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대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중 하나가 생태주의라는 것은 명확하다. 그것은 생태 위기가 인류의 위기가 될 정도로 우리의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생태 위기는 인간의 자연 지배와 착취에서 비롯되었지만, 근원적으로는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지배와 착취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생태주의는 자본주의에 대적할 가장 강력한 양식이자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일찍이 생태 문제를 사회 문제로 인식한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 1921~2006)은 ‘사회적 생태론(social ecology)’으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사회의 위계적 지배 구조의 파괴야말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정상적인 관계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생태 위기의 극복은 지배와 위계 구조에 근거한 사회 관계를 폐지하고 해방적 관점에서 사회 관계를 재구성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회적 생태론(사회 생태주의)은 20세기 인류가 당면한 ‘사회적 위기’와 ‘생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북친이 주장한 관점으로, 다른 급진적 생태론과 구분하기 위해 1970년대부터 사용했다. 북친은 “‘사회적’ 비판과 ‘사회적’ 재구축에 확고하게 뿌리내린 생태주의만이 자연, ‘그리고’ 인류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사회를 개조할 수단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주기” 위해서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했다(《사회 생태주의란 무엇인가》, 16쪽). 사회적 생태론은 생태적 방향의 사회적 재구성을 촉구하는 운동이다.
그래서 사회적 생태론은 우파의 점진적 개량주의도, 혁명적 생디칼리즘도, 노동 계급 중심의 마르크스주의도 거부한다. 북친이 1937년 스페인 내전을 경험하면서 경도되었던 아나키즘도 거부한다.
혁명적 생디칼리즘은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직접 행동으로서의 총파업은 혁명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점, 심지어는 대중 운동으로서의 사회 변혁 운동과도 동일시될 수 없다는 데 있다. … 그들이 숭배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자발성’인데, 이 자발성은 경우에 따라 그들을 최악의 자멸 상황으로 몰고 갔다”(《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 138쪽)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특유의 개인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해서 일체의 구속이 없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대중 행동과 충돌된다는 한계점을 지적했다. 북친은 아나키스트 생태론자들 가운데 영성주의와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들을 비판했다. 북친에 따르면 이런 아나키스트들은 생태계의 위기를 개인 윤리의 측면에서 접근한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는 아나키즘이라는 말을 버리고 코뮌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게 됐다고 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의 물질적 전제 조건을 밝힘에 있어 매우 뛰어난 이론이었다. 하지만 “마르크스 이론은 생태주의와 도시 시민의 중요성, 즉 인류를 혁명적 사회 변화의 길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주체 세력 내지 작용인들에 대해선 충분히 알지 못했다”(같은 책, 131쪽)고 비판했다.
변증법적 자연주의
사회적 생태론의 방법은 ‘변증법적 자연주의(dialectical naturalism)’이다. 변화와 성장을 통한 발전으로 구성된 헤겔의 변증법을 유기체, 생태학에 적용했다. 헤겔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헤겔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의 후기 철학은 휴머니즘, 이성, 계몽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변증법적 자연주의는 ‘변증법적 이성’에 근거한다. 변증법적 이성이란 근대 자연 과학적인 이성, 기계적이며 도구적인 이성과는 구분된다. 진정한 이성은 자연의 유기적인 전체를 포착하며 기계적 인과의 표면 아래서 작용하는 자유로운 생명의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이렇게 ‘변증법적 이성’에 토대를 둔 사회적 생태론은 생태계의 위기를 자본의 속성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북친에 의하면 자본의 탐욕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자유와 해방이 아닌 지배와 억압의 관계로 만든 진화의 역사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원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려는 인간의 본성은 생존 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진화한 것이라 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사회적 관계는 본래 상보성의 윤리를 중심으로 했다. 각자는 생존을 위해 안정된 전체를 필요로 했고 이를 이루기 위해 상대와의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명령과 복종의 지배 구조가 자리 잡게 된다. 현대에서는 자본주의적 지배 관계 유형이 정착된 것이다.
