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4일, 공기업이 독점하던 에너지 산업 부문들을 민간에 개방한다는 내용의 정부 계획이 발표됐다. 정부는 이번 방침이 공기업의 거대 부채와 만성 적자에 특효약이 될 것으로 장담하면서도, 민영화에 대한 반감을 의식해 ‘공기업 기능 조정’이란 새 간판을 만들어 걸었다. 그러나 관련 기사에 달린 ‘베플’은 “민영화 하지 마라! 서민들 다 죽어 난다. 월급도 조금 주면서 요금도 올리면 어떻게 하냐?”라는 것으로, 단번에 민영화 – 월급 – 요금을 꿰며 5천여 개의 추천을 받았다. 같은 선상에서 언론과 정치권도 요금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와 인터뷰한 <YTN>은 “전기, 가스 민간 개방 결국엔 요금 상승”이란 기사 제목으로 대량 클릭을 유도했다.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의 브리핑 제목엔 “서민 에너지 요금 폭탄 우려”가 들어갔고, 이에 맞서 정부와 여당은 민간 개방이 오히려 요금을 낮출 거라고 선전하고 있다.
이처럼 요금 인상에 대한 우려와 그에 대한 반박으로 편이 갈리는 것은 민영화 조짐이 있을 때마다 순식간에 펼쳐지는 익숙한 광경이다. 어느덧 ‘요금 인상 반대’가 민영화 반대의 철칙이자 핵심으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그리고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낮은 공공요금은 그 자체로 좋은 정책인 걸까? 좋다면 과연 누구에게 좋은가? 문제는 민영화인가, 요금 인상인가?
“월급도 조금 주면서”에 담긴 댓글 민심을 곱씹으면서 ‘임금’을 갖고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그가 자본가에게 판매하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재생산 비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일터에서 소진된 노동력이 수면, 음식 섭취, 데이트 등을 통해 회복되어, 노동자가 다시 일터에 갈 수 있게 되는 데 드는 이런저런 비용을 말한다. 이건 월급이 곧 한 달 생계비라는 만인의 경험적 상식과도 부합한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도 어떻게든 맞춰 살아야 하고, 임금 수준이 열악해 노동자가 더는 버틸 수 없게 되면 노동력 재생산은 실패한 것이다. 자본가와 자본주의 체제는 저항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니 노동력 상품을 잃는 것도, 그렇다고 임금을 올려 주는 것도 원치 않는 자본가라면 수입 곡물에 붙은 높은 세금을 폐지한 19세기의 영국 자본가들을 본받아 노동자들의 생활 물가 상승을 억제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때 전기, 수도, 대중교통 같은 필수 공공재의 가격이 특히 중요한 관리 항목이 된다. 가령 전기는 공장과 매장을 운영하는 데 꼭 필요한 생산 수단이므로 자본가로서는 그것이 무조건 싸고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게 일단 이득이다. 게다가 싸고 안정적인 전기 공급은 노동자 계급의 생계비를 골고루 낮춰 사회 전반적으로 임금 상승 억제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 전기 요금의 인하는 자본가가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노동자에게 떼어 줘야 할 몫인 임금의 크기를 줄이고, 그리하여 그만큼 이윤을 더 남길 수 있는 요인이 된다. 그렇다면 국가가 전력 산업을 독점해 전기 요금을 낮게 관리하는 정책은 일종의 저임금 정책으로서 자본가의 이윤 축적을 돕는 것이 된다. 반면 노동자의 삶은 전기 요금이 오르든 내리든 실질적인 변화가 없는데, 애초 그의 임금이 생활 물가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전기 요금의 등락이 임금에 100% 반영된다는 이론적 전제를 가진다.
그렇다면 민영화는 누구에게 좋은 일일까? 앞서 보았듯 국가가 시장을 독점할 경우 낮은 전기 요금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자본가에게 이로운 선물과 같다. 그러나 민영화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전력 시장에 들어간 자본가에게로 혜택이 몰릴 수 있다. 자신이 생산, 판매하게 된 전기의 가격을 인상할 때 그 혜택이 가장 확실하게 집중된다. 자본가는 당연히 그렇게 해서 이윤을 축적할 것이다. 이때의 요금 인상분은 이번에도 임금 상승으로 흡수되어 노동자의 삶엔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여타 자본가에겐 생산용 전기 소비의 부담을 키울 뿐 아니라 물가 인상에 따른 임금 상승을 압박해 그만큼의 이윤 손실까지 떠안게 한다. 이처럼 전력 시장의 민영화는 민간 사업자의 요금 인상을 거치면서 자본가 사이의 이윤 배분 관계를 바꿔 놓는다. 이번 ‘공기업 기능 조정안’이 일부 대기업에만 혜택을 줄 것이라는 항간의 지적도 이러한 변화를 가리키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서민층의 부담을 줄인단 명분으로 줄곧 공공요금의 인상을 억눌러 왔다. 그러나 앞선 논의와 같이 정부의 낮은 공공요금 정책은 서민층보다 자본가에게 더 이롭다. 정부가 서민층을 위한다면서도 서민 경제의 더 중차대한 문제인 최저임금 인상이나 집값 안정화에 매우 소극적 태도를 보인다는 점을 떠올리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적자를 줄여야만 한다면 공기업이 요금 인상을 피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게다가 한국의 공공요금이 원가 이하로 책정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부는 요금 인상이나 재정 지원을 검토하기는커녕 공기업의 정규직과 노조를 공격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때마다 ‘철밥통’, ‘성과급 잔치’, ‘관피아’를 운운하며 공기업에 대한 신뢰를 앞장서 훼손하고 있는 게 바로 정부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은 성과연봉제를 거부하는 공기업 노조를 “기득권”이라 비난하기도 했다. 정부의 낮은 공공요금 정책이 이러한 반노동 정치는 물론이고 에너지 시장 민영화 계획과도 동시에 추진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공공요금을 둘러싼 계급 전선을 분명히 하고 지금까지의 ‘요금 인상 반대’ 구호를 넘어서는 게 아닐까 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냥 전기 요금 인상을 거부할 게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임금 상승을 수반하지 않는 전기 요금 인상, 그리고 국가의 공공성 증진 의지가 실종된 전기 요금 인상을 거부해야 한다. 높은 공공요금에 대해서도 새로운 상상을 시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전기 요금 인상을 통해 한국전력이 직접 이윤을 축적하는 상상을 해 볼 수 있다. 이 경우 기본적인 운영만이 아닌 에너지 전환이나 취약층 지원 등 공공의 목적에 투자할 수 있는 재원이 공기업 안에 곧바로 확보되는 격이다. 이는 곧 한국 사회에 사회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기금이 커진단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이 기금을 제대로 형성하고 또 다루고자 한다면 공기업이 먼저 책임감 있는 공금 관리자로서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또 국가는 요금 인상에 따른 임금 상승을 충분히 견인할 수 있도록 현행 최저임금위원회보다 더 적극적인 조치도 불사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공공요금 하나에도 서민층 부담을 넘어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얽혀 있다는 싱거운 결론으로 마무리를 한다. 하물며 안전과 환경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 모든 우리의 위기와 미래가 민영화만으로 해결될 리 만무하단 것을 인정하는 게 바로 민영화 반대의 출발점이겠다. (워커스 16호. 2016.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