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사립학교법>의 개정으로 사립 대학에서 대학 평의회 설치를 의무화하면서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평의회가 생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대로 설치·운영될 수 있는지가 주요 관심사였다. 예상했던 대로 제대로 설치되지도 운영되지도 못하고 있다. 대학 평의회는 대학의 모든 주체가 수평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동등하게 참여해서 대학 운영의 민주성, 투명성, 합리성을 높여 제반 문제를 해결하는 대학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평의회 운동’, ‘평의회 정치’, ‘평의회 사상’은 바로 그런 것이다. 역사적으로 혁명이 발발하면 그 지속성의 담지자로서 하층 계급은 직접 민주주의를 사회 전반에 건설하고 기능하게 하고자 다양한 평의회를 건설했다. 영국 청교도 혁명 당시 군인 평의회,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지방 평의회, 1848년 유럽 혁명 당시의 룩셈부르크위원회 등이 유사한 형태에 속한다. 무엇보다 러시아 혁명기의 노동자 평의회가 전후 제3세계를 중심으로 전개된 노동자 직접 통제 운동에까지 연결되면서 평의회 운동은 일상이 되었다. 물론 이들 평의회가 모두 같지는 않다. 조직의 성격과 주체 그리고 활동 방식에 따라 다른 것이다.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은 ‘노동자 평의회’ 운동
마르크스주의자에게 평의회 운동의 핵심은 ‘노동자 평의회’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는 러시아 혁명의 성격과 소비에트 내용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네덜란드 출신의 마르크스주의자 천문학자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1873~1960)에게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자 국가가 주도하는 국가 자본주의였기 때문에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러시아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파악하고 레닌의 철학은 노동자에게 새로운 착취 형태를 강요하는 국가 자본주의 중간 계급 혁명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 초기 많은 공장과 정부 조직은 평의회 조직이었다. 그런데 스탈린 시대에는 당과 정부가 임명한 관료인 노멘클라투라와 기술 관료인 테크노크라트가 지배 계급으로 군림하면서 또 다른 형태의 착취와 수탈로 변해 버렸다. 때문에 판네쿡은 노동조합, 당, 국가처럼 노동 대중 위에 군림하는 조직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대중 조직으로 평의회 조직을 제시했다. 이는 조직의 지도부에 의하여 계획되고 구상되어 노동 대중에 의해 실천되는 기존 조직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에게 노동자 평의회는 노동 계급이 지배권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며 사회적 생산을 조직하는 이행기 동안의 조직 형태인 것이다(《노동자 평의회》, 82쪽).
노동자 평의회의 등장과 확대
판네쿡은 평의회가 실질적인 노동자 계급의 직접 행동으로부터 자발적이고 유기적으로 나타나고, 와일드캣 파업(wild-cats strikes, 비공인 자발적 파업)과 공장 점거와 같은 활동에 태생적 형태로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와일드캣 파업과 공장 점거를 통해 노동자 평의회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가 그런 투쟁을 실행하기 위해 조직하는 파업위원회와 같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파업위원회는 평의회 조직의 가장 기본적인 두 개의 요소인 직접 민주주의와 계급 자치를 구체화했다고 보았다. 또한, 파업위원회가 있다 해도 (위원회가 대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은 파업 참가자에 의해서 직접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노동자 평의회》, 111~120쪽).
노동자 계급의 유기적 능력과 자발성은 직접 행동과 현장 투쟁에 이미 존재하고 있고, 이들에 의해 노동자 평의회는 민주적으로 유지되며 발전하는 것이다. 일단 와일드캣 파업과 공장 점거가 국가적이고 전체 계급 운동으로 발전한다면, 즉각 자본주의 국가와의 갈등으로 전화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더욱 높은 수준의 조직을 필요로 할 것이다. 판네쿡은 노동자 평의회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점은 바로 이때이며, 자본 국가가 붕괴할 때까지 혁명과 함께 노동자 평의회의 역할은 확장될 것으로 생각했다.
노동자 평의회 운영
그는 평의회 조직 체계에서 일반 대중 위에 군림하는 전문 지도자를 없애면 양자 간의 갈등은 해소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현재의 운동에서도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이 주체로서의 대중과 지도자의 역할이다. 또는 대중과 전위 조직의 관계이다. 소위 소수의 명망가와 엘리트 중심의 운동으로부터 탈피하려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평의회 운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동의 통일성과 조직력 그리고 대중의 가변성 등을 고려하면 지도자가 반드시 불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또한 21세기에 맞는 전위 조직, 대중의 자발성을 부정해도 노동자 평의회에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는 전위 조직은 필요하다. 결국, 주체가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조직 형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노동 대중의 자발성과 전위 조직의 활동이 변증법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그래서 판네쿡은 노동자가 하나의 통일체로서 행위하며 자신의 대표자를 임명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공통의 이해를 가지며 일상생활의 실천에 같이 참여하기 때문에, 그중 일부를 자신의 실질적 대표자이자 대변인으로서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노동자 평의회》, 88쪽).
이것은 실질적 민주주의로서 모든 노동자가 주체 의식으로 스스로 무장해 동등한 권리와 관계를 맺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의 위임된 권력이 아닌 평의회를 대변하는 역할로서의 대표일 뿐이다.
따라서 노동자 평의회는 전문가로 구성된 것이 아니고 또한 공장 운영에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다. 평의회의 주된 기능은 노동자의 결정을 수행하고, 토론을 촉진하고, 다양한 노동 집단과 공장들 사이의 소통망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지역 공장 평의회와 중앙 평의회의 역할과 기능 그리고 책임에 대한 독자성과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판네쿡은 이런 공장 평의회의 연결망을 보완하기 위하여 소비자와 전문가 집단을 위한 수평적 연결망을 생각했다(황선길 외, 《맑스, 왜 희망인가?》, 43쪽).
판네쿡의 노동자 평의회 이론은 특정한 경험을 지나치게 일반화했다는 문제점이 있다. 과연 노동자 평의회가 전체 사회를 주도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판네쿡이 제시한 노동자 운동의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명확한 목표는 지리멸렬한 한국의 민주 노조 운동에 경고음을 보내 온다.
[참고 문헌]
– 안톤 판네쿡, 황선길·김주환 옮김,
《노동자평의회》, 빛나는전망, 2005.
– 황선길 외, <평의회 공산주의>,
《맑스, 왜 희망인가?》, 메이데이, 2005.
(워커스16호 2016.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