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블랙 스완(Black Swan)의 등장
영국의 유럽 연합(EU) 탈퇴(브렉시트, Brexit)를 결정하는 국민 투표를 앞두고 세계 경제가 동요하고 있다. 처음엔 잔류를 선택하는 여론이 더 높았는데, 최근 비등해졌기 때문이다. 브렉시트가 세계 경제의 뇌관이 되는 이유는, 영국은 유럽 연합 중 독일 다음으로 경제 규모가 커서 유럽 경제에 미치는 충격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또 세계 금융 산업의 중심지인 런던 금융 시장이 2008년 금융 위기에 버금가는 후폭풍에 휩싸일 것이며, 그 후폭풍은 차례대로 다른 금융 시장에 영향을 끼치리라 예상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정치적 ‘블랙 스완’이 등장했다. 검은 백조를 뜻하는 이 말은 금융 시장에서 관용어처럼 쓰인다. 늘 보던 백조가 아닌 검은 백조의 등장으로 시장이 예기치 못한 충격을 받았을 때 사용되곤 한다. 브렉시트 성공 가능성을 20%로 봤던 분석가들도 예상치 못한 이런 정치적 혼란에 당황하고 있다.
많은 분석가들은 수년 전 브렉시트 주장이 처음 제기됐을 때 유럽 연합으로부터 양보를 얻어 내기 위한 캐머론 총리의 정치적 ‘쇼’로 치부했다. 실제 올해 2월 영국은 브렉시트 이유로 제시했던 대부분의 EU 정책에 대해 EU로부터 양보를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영국은 이주민 복지 혜택 제한, EU 제정 법률 거부권, 옵트 아웃(선택적 적용) 존중, 유로 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시장에 대한 비유로 존 국가의 접근 보장 등의 요구안을 관철시켰다. EU 동유럽 국가와 프랑스 등이 이에 반대했지만, 하나의 유럽을 지지하는 EU 지도부의 설득으로 어렵게 통과된 것이다. 이렇게 상당한 전리품을 챙긴 캐머론 총리는 이미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브렉시트 투표를 6월 23일에 실시하기로 결정하면서, EU 잔류를 선택해 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캐머론 총리의 승부수가 먹힌 셈이다.
그런데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 중의 하나인 보리스 전 런던 시장이 EU 탈퇴의 선봉에 서면서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다. 캐머런과 정치적 동지로 보수당 내 입지전적인 인물인 그는 EU 합의안이 “작은 이득”만을 안겨 준 것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심지어 캐머런 내각의 장관 중에서도 EU 탈퇴론자가 6~7명에 달할 정도로 EU 반대 여론이 만만찮다. 그만큼 영국 국민의 EU 불신이 심각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나 다시 돌아갈래~”, 반EU 정서의 확산
작년 그리스의 유로 존 탈퇴(그렉시트) 논란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브렉시트 논란에도 경제 위기로 인한 영국 사회의 계층 간 분열과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여기에 과거 유럽 대륙국과 경쟁 속에서 내려져 오는 차별화된 영국이라는 역사 인식, 그리고 최근 급증한 이민자에 대한 반감 등이 얽혀 있다. 특히 상대적 박탈감이 큰 빈곤층과 중장년층이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주요 계층이다. 전문직과 관리직의 고소득 계층과 18~24세 사이의 청년층은 EU 잔류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단순 노무자와 실직자를 포함한 저소득 계층과 60세 이상의 고령층은 EU 탈퇴를 찬성하고 있다. 중장년층이 EU 탈퇴에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경제 위기로 인한 삶의 질 악화의 원인을 EU라는 외부 조건에서 찾기 때문이다. 특히 점점 줄어드는 복지 혜택의 이유가 두 번째로 많은 EU 분담금과 매년 폭증하는 이민자에 대한 지원 때문이라는 인식이 크다. 최근 남유럽의 재정 위기 이후 이들 국가로부터 넘어온 EU 국적의 이주 노동자가 대폭 증가했는데, 이들이 영국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고 영국인을 저임금에 시달리게 만든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현재 영국 내 EU 국적의 이주 노동자는 220만 명 수준이고, 비 EU 국적의 이주 노동자는 120만 명에 이른다.
