존하는 것, ‘있는 것’에 대한 존재 판단에 국한된다. 따라서 이런 사고는 다른 것의 가능성을 봉쇄한다는 의미에서 권위주의적이다.
그리고 일차원적 사고는 효율성을 지향하는 사고인데, 이것은 행동을 조직적으로 촉진해서 동일한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따라서 일차원적 사고는 부정성을 보지 못하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갖지 못한다. 오늘날 선진 산업 사회에서 우리는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을 별다른 고민 없이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사회 속에서, 일차원적 사고에 머무르고 있다.
일차원적 사고는 일차원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일차원적으로’ 영구화하고 그것의 비합리성을 은폐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차원적 사고는 부정성을 특징으로 하는 변증법적 사고를 의미하는데, 변증법의 본질은 마르쿠제에게는 “부정성의 변증법”이다(《일차원적 인간》).
일차원적 사회에서는 의식이 사회에 흡수됨으로써 의식과 사회의 상관관계는 새로운 양상을 보여 준다. 욕망의 체계는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기능적 성립 요소로서 ‘변질’되고 ‘조작’된다. 참된 욕망과 거짓된 욕망의 구별에 입각하고 있다.
마르쿠제가 말하는 거짓된 욕망이란 ‘사회적 세력이 억압된 개인에게 부과하는 욕구’이자 ‘사회적 욕구가 개인적 욕구’로 이식된, 억압된 충족일 뿐이다. 그런데 욕망의 참과 거짓은 누가 어떻게 판단하지? 마르쿠제는 실망스럽게도(?) 각 개인이 스스로 답해야 한다고 한다. 현재 우리의 삶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오히려 사회의 파괴적이고 억압적인 기능을 허용·유지시키면서 진정한 자유는 상실되어 가고 있다. 우리가 갈망하는 자유는 결국 ‘일차원적 사고’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는 억압과 과잉 억압을 구분하고 후자를 인간을 소외시키는 노동 혹은 권력의 유지를 위한 억압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과잉 억압을 해방해야지만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쾌락을 갈구하는 인간”(《에로스와 문명》)이라는 새로운 정식화에서 기인하는 마르쿠제의 전면적 부정(negation), 급진적 변혁의 역학은 마르크스의 규정을 넘어선다. 이제 인간의 목표는 ‘행복’이 되고, 혁명 주체 개개인의 심리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이렇게 해서 혁명 주체는 인류(men)가 아니라 개별 인간(man)으로 호명되며, 그 주체의 정수는 에로스가 되고, “에로스를 해방하는 것은 세계를 해방하는 것”이 된다.
참고 자료
마르쿠제, 김인환 옮김, 《에로스와 문명》, 나남신서, 1989.
마르쿠제, 김현일·윤길순 옮김, 《이성과 혁명》, 중원문화, 1991.
마르쿠제, 이희원 옮김, 《일차원적 인간》, 육문사, 1993.
이화신, 〈H. 마르쿠제의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