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4~8시간을 기다리면 그럭저럭 몇 주는 버틸 만한 식량을 구할 수 있었어요. 지금은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난 월요일 나는 엄마와 몇 시간을 기다렸지만 쌀과 파스타만 살 수 있었어요. 나머지는 바차께로(bachaquero)1 가격으로 암시장에서 구해야 합니다. 임금은 충분치 않아요. 이미 도시에서는 약탈 사건이 생기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한 사회주의자가 지금 이 나라가 겪고 있는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수도 카라카스의 한 혁명 거점인 카티아에 살고 있다. 과연 베네수엘라는 어떤 상황일까? 외신이 전하는 베네수엘라 상황은 계속 악화하고 있다. 텅 빈 슈퍼마켓과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 그리고 약탈과 방화로 얼룩진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혁명의 위기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식량과 의약품 등 생필품 부족과 초인플레이션 위기. 도대체 왜 베네수엘라 상황은 계속 악화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 13년간 볼리바리안 혁명을 지지해 온 호르헤 마르틴(Jorge Martin)이 최근 〈마르크스주의 방어(In Defense Of Marxism)〉에 기고한 “마지막 경고”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경제 악화에는 유가 폭락, 세계 경제 위기에 따른 원자재 수출 감소와 민간 자본의 사보타지가 맞물려 있다. 하지만 정부의 책임도 크다는 의견이다.
생필품 부족의 이유
정부가 비판을 받는 주된 이유는 생필품 부족 때문이다. 호르헤 마르틴에 따르면, 생필품 부족 현상의 주요 원인은 정부의 외환과 가격 통제 정책의 실패 때문이다. 우선 외환 통제의 경우, 베네수엘라 정부는 환 투기를 방지하기 위해 외환을 통제했다. 대신 기초 생필품이나 여러 산업 부문에 필요한 물자를 수입하기 위해 수입업자에게 달러를 보조해 줬다. 하지만 민간 수입업자는 이를 암시장에 내다 팔거나 해외 계좌에 예금했다. 결국 수입하는 데 들어가는 달러의 양은 크게 늘었지만 수입의 양은 줄어드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누엘 서덜랜드의 의약품 수입에 들어간 비용 분석에 따르면, 2003년 수입된 베네수엘라 의약품은 1킬로그램당 1.96달러였지만 2014년 86.80달러로 치솟았다. 반면 수입 규모는 87%로 떨어졌다. 비슷한 양상이 전 경제 영역에서 나타난다. 이런 경제적 조건에서 민간 기업은 자국 산업에 투자하는 대신 석유 수출로 번 달러만 취하고 있다.
이 같은 아이러니가 가격 통제 부문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정부는 쌀 등 주요 식료품에 가격 통제 정책을 실시하고 있지만 민간 기업은 가격이 통제되는 상품 생산을 거부하고 있다. 예를 들면, 민간 기업은 쌀 가격 통제를 우회하기 위해 쌀에 색깔을 입히거나 향이 나는 식품을 생산한다. 이런 방식으로 정부의 가격 통제를 우회하면서 이윤을 취하는 것이다. 때문에 생닭은 정부 공식 가격으로 살 수 없지만 로스트 치킨은 결코 부족하지 않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한편 민간 자본가가 생산을 봉쇄하면서 기초 식품의 생산과 분배의 전체 부담은 국가에 내맡겨졌다. 정부가 석유를 팔아 번 달러로 식료품을 수입하고 이 상품을 다시 국영 슈퍼마켓(PDVAL, MERCAL, Bicentenario)에 보조금을 지원하여 낮은 가격으로 판매한다. 얼마 동안 높은 석유 수입 때문에 이 방식은 그럭저럭 작동했다. 하지만 유가가 자유 낙하 하고 경제가 깊은 침체기로 접어들면서 이 전체 구조는 모래성처럼 동반 몰락했다. 2014년 베네수엘라 석유는 배럴당 88달러였지만 2015년에는 44달러로 반토막이 났다. 올해 1월 유가는 24달러가 됐다. 베네수엘라 외환 보유고는 2015년 초 240억 달러에서 지금은 127억 달러로 추락했다.
