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낙태죄’ 폐지 운동이 점화됐다! 공동성명, 서명운동, 시위대가 한목소리로 “내 자궁, 나의 선택”을 외치고 있다. 겉보기에 발단은 의료진 처벌을 강화할 진료 행위에 낙태 수술을 포함한 의료관계 규칙 개정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한산부인과협회가 항의 표시로 ‘수술 거부’를 선언하자마자 운동이 촉발된 모양새도 그렇다. 그러나 그간 큰 반향이나 대중 조직화가 없던 ‘낙태권’ 주장이 바로 지금 이렇게 폭발한 것은 역시 ‘메갈리아’로 통칭하는 온라인 페미니즘의 여파로 봐야 옳을 것이다. 메갈리아를 겪은 한국 여성들은 낙태 금지법 강화를 무산시킨 폴란드의 ‘검은 시위대’에 즉시 감정이입 했고, 낙태죄 폐지를 위해 위력 과시가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했다.
낙태권 주장으로 불거지지 않았을 뿐, 출산과 육아는 메갈리아의 단골소재이기도 했다. 그 고통, 노동, 책임을 여성이 전담하다시피 하는 사회 분위기를 분명하게 거부했다. 이 상황이 뿌리 깊은 젠더 불평등에 기인한다는데,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한단 말인가?
때마침 한국 사회는 저성장·저출산 국면에 들어섰다. 복지가 선거 쟁점이 됐고, 박근혜 대통령 역시 후보 시절 보편적 무상 보육을 공약했다. 다른 건 몰라도 육아 복지에 대한 국민의 염원과 기대만은 차곡차곡 쌓여 왔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누리과정 지원을 축소하고 예산을 떠넘기는 등 여지없는 복지, 증세 무의지를 재천명했다. 그 와중인 지난 5월 대한민국의 신생아, 혼인 건수는 통계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고, 정부는 2017년 ‘출생아 2만 명 늘리기’에 도전하겠단다. 있던 육아 복지도 내버리는 정부가 이제 출산을 만만한 해결책으로 지목한 셈이다. 무의지와 무능을 고루 갖춘 정부다.
그리고 한국판 ‘검은 시위’가 열린 날 <한겨레 신문>에 스타 여성학자 정희진이 뜻밖의 책 한 권을 혹평한 칼럼이 실렸다. 과감한 제목 때문에 며칠 전 화제가 된 신간 <아이는 국가가 키워라>가 주인공이다. 칼럼 내용을 보면 실상 그의 비판은 국가의 육아 책임을 주장하는 발상 자체를 향하고 있다. 이번에도 남성은 육아 책임에서 빠지려 하냐며 정희진은 그 책임을 국가에 외주화할 게 아니라 남성의 성 역할에 포함하는 게 먼저라고 주장한다. 댓글 창엔 반론이 쏟아졌다. 직장에서 이미 녹초가 된 남성들을 대변하는 내용이다. 남성 지배성을 버리지 못한 독자가 여전히 많아서일까?
심상치 않게도 내 주변 자타공인 좌파 중에서도 칼럼에 대한 불만이 삐져나왔다. 주로 국가와 사회가 이미 가정과 여성에 육아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걸 왜 인정 못 하냐는 불만이다. 더러는 “(국가는) 내 자궁에 간섭 마”라는 ‘검은 시위’의 구호도 같이 도마에 올렸다. ‘내 자궁’에도 사회적 상상을 입힐 수 있어야 하는데 뭔가 미진한 느낌이 들어서일 테다. 내가 보기에도 시위 구호들은 적극적인 의식의 발로는 아니지만, 국가와 개인 자유를 대결시킨다는 인상을 준다. 나 역시, 출산과 육아를 개인 당사자의 문제로만 본다면 국가 주도의 출산·육아 복지는 어떻게 해도 외주화나 간섭일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논쟁은 육아 휴직이나 가내 육아 분담 문제만을 맴돌기 쉽다고 생각한다. 나를 포함한 좌파에겐 사회화에 대한 상상이 여성의 자기결정권 개념만큼이나(혹은 그 이상으로) 익숙한 것이므로 일단은 이러한 얘기들이 충분히 보탤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속내가 단지 “저 구호는 너무도 자유주의적이어서 이쯤에서 논쟁과 선 긋기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길 바란다. 출산과 육아를 비롯한 모든 복지 사안을 놓고 지금 가야 할 방향은 선 긋기가 아닌 더 많은 포섭과 결집의 정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좌파는 국가가 적극적이고 유능한 경제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는 동시에, 복지 제도가 자본에 이로운 ‘노동력 재생산’ 관리의 기능을 한다는 이론적 인식도 공유한다. 결국 복지가 채찍을 숨긴 당근에 불과하다든가, 대의를 위해 노동 문제에 여성 문제를 꿰맞춰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새겨야 할 것은 자본주의에서 복지는 자본의 일정한 양보를 통해서만 실현된다는 대전제다. 그 양보는 국가가 사회 운동의 강력한 요구를 받들어 자본에 강제할 수도 있고, 뒤로 더 큰 보상을 챙겨주며 짬짜미와 눈속임으로 관철할 수도 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양보를 끌어내기 위해 지금 시급한 것은 자본이 복지 이슈를 주도하게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벌써 조짐이 좋지 않다. 2014년 전경련은 육아와 관련한 예를 들며 “한국 사회가 일 안 하는 여성에게 더 유리하기” 때문에 여성 고용률이 낮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모든 언론이 이 주장을 받아 적었고, 이듬해 정부는 어린이집을 종일반과 맞춤반으로 나눈 뒤 미취업모의 종일반 이용을 제한하는 방침을 내놓았다. 보편·무상 보육의 원칙이 깨진 순간이다.
