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라 햇볕이 뜨거워 모자를 안 쓰면 금세 피부가 타서 간지럽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천막 없이 맨바닥에 깔개 한 장 없이 잘 때는 차라리 여름이면 했던 때가 엊그제인데…. 사람이 날씨에 민감해지는 건 체력이나 체질 탓이 아니다. 삶이 불안하면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유성기업에 다니는 고(故) 한광호 노동자가 자결한 이후 거리 농성을 많이 하다 보니 노숙인의 삶이 더 다가온다.
부랑인, 노숙인, 홈리스
저녁에는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와 매연으로 깊게 잠들기도 쉽지 않다. 노숙인들은 잠만 제대로 못 잘까. 노숙인은 집만 불안한 사람들이 아니다. 집이 없다는 건 일자리나 가족과 친구 등 인간관계까지 빼앗는다. 그래서 홈리스(homeless)라고 지칭한다. 홈리스는 노숙인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쪽방, 만화방, 고시원, 비닐하우스, 찜질방 같은 불안한 주거지에 사는 사람 모두를 일컫는다. 국제 사회에서는 홈리스라는 개념을 쓴다. 아직 홈리스를 대체할 만한 우리말은 없다.
2011년 6월 <노숙인등의복지및자립지원에관한법률>을 만들 때도 시민 사회는 노숙인보다는 홈리스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으나 법은 영어라 안 된다는 어이없는 변명으로 노숙인에 한정했다. 노숙인 외에 주거가 불안한 사람들은 ‘등’이라는 말에 집어넣겠다며. 그 이전에는 노숙인을 지원하는 법 제도가 아예 없었다. 2003년 7월 <사회복지사업법> 내 부랑인 사업에 노숙인을 추가했고, 2005년 <부랑인보호시설설치운영규칙>에 노숙인을 집어넣어 <부랑인및노숙인보호시설설치운영규칙>으로 바꾼 게 전부였다. 그에 따라 노숙인 쉼터 및 상담 보호 센터가 만들어졌다.
부랑인이나 노숙인에 대한 정의가 제대로 없듯이 둘의 구별도 임의적이었다. 운영 규칙에서 노숙인은 일정한 주거 없이 상당한 기간 거리에서 생활한 사람이지만 부랑인은 일정한 주거와 ‘생업 수단 없이’ 상당한 기간 거리에서 생활한 경우를 일컫는다. 노숙인과 부랑인에 대한 지원 체계가 분리(노숙인은 지방 정부, 부랑인은 중앙 정부)되고 후퇴됐다. 그래서 시민 사회는 2010년부터 <부랑인및노숙인보호시설설치운영규칙>의 한계를 넘는 상위법으로 <홈리스지원법> 제정 운동을 했다. 홈리스는 ‘일정한 주거가 없는 자, 시설 생활자, 주택으로서 부적절한 곳에 생활하는 자, 퇴거 위기에 처한 자’를 포함한다. 2009년 ‘유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 위원회’가 홈리스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한 현실을 우려하며 한국 정부에 “당사국이 홈리스 규모와 원인을 조사하고, 홈리스를 위한 적절한 생활 기준을 확실히 한 후 홈리스 문제를 다루기 위한 전략을 채택”할 것을 권고한 이후다.
홈리스의 역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부랑인으로 부르며 낙인찍은 역사와 맥이 닿는다. 1970년대 부랑인들을 가두는 대규모 부랑인 시설이 만들어졌다. 1987년 부랑인 시설의 인권 침해가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것이 형제복지원이다. 513명이 죽었을 뿐 아니라 일상적인 폭력과 노동 착취가 상존했다. ‘홈리스’라는 용어로 운동하는 것은 노숙인과 부랑인을 포괄하고 낙인을 벗길 뿐 아니라 나쁜 주거에 사는 사람들을 포괄하기 위해서다.
