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한국외대, 한신대 등에서 국제정치경제와 유럽정치에 대해 강의해 왔다. 현재는 유로존 위기 이후 유럽의 정치경제와 그를 둘러싼 논쟁에 관심을 쏟고 있다.
“내 자궁은 너희의 공공재가 아니야!, 나의 자궁은 나의 선택”
2016년 10월 3일 폴란드 여성 수만 명은 국가권력의 전면적인 낙태금지법에 항의하는 일명 ‘검은 시위’를 조직화하고,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주장하며 저항했다. 또한 10월 15일 한국에서도 여성주의단체 ‘불꽃페미액션’, ‘페미당당’ 등의 주최로 낙태를 불법화하고 낙태수술을 ‘비도덕적 의료행위’로 간주한 정부 방침에 맞서 여성들은 ‘검은 시위’를 진행했다. ‘검은 시위’는 임신, 출산, 모성에 대해 거룩하게 말하고 낙태를 비도덕적인 것으로 매도하면서 여성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을 파괴하는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저항의 몸짓이다. 이들이 검은 옷을 입은 이유는 ‘몸의 권리’를 잃은 데 대한 애도의 의미다.
그런데 이런 ‘검은 시위’는 지난 8월 25일 저출산 보완대책에 대한 황교안 국무총리의 발언 내용과 오버랩 된다. 황교안 총리는 ‘생명의 소중함’과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정부 방침을 발표했다. 그런데 그의 발언에서 끔찍했던 것은 “내년 출생아를 2만 명 늘린다”라는 표현이었다. 그 표현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존엄성에 대해 어떠한 고민도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출산이 여성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국가권력과 자본의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재생산 행위일 뿐이라는 것을 너무나 당당하게 그리고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여성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생산하는 (공공) 자산으로 간주할 뿐이고, 출산은 상품 생산과 동일한 논리 속에서 사고된다. 그럼에도 그에 반하는 모든 행위는 생명의 소중함과 가족의 가치를 훼손하는 비윤리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슬프게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작금의 현실은 사실 낯선 것이 아니라 너무 익숙한 것이다. 대략 100년 전 ‘엄청난 전쟁(Great War)’으로 지칭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 각국은 출산율 저하를 막기 위해 모성을 강조했다. 이는 19세기부터 국가 간 경쟁이 격화되면서 징병제의 중요성이 높아진 것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구가 대폭 감소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구 규모 자체가 국력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전 세계적인 경제침체 속에서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려는 자본의 이해관계와도 부합했다. 그에 따라 유럽 국가들은 상호 경쟁적으로 피임과 낙태를 불법화했다.
당시에 독신 여성은 ‘출산하지 않은 여자’로서 이기적인 쾌락을 탐닉하는 음탕한 여성으로 묘사된 반면, 아내와 어머니는 영웅적 인물로 칭송받았다. 자유주의 국가든, 파시시트 국가든, 유럽 국가는 ‘임신은 여성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사회봉사’이자 ‘모성은 곧 여성의 애국심’이라는 슬로건을 전면에 내세웠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여성 조직의 간부들에게 ‘가정으로 돌아가서 여성에게 아이를 많이, 더 많이 낳으라’고 강조하기까지 했다. 나아가 히틀러의 독일 제국회의는 반낙태법 전문에 “국가 전체의 복지는 여성의 감정보다 우선한다”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이런 정책을 최초로 시행한 유일한 권력자인 것은 아니다. 사실 이는 프랑스를 본뜬 것으로, 프랑스 정부는 이미 애국적 임무를 수행한 출산율 높은 어머니들에게 ‘프랑스 가족 메달’을 수여하고 있었다. 이런 전간기 유럽 국가의 출산 정책은 국가권력과 자본의 이해관계에서 접근하는 시각이 어떠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은 그렇게 많이 바뀌지 않았다.
세월호 유가족, 그리고 백남기…
국가권력과 자본은 동일한 논리로 여전히 우리를 포획하고 있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자기 삶을 결정하는 인간이 아니라 공공재나 사물로 대상화되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지난 3년 동안 광화문 광장에서 자신의 아이들이 왜 그토록 허무하게 죽어야 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면서 투쟁하고 있다. 그럼에도 국가권력과 자본은 세월호 유가족에게 국민통합과 사회적·경제적 비용 절감이라는 미명 하에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누가 그것을 결정하는가?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작성했던 <애도 일기>에서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는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처럼 세월호 유가족의 너무나 당연한 행동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통제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패악’인 것이다.
또한 백남기 어르신에 대한 국가권력의 노골적인 부검 시도는 유족과 어르신의 자기결정권을 부정하고 인간으로서 존엄을 철저하게 짓밟는 행위다. 이미 외인사가 명백하지만 불순한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병사를 주장하는 저들에게 백남기 어르신의 사체는 하나의 사물로 간주할 뿐 존엄을 가진 인간으로서 취급받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명령에 반하는 모든 행위는 국가를 분열시키는 행위이자 사회적·경제적 비용을 증대시키는 비윤리적 행위로 재단하고 폄하한다.
국가권력과 자본, 자기 결정 그리고 존엄
이처럼 국가권력과 자본은 인간을 죽은 사물이나 공공재로 간주해 자기결정권을 훼손하는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에 저항하는 자율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하거나 죽음을 둘러싼 해석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통제하려는 야만적 폭력 행태를 노골화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존엄은 철저히 농락당하고 있다. 존 홀로웨이에 의하면, “국가는 우리를 배제하고 자기 결정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방식”이자 “자본과 화해하는 과정으로 이끄는 조직형태”이다. 국가권력은 언제나 자기 결정을 통해 삶을 능동적으로 변화하려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려 한다.
그런데, 자기 결정이란 세상 사람들이 세상의 행위 흐름을 능동적으로 결정하는 것으로서, “행위의 사회적 흐름”에 대해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의 사회적 통제 행위이다. 따라서 자기 결정은 국가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존엄을 되찾아오는 첫걸음이며, 부정당한 주체성에 대한 긍정이다. 또한, 우리를 사물로 취급하여 삶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부정하는 세계에 대항해 우리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고 결정할 가치가 있는 주체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존엄을 국가권력과 자본이 정의하고 통제하는 것에 저항해야 한다. 그들의 지배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조직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그 희망의 끈을 쥐고 있다. 왜냐하면 존엄은 통제가 아니라 우리의 자기 결정과 행동 속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