베네수엘라 재정 고갈로 정부가 주관하는 식료품과 다른 생필품 수입은 크게 줄었다. 전체 수입액은 전년도에 비해 2015년 18.7%까지 감소했다. 이에 따라 국영 슈퍼마켓 체인이 공식 가격으로 판매하는 기본 상품은 지속적으로 부족해졌다. 동시에 이는 거대한 암시장을 만들었다. 암시장이 형성된 근본 원인은 애초 국영 슈퍼마켓 체인의 식료품이 부족해진 탓이지만 이는 다시 암시장에 의해 더 악화됐다. 지난 3월 카라카스의 노동자 계급과 빈민 지역 암시장 거래가를 보면 분유 1킬로그램의 공식 가격은 70볼리바르화(Bs)지만 암시장에선 3,000Bs에 팔린다. 돼지갈비 1킬로그램 공식 가격은 670Bs지만 암시장에선 2,800Bs에 나간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예산이 부족해진 상황에서 사회 프로그램을 계속 지원할 요량으로 엄청난 양의 현금을 찍어 내기 시작했다. 1999년에서 2015년까지 총통화량(M2)는 15,000% 이상 상승했다. 이러한 통화 정책은 경제 침체 시기에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IMF는 올해 인플레율이 720%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경고한 상태다. 덩달아 암시장에서의 환율은 2015년 1월 1달러에 187Bs에서 이제 1,000Bs로 치솟았다. 이 환율을 기준으로 대부분의 상품이 거래된다. 정부는 지난 2년 동안 최저임금을 여러 번 인상해 2015년 11월 10,000Bs에서 이제 15,000Bs가 됐다. 여기에 식품 보조비 18,000Bs를 정부로부터 받지만 식품을 암시장에서 사야 하는 한 주머니 사정은 어렵기만 하다. 생필품 부족은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 국영 공급업자가 공공 상품을 암시장에 판매하기도 하고, 국영 슈퍼마켓에서 여러 시간 동안 줄을 서 식품을 구매하고 다시 암시장에 내다 팔기도 한다. 호르헤 마르틴은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외환이나 가격 통제 등 베네수엘라 정부의 사회주의 정책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조절할 수 없는 자본주의를 조절하고자 한 규제 정책이 실패한 것”이라고 평했다.
유가 폭락과 경제 위기, 식료품 부족과 범죄 문제 외에 최근 심각해진 가뭄도 위기의 주요 원인이다. 베네수엘라 전력 공급은 수력 발전에 크게 의지하지만 최근 가뭄 때문에 전력 생산에 차질을 빚어 여러 달 동안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지난 4월 공공 기관은 주 2일 근무를 시행하기도 했다.
지난 12월 베네수엘라 총선에서 압승한 야권 연합 민주연합회의(MUD)가 베네수엘라 정부의 손발을 묶어 놓은 것도 위기에 일조하고 있다. 야권은 또 차베스 시기 몰수된 기업을 민영화하는 등 여러 친기업 법안을 몰아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부 관료의 부패와 관료주의 문제도 볼리바리안 혁명을 이끌어 온 기층 주체들의 등을 돌리게 하고 있다. 관료주의는 국가 권력에 견고하게 안착했으며, 정부 계약이나 민간 기업 또는 초국적 기업과의 계약을 통해 이득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받는다.
집권 통합사회주의당(PSUV)도 비슷한 문제로 논란을 낳고 있다. 지난 4월 미국 사회주의 잡지 《자코뱅》과의 인터뷰에서 에바 마리아는 “통합사회주의당은 사회주의적이지도 혁명적이지도 않다”고 꼬집은 바 있다. 에바 마리아는 1990년대 초기부터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 노선을 지지하며 활동해 온 혁명적 사회주의 단체 ‘밀려오는 사회주의(Marea Socialista)’ 활동가다. 이 단체는 PSUV에도 속했지만 지난해 탈당했다.