전경련과 정부의 손발은 짝짝 맞았다. 먼저 전경련이 정부에게 보육 공약 파기의 출구 전략을 마련해 줬고, 이 전략이 적중했는지 실제 인터넷 게시판은 복지 퇴행이 아니라 게으른 ‘전업맘’을 비난하는 글로 도배가 됐다. 당시 전경련 보고서가 여성 고용 확대라는 미명으로 정부에 요구한 ‘보상’들도 주옥같다. 육아 휴직자 대체인력 확보를 위한 ‘파견근로제’ 시행(즉 규제 완화), 가사·육아 도우미 서비스 비용 절감을 위한 도우미 시장 양성화(즉 규제 완화), 소득별 양육 수당 차등 지급(즉 지원 축소) 등 자본 본위의 내용을 알차게 담았다. 이 또한 정부 계획과 별개가 아닐 것이란 점이 문제다.
결국, 복지는 계급투쟁이다. 물론 이 명제는 임금 노동이 철폐되지 않는 한 휴직, 퇴근, 월급 같은 조건에 갇혀 우리의 출산·육아가 전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하리라는 좌파적 사고를 내포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이것은 굽든 삶든 애초 복지할 돈이 자본으로부터만 나온다는 엄연한 자본주의의 현실을 가리키고 있다. 그 돈은 자본의 주머니에서 직접 나오느냐 노동자의 월급 통장을 거쳐 나오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자본의 양보’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분명해진다. 우리는 그 양보가 직장 보육 시설이나 남성 육아 휴직 수당 같은 개별 기업의 자잘한 시도나 전시용 정책을 넘어, 우리 사회에 축적되는 ‘이윤’ 전반에서 곧장 뽑혀 나오는 방식을 요구해야 한다. 증세, 임금 인상, 사내유보금 환수 등 형태는 무엇이든 좋다. 요는 어떤 복지가 필요한지는 우리가 궁리할 테니, 자본가들은 이윤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러야 한다는 것이다.
내 몸에 “간섭 말라”며 거리에 나선 여성들도, 남성도 육아 책임을 다하라는 칼럼가에게 “여력이 없다”며 반발하는 남성들도, 이미 다 겪어 알고 있을 어떤 것들을 끄집어내고 모아다가 사회적 요구로 다듬어야 한다. 낙태권도 그렇다. 지금의 낙태죄 폐지 외침에는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지만, 사실은 ‘드문’ 낙태 수술만을 옹호하고 정작 보편적 의료보험 정책은 반대했던 힐러리 클린턴식의 페미니즘보다, 더 생생하고 강력한 이야깃거리들이 잠재할 것이다. 그것들을 길어내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경험담과 역정과 억울함이 모여야 한다. 시위 현장과 SNS에 번지고 있는 여성들의 낙태 경험담이 소중하고 감동적인 이유다.
짧은 기간에 미국 흑인 운동의 역사를 새로 쓴 ‘블랙팬더 당’이 며칠 전 창당 50주년을 맞았다. 50년 전 공동 창립자 뉴튼과 씰이 대학가 흑인 운동을 뛰쳐나와 가장 먼저 한 일은 게토를 집집이 돌며 가장 필요한 게 뭔지를 설문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블랙팬더 당이 만들어졌고, 단 몇 년 새 경찰 손에 다 잡혀가거나 목숨을 잃기 전까지 블랙팬더들은 흑인 공동체의 자원을 긁어모아 무상 아침 식사 프로그램과 의료 시설을 운영했다. 미국 흑인 사회는 그 성취를 잊지 못한다. 2014년 촉발된 미국의 ‘흑인 목숨도 중요하다’ 운동은 어떤가? 이들은 지난 2년간 ‘모든 목숨이 중요하다’(‘흑인 목숨도 중요하다’에 반대하며 나온 구호)를 때려눕히는 과정에서 축적한 분노를 총 10개의 정책 제안으로 벼렸고, 그 목록을 공개하며 지난여름 ‘흑인 목숨 운동’으로의 전환을 선포했다. 이렇게 걸어오는 싸움은 누구도 무시하기 쉽지 않다. 복지 투쟁에서도 모으고, 벼리고 선도하는 과정만이 우리를 무시하기 힘든 싸움 상대로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