물론 브렉시트 반대 진영에서는 여전히 노동자 10명 중 9명이 영국인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주장이 이민자에 대한 공포를 과장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런던정경대가 발표한 올해 보고서도 EU 이민자가 일자리와 임금을 줄인다는 주장은 명확한 근거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반대론자들은 오히려 브렉시트가 무역과 투자를 위축시켜 임금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낼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뚜렷한 인식 차이가 나는 이유는 2008년 이후 장기화되는 경제 위기 속에서 통합 유럽의 과실을 전 사회 계층이 골고루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렉시트와 같은 통합 유럽에 대한 반감은 영국만의 일이 아니다. 경제 위기 때문에 삶의 질이 계속 낮아지고 있는 프랑스, 핀란드, 덴마크 등지에서도 통합 유럽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고 있다. 핀란드에서는 유로 존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를 실시해 달라는 청원서가 제출되어 사회적 논의에 들어갔다. 현재 핀란드는 세계 최대 휴대폰 기업이었던 노키아의 파산을 기점으로 4년 평균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최대 수출국인 러시아에 대한 수출 길이 막히면서 2008년 대비 30% 이상 수출이 급감한 상태다. 러시아에 대한 EU 측 경제 제재 때문에 EU 회원국인 핀란드도 러시아에 수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핀란드 정부는 공식적으로 유로 존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고 있지만, 핀란드의 유로싱크탱크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유로 존 탈퇴를 찬성하는 등 반EU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덴마크에서는 유럽 국제 형사 경찰 조직인 유로폴(Europol) 탈퇴가 53%에 이르는 국민 투표 찬성률로 이미 결정됐다. 국민 투표를 주도한 덴마크 연립 여당인 국민당과 시민 단체들은 덴마크가 유로폴 회원국으로서 별다른 혜택을 받은 게 없으면서도 내전에 휩싸인 시리아에 EU 경찰을 파견하거나 국경을 넘나드는 테러 작전을 벌일 때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다고 지적한다. 분석가들은 파리 테러에 대한 공포가 벨기에 등 북유럽 지역까지 확산됐지만 유로폴이 뚜렷한 대처를 못 하는 무기력함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탈퇴 여론이 분출했다고 지적했다.
당연히 파리 테러를 직접 경험했던 프랑스에서도 EU 탈퇴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이미 프랑스에서는 극우 성향의 국민전선이 EU 탈퇴, 이민자 수용 반대, 무슬림 추방 등을 주장하며 정당 지지도 1위를 달리고 있다. 국민전선의 당수인 르펜의 지지율은 1, 2위를 다툴 정도로 높아졌고, 그녀는 2017년 4월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EU 탈퇴를 위한 국민 투표를 내걸었다.
지금 당장 EU 탈퇴가 제기되지 않더라도, 유럽 곳곳에서 통합 유럽에 대한 반감과 불만은 점점 극에 달하고 있다. 그 이유가 경제적 빈곤이든 이민자에 대한 적대감이든,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뒤섞여, 옛날처럼 우리끼리 독자 생존 하는 게 더 낫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이 틈을 극우파들이 선점하면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위기와 신고립주의의 확산
이런 식의 고립주의적 경향은 유럽만의 현상이 아니다. 미국의 ‘트럼프 현상’으로부터도 확인된다. 그는 멕시코 이민자들을 막기 위해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쌓겠다는 식의 독특한 언행을 일삼고 있다. 그러나 그의 발언 이면엔 세계화가 가져온 후유증과 피로감에 젖은 미국인의 정서가 깔려 있다. 최근 발표된 미국의 대외 정책 관련 설문 조사에서 미국인 57%가 미국은 자체 문제에 더 신경을 써야 하고, 다른 나라의 문제엔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이 수치는 관련 항목을 조사한 이래 가장 높은 것으로, 2002년(30%)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당연히 이런 경향은 반자유무역 정서로도 표출된다. 49% 응답자가 자유 무역 협정 등으로 미국 내 일자리가 사라지고, 임금이 낮아지고 있다고 답했는데, 이는 3년 전 부정적 의견이었던 25%보다 두 배 가까운 수치다.
이렇게 신고립주의가 부상하는 원인 중,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경제 위기 이후 점증하는 사회 재생산의 위기이다. 이에 대해 극우주의자 르펜은 아주 영리하게도 내셔널리스트(민족국가)와 글로벌리스트(세계화) 간의 투쟁이라는 프레임을 제시하고 있다. 위기 원인을 이민자와 세계화로 지목하면서, 빼앗긴 복지를 되찾아 사회를 재건하자는 논리(프랑스인들을 위한 복지 국가)로 대중을 포섭하고 있다. 한때 반세계화라는 말이 회자한 적이 있었는데, 이 대립 구도를 극우파가 민족주의적 방식으로 자기 스탠스로 잡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 볼 때, 이들은 결코 ‘무식한 인종주의자’만이 아니다. 이를 지지하는 계층은 신자유주의적 양당 체제에 실망한 대중이다. 거기엔 우파뿐 아니라 좌파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런 신고립주의 경향이 안정화된 특정 형태로 수렴될 수 있을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이미 국제화된 경제 분업 구조 속에서 산출되는 과실을 모두 포기하기엔 고립주의가 감내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또한 그만큼 지배 체제에 가하는 균열도 크다. 그래서 기존의 신자유주의 지배 세력은 온갖 국제 기구를 동원해 내정 간섭에 가까울 정도로 개입한다. 작년 그리스 채무 협상에서 등장했던 그렉시트에 대한 공격처럼, 지금 벌어지는 브렉시트에서도 동일한 공포 전략이 동원되고 있다. 정치적 블랙 스완이 일으키는 위험성을 그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불만과 대중의 삶의 위기를 잠재우지 못하는 신자유주의적 지배 체제는 여기서 이탈하려는 신고립주의적 경향과 계속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일으키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팽팽한 균형 속에서 새로운 관리 체제를 만들지, 아니면 불안정하고 진폭이 큰 동요를 만들어 낼지, 세계 경제는 신자유주의 위기 이후를 예비하는 중요한 순간에 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벌어지는 브렉시트 논란은 탈퇴냐 잔류냐의 결정에서 그칠 수 없다. 우리에게도 먼 나라 이야기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