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8월 12일 밤. 국내 최초 대규모(?) 어학연수단이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뻔히 보면서도 귀국하지 못하고 모스크바 푸시킨 대학교 기숙사로 돌아왔다. 모스크바에 장기체류할 다른 학생들에게 솥이며 돈이며 죄다 줬던 탓에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우리 어학연수단의 뱃속에는 배고픔만 가득했다. 배를 쫄쫄 굶던 그 날 밤, 모스크바 시의 하늘은 불꽃놀이에 휩싸였다.
공군의 날을 기념한다고 불꽃놀이를 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를 모스크바 외곽에 감금하고 옐친이 쿠데타를 일으키고자 벌인 위장전술이었다. 다음 날 아침 라디오 방송은 중지되고 장송곡만 울려 퍼졌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던 순간이었다. 기숙사에서 아래를 보니 탱크들이 크레믈린궁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 불꽃놀이가 벌어지기 한 달 전이었다. 길거리에 나가 빵 가게에 들러보면 값싼 검은 빵만 보일 뿐 가판대가 비어 있기 일쑤였다. 좀 비싼 벨르이 흘롑(하얀 빵)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고기 가게 가판대도 텅텅 비어있긴 마찬 가지였다. 그러나 호텔 안은 달랐다. 1루블의 100분의 1인 카페이카가 유통되던 시절, 1달러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외국인이 1달러만 가지고도 잘 먹고 잘살 수 있었다.
푸시킨 대학교 기숙사 층을 지키던 제주르나야(사감)가 나에게 “프롤레타리아인 것이 자랑스럽다”라고 한 말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당시 한국에서 가져온 반짝이 양말을 선물로 건네자, 그녀가 내 귀에 남긴 한마디였다. 가판대에는 먹을 게 없고, 호텔에는 먹을 게 넘쳐나던 시절에 자랑스러운 프롤레타리아라니? 엄청난 빈부 격차 속에서도 프롤레타리아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소비에트 사회주의 혁명을 처음 시도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체르노빌 사태의 여파는 현실 사회주의 몰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크라이나의 그 어마어마한 밀 생산 지대가 핵으로 오염되어 빵의 원료인 밀이 모스크바로 공급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사재기도 기승을 부렸다. 당연히 물가는 뛰고 가뜩이나 돈이 없던 민중은 배를 곯을 도리밖에 없었다.
제주르나야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와중에 학생 하나가 급성 알레르기에 걸려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 환자는 일단 병실 침대에 누웠다. 그 상황에서 누구도 입원 얘기나 돈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치료받고 나올 때도 그 학생은 그냥 아무런 제재 없이 나왔다. 쿠데타는 일어났어도 무상의료 시스템은 작동하고 있던 거였다.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우리는 충격에 휩싸였다. 다들 현실 사회주의를 신줏단지처럼 모시다가 졸지에 무슨 저주의 상징처럼 여겼다. 그로부터 30년 한 세대가 다 지나가는 지금, 현실 사회주의가 그토록 저주의 상징이었는지 되묻고 싶다.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귀국하지 못하던 날 공항 소장을 불러 항의했지만, 정작 탑승권을 나눠주는 직원과 소장 간에는 질서정연한 위계 관계가 없었다. 그 직원에게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돈 100달러를 뒷돈으로 챙겨주려 했지만 직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가 프롤레타리아인 게 자랑스러워서 그랬는지, 우리가 아니꼬워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 같으면 소장이 직원에게 명령을 내리고 직원은 꼬리를 내리고 따랐을지 모른다. 현실 사회주의란 것과 그 안에 장착된 관료주의란 것이 일사불란하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랜덤으로 작동하던 구소련의 풍경이었다.
어학연수 기간이 여름이라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 모스크바 시내 주택들은 비어있기 일쑤였다. 소련 공산당 관료의 상당수가 바캉스를 떠났기 때문이라고 누군가가 해석했다. 옐친이 집권하고 그 텅 빈 집들은 옐친의 사유화 정책에 의해 가격이 올라 버렸다. 무상으로 공급된 집들이 사유화되던 때를 생각해 보면, 현실 사회주의 붕괴가 ‘이념의 붕괴’ 때문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던 정치 세력의 농간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쿠데타 이후 키예프 공항이 폐쇄되었다는 둥, 사람이 피살되었다는 둥 위기가 가중될 무렵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구하러 시내에 나갔다. 대통령 궁 맞은 편 강가에는 젊은이들이 탱크에 올라 옐친을 지지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표를 구하려다 실패한 뒤 기숙사로 돌아가 학생들이 샀던 화장품을 바리바리 싸 들고 다시 가 표를 요구했더니 어제만 해도 쌀쌀맞던 직원은 군말 없이 표를 내주었다. 뇌물이 이렇게 잘 통하다니. 그러면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100달러를 한 손으로 내치던 그 직원은 뭐란 말인가? 현실 사회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했다. 러시아도 뇌물이 기가 막히게 잘 통하는 나라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구구절절 30여 년 전에 벌어진 구소련의 쿠데타를 이야기한 것은 현실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의 간극이 그렇게 크지도 않으며, 쿠데타가 일어난 모스크바의 풍경은 극심한 경제적 양극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고, 현실 사회주의는 사라졌는지 몰라도 사회주의 시스템은 지금도 작동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사회주의 시스템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2000년 바이칼 호수 근처 부랴트 국립대학교에서 작동하고 있던 무상교육 시스템과 모든 학생에게 매달 용돈을 주던 모습은 빚쟁이가 돼버린 현재 한국 사회 대학생들이 처한 현실과는 천양지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