홈리스 당사자 운동
홈리스들이 사회 복지 지원 대상에서 운동의 주체로 나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01년 노숙인 시설 등 사회 복지 분야에서 활동하는 실무자들이 모여서 ‘노숙인복지와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노실사)’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IMF 이후 노숙인이 늘고 쉼터가 늘고 노숙인 사업이 늘면서 노숙인복지실무자협의회를 하던 사람들이 주축이었다. 그 전에는 종교 단체나 사회 복지 단체가 거리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에게 무료 급식 같은 응급 지원을 하는 게 전부였다. 노실사는 해마다 동짓날 거리에서 죽어 간 노숙인을 위한 추모제나 노숙인 인권 문화제를 열었다.
2002년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서울시가 노숙인들을 4박 5일씩 지방에 있는 청소년 수련원으로 집단 연수를 보내겠다며 눈에 안 보이게 하는 대책을 내놓았다. 이에 문제의식을 느낀 노실사, 참여연대,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학내 동아리, 감신대 도시빈민선교회 등이 모여 ‘월드컵대책노숙인인권공동실천단’을 만든다. 그해 11월 노실사는 단신 생활자 주거 지원을 위해 ‘노실사 사랑방’을 만들었다. 쉼터 같은 시설이 아닌 곳에서 노숙인들이 생활할 수 있게 하려는 취지였다. 이 활동은 정부의 임대 주택 정책인 주거 취약 계층 주거 지원 사업을 끌어냈다.
2004년 7월 철도 공안이 정신 장애가 있는 노숙인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목 졸라 죽이는 일이 발생하자 노실사는 50일간 천막 농성을 하면서 공공 역사 중심의 노숙인 지원 대책을 고민한다. 가정 폭력 피해 여성, 정신 장애인 등 다양한 위기 계층이 편의 시설과 인력 시장이 있는 서울역이나 영등포역 같은 공공 역사에 모여들기 때문이다. 의료 인력과 사회 복지 체계가 공공 역사에 연계되면 최소한 죽음은 막을 수 있고 탈노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05년 1월 철도 역무원과 공익 근무 요원이 쓰러진 노숙인을 1시간 넘게 방치하다 생긴 사망 사건으로 노숙인들의 분노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노실사는 2007년부터 노숙인들이 문화생활을 할 수 있도록 홈리스 문화 교육권 보장을 위한 주말 배움터를 운영했다. 컴퓨터, 한글뿐 아니라 아니라 요가나 영상 촬영도 배울 수 있었다. 2008년도 서울역 건너편 쪽방이 모여 있는 동자동에 동자동사랑방이 만들어지면서 당사자 운동은 더 활발해진다. 2009년 노실사를 해산하고 홈리스 당사자 조직을 더 성의 있게 잘해 보자는 취지로 홈리스행동준비위원회로 전환해 2010년 2월에 홈리스행동을 만들었다. 주말 배움터도 홈리스 야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홈리스행동은 노숙인 당사자와 활동가가 함께 집행위원회와 운영위원회에서 논의하고 활동한다. 그 외에도 미디어 사업이나 현장 상담 활동을 한다.
노실사부터 홈리스행동까지 쭉 빈곤운동을 이어 온 이동현 활동가는 말한다. “빈곤운동이 그렇듯 노숙인들 삶이 팍팍하다 보니 당사자 운동은 쉽지 않아요. 당장 먹을 것, 입을 것을 해결해야 하니까요. 사회 복지가 발달한 일본 같은 경우는 당사자 운동이 활발하고요. 아직 한국 홈리스운동의 무게 중심은 당사자보다는 활동가에게 있는 것 같아요.” 자본주의 이전에도 홈리스가 있지 않았겠냐는 질문에 그가 일침을 가했다. “조선 시대 거지 문제의 해결은 신분제를 없애는 게 중요하고, 현재 홈리스 문제는 자본의 착취를 없애는 게 제일 중요한 것처럼 체제와 함께 고민돼야죠.” 가난은 나라님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속담은 어쩌면 사회 체제를 바꾸지 않으려는 권력자들의 변명으로 만들어진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