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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을 사랑한 잡년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다

슬럿 워크와 밤거리 시위
2016년 6월 28일Leave a comment4호, 소소少笑한 연대기By 명숙

잡년행동 제공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한 모방적인 존재라는 사회학자 타르드의 말처럼 운동의 역사는 비슷한 내용과 방식이 살짝 얼굴을 달리하며 끊임없이 출현하는 게 아닐까. 달리 말하면 그만큼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다른 사회를 향한 욕망은 사그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자라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성의 밤거리 시위 역사도 그렇다. 2004년 시작한 ‘달빛 시위’와 2011년에 시작한 ‘잡년 행진’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조장하는 편견에 맞선 행진이라는 연장선에 있다. 달빛 시위는 “위험하니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며, 성폭력 발생의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고 여성을 통제하는 사회 문화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시위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전국의 여성 단체가 중심이 돼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서울과 경기, 부산 등 여러 지역에서 매년 개최했다. 잡년 행진은 2011년과 2012년에 있었던 여성의 옷차림이 성폭력을 유발한다는 주장에 맞서 야한 옷을 입고 서울 시내를 누빈 행진이다. 전 세계에서 벌어진 슬럿 워크(slut walk)의 한국판이다. 2011년 4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한 경찰관이 “여성이 성폭행을 피하려면 매춘부(slut)처럼 입지 말아야 한다”고 연설하자, 이에 분노한 전 세계 여성들이 200여 개의 도시에서 슬럿 워크를 펼쳤다. 이전에도 여러 나라에서 여성의 밤거리 시위가 있었다. 1973년엔 독일 연쇄 성폭행 사건의 대응으로 시작된 밤거리 시위가 미국과 유럽 등으로 퍼졌다.

잡년행동의 칠월은 “우리가 했던 운동도 언니들의 운동과 헌신의 토대 위에 있는 것”이라며 그때 이야기를 들려줬다. “당시(2011년) 한국에서는 고대 의대생 성폭력 사건과 판사의 모욕에 노래방 도우미가 자살한 사건으로 여성들이 많이 분노했어요. 6월 중순쯤 트위터에서 ‘우리도 슬럿 워크를 하자’고 제안한 게 많이 RT(리트윗)되면서 시작하게 됐어요. 개인들이 모여서 역할 분담을 했어요. 웹 디자인을 하는 사람은 웹자보를 만들고, 노래하는 사람은 음향을 준비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slut’을 ‘잡년’으로 번역한 건 페미니스트 잡지 <이프>였다. 어떤 단어로 번역할지 간단히 논의했는데 다들 ‘잡년’으로 가자고 했다. “전 그때 좀 세게 ‘쌍년’으로 가자고 했는데, 지금은 ‘잡년’이 좋은 거 같아요. 실제 잡년 행진에는 온갖 잡스러운 사람들이 다 모였으니까. 게이들도 있었고 이성애자 남성들도 있었거든요.”

 

슬럿 워크가 잡년행동으로

칠월은 슬럿 워크 준비가 기획단과 단순 행진 참가자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 협업 방식이어서 신선했다고 했다. 같이 피켓을 만들고, 공연도 유튜브에 올라온 춤을 연습해 오라고 공지해서 함께 췄다. 대표나 대변인을 두지 않기로 했고 모두 동등하게 ‘참가자’라고 불렀다. 특히 행진으로 그치지 않고 잡년행동으로 모인 것이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첫 행진을 한 후 모임에서 이 에너지를 일회성 행사로 휘발시키지 말고 계속 이어 가자고 해서 만들어진 게 ‘잡년행동’이에요. 개인적으로 이때가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트친들끼리 친해져서 같이 술도 많이 마시며 만나다 보니 여러 아이디어와 고민이 나온 거지요.” 그해 9월 잡년행동은 현대차 성희롱 피해자 지지를 위한 ‘잡년 난장’을 여성가족부 앞 농성장에서 벌였다. 굿하는 퍼포먼스도 하고 성금도 모아 전달했다.

잡년행동은 2012년 ‘3.8 여성의 날 대회’에도 참여했다. “그때 이슈가 나꼼수 코피 농담 사건이었는데, 삼국 카페 (여성들이 주로 모여 있는 세 개의 주요 인터넷 커뮤니티 카페. 소울드레서, 쌍화차코코아, 화장발)에서 입장을 냈지만, 일부 사람이 ‘잡년 행진은 알아서 벗고 시위도 하는데 그게 왜 나쁘냐’ 이런 식으로 문제를 왜곡했어요. 그래서 잡년행동은 3.8 여성의 날에 성명서를 쓰고 발언도 했어요. 나꼼수는 여성을 동등한 정치적 행위 주체가 아닌 후방에서 ‘응원’하는 부차적 존재로 인식하는 사고가 문제라고, 진보 마초를 비판한 거지요. 행진 때는 비키니를 입고 걸었어요. 그때 들었던 피켓이 ‘여성주의 때문에 망할 당이면 망해도 싸다’, ‘오빠는 필요 없다’, ‘우리는 진보의 치어리더가 아니다’였어요.”

2012년 총선 때 잡년행동은 정진후 통합진보당 비례 후보 낙선 운동도 했다. “전교조 위원장이었던 정 후보가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을 축소하려고 했으니 피해자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봤어요. 5월에는 총파업에도 참여하고. 러시아의 펑크 밴드인 푸시 라이엇의 석방을 위한 ‘보지 폭동’이라는 퍼포먼스도 하고.”

 

SNS의 발전과 페미니즘운동

칠월은 지금 잡년 행진이 사라졌지만, 성희롱을 당해도 아무 말 못 하던 개인들이 잡년행동으로 함께 모여 힘이 났던 경험이라고 평가했다. 여성학을 공부하는 그녀는 잡년행동이 통신 기술의 발전이 어떻게 페미니즘 운동과 만나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했다.

“1990년대에는 출판 동인 문화가 활발했던 때라 ‘또 하나의 문화’가 펴내는 책들이 페미니즘의 흐름을 형성했었고, 2000년대에는 인터넷이 발달했던 때라 부산대 월장 사건 등 격렬한 인터넷 논쟁이 있었어요. ‘언니네’ 사이트를 중심으로 영페미니스트 운동이 이어졌고요. 2011년은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SNS를 통한 사회 변화에 대한 기대가 커졌어요. 그런 기대들이 모여 잡년 행진을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트위터만 보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 같았잖아요. 2015년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 ‘메갈리아’의 미러링 등은 잡년 행진과는 또 다른 SNS의 특성을 활용한 운동이라고 봐요.”

우리는 이야기를 하며 한숨과 탄성을 번갈아 내뱉었다. 여성 혐오가 판치는 한국 현실에서 잡년 행진 같은 흐름이 다시 만들어지기는 어려운 걸까? 다른 세상을 향한 욕망이 여전히 우리에게 있으니 가능하지 않을까? 믿음과 욕망은 모방과 창조의 힘이니.

(워커스4호 2016.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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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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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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