이 같은 정부와 여당의 문제는 우파의 쿠데타 공세에 윤활유가 됐다. 우익은 대통령 탄핵뿐 아니라 폭력 시위부터 군사 개입까지 선동하고 있다. 남미 좌파 전문 언론 〈아메리카21〉에 따르면, 미국은 베네수엘라 정부 전복 상황을 염두에 두며 개입을 준비하고 있다. 온두라스 미군 기지에 특수 부대를 집중 배치하고 있다. 5월에만 두 번이나 미국 정찰기가 베네수엘라 상공에 진입했다.
기로에 선 볼리바리안 혁명
1998년 우고 차베스가 대선에서 승리한 뒤 볼리바리안 정부는 18년간 지속됐다. 차베스는 기층 빈민과 노동자의 지지 속에서 21세기 사회주의를 외치며 베네수엘라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핑크 타이드 등 국내외 진보에 기여했다. 베네수엘라는 에너지 산업을 국유화하고 이 재원으로 사회 복지 정책을 확대하면서 국내 빈곤과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큰 성과를 냈다. 국제적으로는 미주대륙볼리바르대안(ALBA), 남미국가연합(UNASUR), 남미공동시장(MERCOSUR) 등을 결성해 신자유주의 질서에 맞선 대안 블록도 형성해 나갔다.
하지만 수출액의 98%가 석유 자원에 의존하는 산업 구조, 배분 경제와 관료주의, 새 부르주아 계급인 소위 ‘볼리 부르주아지’의 출현 등의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또 반자본주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볼리바리안 정치 세력에 대한 지지율이 낮아졌고 2013년 3월 그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경제 위기, 유가 하락 속에서 베네수엘라 위기는 더욱 악화했다.
차베스 마지막 정부 당시 부통령을 맡았던 니콜라스 마두로 현 대통령은 지난 2013년 4월 실시된 대선에서 박빙 끝에 집권했다. 그러나 반정부 운동을 벌여 왔던 우파와 민간 자본의 사보타지 속에서 지지율은 계속 떨어졌다. 급기야 2015년 12월 베네수엘라 좌파는 16년 만에 총선에서 베네수엘라의 야권 연대인 민주연합회의(MUD)에 패했다. 이제 우파는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국민 투표로 탄핵하려 하고 있다.
집권 뒤 마두로 대통령은 친자본 정책을 시행해 당 내외 좌파의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정부와 여당은 민간 기업의 사보타지를 해소하고자 대화를 시도하고 민간 기업에 양보하며 협력을 기대했다. 외환 거래에 대한 부분적 자유화, 연료비 보조금 인상, 외국인 직접 투자를 위한 경제 구역 설치, 해외 자본 송환 규제 완화, 광산 개발에 민간 참여 확대 등의 정책이 그것이다. 또 사보타지에 나선 민간 기업을 몰수한다는 계획 등 반자본주의 입장을 밝히기도 했으나 이는 거의 실행되지 않았다. 반면 친기업 인물을 내각에 배치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여당 내 중도파는 야권과의 협상을 지지하며 이 협상이 야권을 분열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좌파는 기층 운동에 기초한 반자본주의적 단호한 조치로 우파의 공세에 맞서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어낼리시스〉 등에 따르면 ‘아프로 베네수엘라 청년’과 ‘자유를 위한 오늘의 투쟁’ 등 기층 조직은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 마두로 정부를 지킬 것을 선언했다. 기층 사회 운동들도, 혁명 전에는 상품이 있어도 돈이 없어 수백만의 민중이 굶주렸다며 정부를 방어하고 더 급진적으로 나가자고 밝히고 있다.
마두로 정부가 위기 속으로 침몰하고 있기는 하지만 야권이 그를 퇴출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야권은 선거 연합을 결성했으나 여전히 분열돼 있다. 또 베네수엘라 기층은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이 크긴 하지만 반대편에 대한 신뢰도 낮다. 마두로 대통령은 또 탄핵이 되더라도 야권 인사인 국회의장이 아니라 부통령이 남은 임기를 맡을 수 있도록 탄핵 절차를 최대한 연기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정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