북친은 근본적이고 실천 가능한 환경 문제 해결 방법은 “사회적 비판과 사회적 변혁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생태주의”뿐이라고 단언한다. 사회 문제 해결이 선행되지 않고서 생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차별, 인종 차별, 계급주의, 자본주의, 중앙 집권 구조의 국가주의 등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북친의 생태주의를 ‘사회적 생태론’으로 명명한 이유다.
따라서 변증법적 자연주의를 통해 생태 문제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북친은 변증법적 자연주의야말로 “사회 이론과 생태 문제의 틀을 이해하는 데 상당 부분 기여할 것이며, 생태 문제와 사회 문제를 논리적인 전체로 통합하기 위한 합리적인 수단이 될 것”(《사회 생태론의 철학》, 69쪽)이라고 주장한다.
지방 자치 권력이 핵심이다
그의 주장은 위계 구조를 해체하는 혁명적인 사회 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나 무정부주의에 기대는 것은 아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지방 자치’다. 직접 민주주의에 의해 조직된 자치체와 그것의 연방으로 사회가 재구성될 때, 비로소 인간에게 ‘좋은 삶’과 ‘좋은 자연’이 회복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이상을 1871년 파리 코뮌에 연유해서 ‘코뮌주의(communalism)’라고 부른다. ‘코뮌(commune)’, 즉 위계제와 계급을 극복한 자치 공동체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북친 자신은 ‘코뮌주의’의 두 축이 “변증법적 자연주의”와 “리버테리언 지역 자치주의(libertarian municipalism)”라고 정리한다(《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 144쪽). 코뮌주의는 내용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으로부터 형성되었다. “코뮌주의가 마르크스주의에서 배워 온 것은 철학, 역사, 경제학, 정치학을 포괄하는 조화로운 사회주의 체계의 모색 노력이다. 그리고 코뮌주의가 아나키즘에서 배워 온 것은 위계 구조는 리버테리언 사회주의 사회를 통해서만 극복된다는 주장, 그리고 아나키즘의 반국가주의와 연방제다”(같은 책, 145쪽).
‘리버테리언 지방 자치’란 한마디로 도시 단위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지방 자치 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북친에 따르면, 민중 자치를 통해서만 뿌리 깊은 위계제를 극복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급진주의의 중심지가 공장이었다면, 생태 운동의 중심지는 마을, 타운, 자치체 등의 공동체다”(같은 책, 76쪽). 그는 읍·면·시의 자율적 코뮌들이 아래로부터 연방을 구성해 국가에 맞선 이중 권력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마을 의회에서 선출된 대표가 연방 의회에 참가하고, 거기서 논의된 것은 마을 의회에서 비준받아야 효력이 발생한다. 심지어 지역 의회가 생산 기업까지 통제한다. 이런 새로운 질서 아래서만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실현될 것이다.
따라서 코뮌주의자는 “지방 자치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당선되면 그 직위가 허용하는 모든 권력을 행사하여 합법적인 민회를 만들고, 민회로 하여금 효과적 형태의 마을 회의 정부(town-meeting government)를 만들 수 있게 권력을 갖도록 한다”(같은 책, 173쪽).
북친은 인간의 활동 자체보다 그 방식과 내용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사회를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생태적인 사회 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북친은 지방 자치에 대해 너무 낙관적이라든가, 텃밭 가꾸기 등의 생활 속의 작은 실천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생태 문제를 본질적으로 사고하면 그러한 무시는 이해 가능하다. 리버테리언의 전망은 “국가 권력의 대안으로서 실천적이고 전투적이며 정치적으로 신뢰할 만한 인민 권력을 세우려는 노력”(같은 책, 174쪽)이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 서유석 옮김, 메이데이, 2012.
《사회 생태주의란 무엇인가》, 박홍규 옮김, 민음사, 1998.
《사회 생태론의 철학》, 문순홍 옮김, 솔, 1997.
배성인 한국 정치와 사회 운동을 연구하면서 학술단체협의회 운영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며, 한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워커스13호 2016.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