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재 가치는 끊임없이 행복을 찾아가는 데 있다. 그래서 인간은 가정과 마을을 이루기도 한다. 하지만 지적 능력이 있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기 때문에 물질적 탐욕을 통해 행복을 추구한다. 이러한 욕망과 탐욕은 인류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 주는 사회악의 근원이기도 하다.
바로 비참함, 가난, 질병, 전쟁 등을 말한다. 따라서 구체적 악이 무엇인가에 대한 합의는 쉽고 분명하다. 하지만 현재의 가난, 질병 등과 같은 악을 머나먼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 때문에 간접적으로 제거하려고 하면, 지금 여기에서 고통받는 사람을 도외시하게 되고, 환상적인 미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현세대에 많은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 현세대의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언급한 동물 중에서도 인간만이 독특하게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 즉 정치 공동체의 창조자라는 ‘행복’에서 출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서 모든 공동체는 어떤 가치를 향해 있는데, 정치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은 인간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다. 모든 정치 공동체는 가장 고귀하고 포괄적인 가치를 향해 있다. 가령, 어떤 폴리스(정치 공동체로서 도시 국가)도 ‘좋음’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춘다. 폴리스의 궁극적인 목적은 좋음을 향한 행복한 삶이자 그 목표를 맞추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정치를 윤리적인 관점에서 이해한 것이다. 이는 정치의 본질 혹은 정치의 목적을 윤리적인 것에서 찾는다는 말이다. 좋은 정치, 최선의 정치가 무엇인지를 묻는 정치학적 질문에 대해 ‘가장 바람직한 삶’이 무엇이며 무엇이 최고의 ‘좋음’인지를 묻는 윤리학적 성찰 없이 답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의 창시자인 것도, 정치학을 윤리학까지 포함하는 ‘인간에 관한 철학’으로 이해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이에 관한 논의를 구체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좋은 정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좋은 정치적 리더십의 요소가 바로 윤리적 덕성(arete)과 프로네시스(phronesis, 실천적 지혜)이다.
모든 덕성은 로고스와 에토스, 즉 올바른 사유와 습관의 결합에서 나온다. 행복은 올바른 습관과 올바른 생각을 요구한다. 행복한 삶을 살려면 올바르게 형성된 욕구 능력과 이성적 사유를 통한 선택 능력이 결합해야 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의 지적인 덕성은 프로네시스, 테크네(techne, 기술적 지식), 에피스테메(epistêmê, 인식력), 누스(nous, 직관적 이해력), 소피아(sophia, 현명함)이다. 다섯 개의 덕성은 이론 지식과 실용 지식이라는 기준으로 분류된다. 테크네와 프로네시스는 실용 지식이며, 에피스테메, 누스, 소피아는 이론 지식이다.
에피스테메는 보편적인 진리를 뜻하며 시공간으로부터 독립적인 보편 적응성에 초점을 맞추고 맥락에 의존적이지 않은 형식적‧객관적 지식을 말한다. 테크네는 테크닉, 테크놀로지, 예술 등에 해당하는 말로서 창조 능력에 필요한 노하우나 실질적인 기술을 의미한다. 프로네시스는 신중, 윤리, 실용적 지혜 또는 실용적 이성 등을 뜻하며 특정한 상황에서 공익을 위해 최선의 행동을 선택하는 능력을 말한다. 테크네가 지식 그 자체라면 프로네시스는 가치 판단과 가치 판단 실현에 대한 자각이다.
인간이 삶 가운데서 마주치는 윤리적 상황에서는 습득해서 적용할 수 있는 테크네가 중요하지 않다. 확정적, 고정적 답이 주어질 수 없는, 그때마다의 상황에 따라 내려질 수 있는 판단은 상이할 수밖에 없으며, 최선의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진리에 다가서야 한다. 이러한 진리 추구 과정은 결국 프로네시스의 실현에서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로네시스를 “진실을 포착하는 결정적인 마음의 습관(hexis)”이라고 묘사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선한 것을 목표로 적절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말한다. 여기서 ‘선’은 하나의 원칙이며, ‘목표’는 방향성이다. 즉, 원칙을 다양한 상황에 맞게 판단하고 적용해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프로네시스는 변화하는 대상 세계를 경험하면서 이루어지는 이성적인 심의나 숙고와 관련된 활동 영역으로 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행위인 포이에시스(poiesis)와 윤리적 실천인 프락시스(praxis)를 담당하는 부분으로 구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포이에시스는 테크네라는 기술적인 지식에 기초한 행위로서 대상 세계에 대한 외적이고 도구적인 경험과 관련되고 프락시스는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인 아레테(aretê)를 실현하는 것과 관련된 윤리적 실천 행위이다. 프락시스는 이미 실체적으로 고착된 정치의 목적이나 결과에 모든 행위의 과정을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실천 행위의 과정 자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위 양식이다. 윤리 정치적 리더십 패러다임을 구성하는 프로네시스는 포이에시스가 아니라 프락시스, 즉 윤리적 실천 행위 양식과 관계하는 실천적인 지혜이자 이성적인 덕성이라는 점이다.
반면, 최고의 철학적 지혜를 의미하는 소피아(sophia)라는 지적인 덕성은 에피스테메와 누스(nous)를 통해 획득되는 덕성으로 이론 이성과 관련된 덕성이다. 소피아는 생성 변화(genesis)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 중 어떤 것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윤리적 덕성 없이 프로네시스는 불가능하며 프로네시스 없이 행복이라는 좋음에 이를 수 없다. 결국 시민을 행복으로 인도하는 좋은 정치적 행위는 윤리적 덕성과 프로네시스를 통해서 가능하며 그런 이유로 이 양자는 좋은 정치적 리더십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가 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매력을 목도하게 된다.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Hans-Georg Gadamer)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매료된 것은 바로 ‘사실적 인간(faktische mensch)’에 대한 집중이다. 가다머는 규범과 규칙의 적용이 중요한 기술, 테크네의 차원을 넘어서는 실천적 지식, 즉 프로네시스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특히 그는 이러한 근대 윤리학에 의해 각인된 윤리학의 모델에 대한 문제 제기를 유사-기술적 태도의 문제 제기로 본다.
가다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에서의 에토스 영역을 명료화하면서 소크라테스와는 구별되는 프로네시스의 개념적 측면을 부각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좋은 삶을 이끄는 실천적 이성으로서의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크라테스의 ‘좋음’에 대한 물음의 정신을 이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6권에서 테크네와 대비를 통해 부각시킨 프로네시스 개념이 ‘인간 존재의 최선의 삶’과 관계한다는 맥락에서 더욱 분명하다.
좋은 삶은 행복한 삶이다. 이러한 삶은 우리가 덕성과 윤리를 실천할 때 얻어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 있는 정치와 윤리의 결합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정치인 스스로 덕성과 윤리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정치는 사람이 덕성과 윤리를 갖출 수 있도록 법, 제도, 정책 등을 추진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정치를 통하여 윤리적인 사람이 되며 나아가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역으로 프로네시스, 정의 등의 덕성을 갖춘 윤리적인 사람이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 윤리와 정치는 이렇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
참고 문헌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 이제이북스, 2006.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천병희 옮김, 숲, 2009.
다카하시 겐타로, 《지지 않는 대화》, 양헤윤 옮김, 라이스메이커, 2016.
(워커스15호 2016.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