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호 데스크 칼럼
홍석만 편집장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으로 우리 사회의 ‘여성 혐오’ 문제가 다시 폭발하고 있다. 사건 피의자가 살인 동기에 대해 “여성에 무시당했다”며 새벽 시간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살해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경찰은 사건 피의자가 “2008년부터 정신 분열증·공황 장애 등으로 네 차례에 걸쳐 입원한 기록이 있다”면서 여성 혐오 살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정신과 병력이 있는 사람에 의한 단순한 ‘묻지 마 살인’이라는 것이다. 실제 온라인에서는 이 사건이 여성 혐오냐 정신 이상자의 소행이냐를 놓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수원 PC방에서 일어난 ‘묻지 마 살인’ 으로 남성 1명이 사망한 사건을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의 가해자도 정신과 병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공동체의 붕괴, 사회적 약자의 소외 등 사회적 문제에서 원인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여성이 살해된 사건에 대해서는 가해 남성의 정신과 병력이나 외톨이 등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려고 하고 있다. 여성 혐오가 살인을 부른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도는 ‘묻지 마 살인’이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난다. 묻지 마 살인은 말 그대로 살인 동기나 이유가 부정확하다는 것이다. 이유 없이 아무나 죽였다는 것인데, 과연 이것이 이유가 없는 묻지 마 살인일까?
2015년 7월, 19세 소년이 17세 소녀를 성폭행 살해 후 시신 훼손.
2015년 1월, 길 한복판에서 여성을 흉기로 찔러 살해.
2014년 7월, 버스 정류장에서 귀가하던 여고생을 흉기로 찔러 살해.
2014년 3월, 모친에 화가나 홧김에 길을 걷던 여성을 살해.
이른바 ‘묻지 마 범죄’의 10명 중 9명은 여성과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다. 강력 범죄 피해자 중 여성 피해자 비율은 1995년 72.2%, 2005년 83.2%, 2013년 90.2%로 계속 증가했다. 중범죄 피해자 10명 중 9명도 여성이다. 여성학자 다이애나 러셀은 이런 현실을 ‘여성 살해(femicide)’라고 정의한다. 여성 살해는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들이 여자들을 살해한 것”이다.
비단 묻지 마 식 범죄에만 여성 살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15년 한 해 동안 언론에 보도된 살인 사건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은 최소 91명, 살인 미수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95명으로 나타났다. 최소 1.9일의 간격으로 1명의 여성이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살해당할 위협에 처해 있다.
‘묻지 마 살인’이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여성 혐오와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은폐, 방조되면서 많은 여성들이 죽어 갔다. 인질 살해가 벌어지기 며칠 전 칼에 찔린 부인이 경찰을 찾아 상담을 요청했지만 미온적인 경찰 대응에 그냥 돌아온 후 벌어진 안산 인질극 사건, 한 여성이 납치돼 112에 신고했으나 살해돼 시신까지 훼손된 오원춘 사건 등 피해 여성이 도움을 요청하고 일정한 조치를 취했음에도 생명을 잃거나 위협받는 일들이 반복해서 발생하고 있다.
어떤 형태든 약자에 대한 혐오는 인종 차별이다. 특히 여성 혐오야말로 인류의 절반을 차별하고 공격하는 반인륜적이며 용서할 수 없는 범죄 행위다. 이런 일이 논란이 된다는 현실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야만적이고 성차별적인가를 반증할 뿐이다.
(워커스 11호 2016.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