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박성수(둥글이) 씨가 마중 나와 있다. 2012년 제주 강정마을에서 마지막으로 봤으니, 거의 4년 만의 재회다. 그동안 둥글이는 박근혜 대통령 비판 전단을 제작, 배포했다가 7개월하고도 24일간 감옥에서 고초를 겪었다. 최근에는 <뉴욕타임즈>가 그의 활동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도대체 둥글이가 누군데?” 라고 물어본다면 기자 역시 난감하다. 사회복지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활동가로서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전단을 살포하고 유랑 투쟁을 다니며, 가끔은 혈서도 쓰는 사람이다. 박근혜 대통령 명예 훼손 혐의로 구속된 후에는 판사에게 “차라리 사형하라”는 편지를 써 변호인단을 당황케 한 사람이기도 하다. 특이한 사람임은 분명한데, 그 특이함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아무래도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 봐야 할 것 같다.
자기소개 좀 해 달라
세기의 명저 《둥글이의 유랑투쟁기》의 저자이자 떠오르는 신흥 사이비 종교 둥글교의 교주다.
장난하나. SNS상에서는 진짜 교주라고 불리던데, 스스로 그러고 다니는 거냐
강정마을에서 한창 재미있게 싸움을 하다 보니, 어떤 신부님이 ‘교주님’이라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표현이나 어감이 재밌으니까 널리 퍼지더라. 내가 스스로 교주라고
한 게 아니라 대중의 반향으로 추대된 거다.
당신의 정체성이 궁금하다. 환경운동가로 알고 있는데 그것만도 아닌 것 같다
정체성은 항상 변하고, 활동도 규정되지 않는다. 단체에 소속된 것도 아니어서 이것저것 문어발식 확장 활동을 하고 있다. 군산 핵 폐기장 반대 운동을 했고, 용산 참사 투쟁 현장에 6개월 정도 있었고, 강정 해군 기지 반대 투쟁에 2년 정도 결합해 활동했다.
운동권 출신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언제부터 활동했나
어릴 때부터 자신의 영성, 이런 쪽에 어설픈 관심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나의 존재가 어쩌고저쩌고하는 현학적인 내용의 전단을 뿌리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민망하다.
듣는 나도 민망하다. 그럼 대학 때는 뭘 했나
다른 사람들 데모할 때 나는 생활 속의 자기 성실의 문제를 알리고 다녔다. 휴지 버리지 않기, 버스에서 새치기하지 않기, 도서관에 책 놓고 다니지 않기 등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지 말자는 질서 캠페인만 했다. 먼저 자신의 정신부터 바로 세우자는 취지의 활동이었다.
운동권 학생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나
열심히 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는 게 안타까웠다. 밤새워 나라와 겨레를 위해 결의를 다지는 술자리가 끝나면, 다음날 어머니 같은 청소 노동자가 뒤처리를 해야 했다.
“가끔은 헌혈보다 길바닥에 뿌리는 피가 여러 사람 살릴 수 있어”
캠페인을 하다가 투쟁 현장에 뛰어든 이유가 있나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 여러 복지 시설을 다니면서 2천 시간 넘게 봉사 활동을 했다. 장애인 옆에서 먹여 주고, 씻겨 주고, 같이 자고, 경기할 때 몸 잡아 주고. 정말 열심히 했다. 그런데 정부에서 예산 한 번 삭감해 버리면 모든 활동이 물거품이 되더라. 차라리 나가서 잘못된 제도와 정책에 맞서 싸우는 게 효과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2년 늦은 나이에 대학을 졸업했다. 바로 2003년부터 밖으로 뛰쳐나와 1인 시위와 캠페인을 시작했다.
어떤 1인 시위와 캠페인을 한 거냐
그때까지도 자기 성찰이나 정신의 문제와 관련한 캠페인이었다. 예를 들어 청소년 가출 권장 캠페인 같은 거다. 이런 식의 교육을 받고 살려면 차라리 혼자 살라는 내용이었다. 희한했던지 지역 방송에도 나왔다. 2004년에 군산 핵 폐기장 및 새만금 사업 투쟁이 진행되면서, 대정부 투쟁에 합류하게 됐다.
단체 활동은 왜 하지 않나
군산 핵 폐기장 투쟁할 때, 모 단체에서 1년간 실무자로 있었다. 지역 단체니 운영비조차 없어서 보수도 안 받고, 막일하면서 활동했다. 그런데 단체 활동은 효율성에서 한계가 있더라. 나는 긴 회의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회의가 끝나고 위에서 떨군 일들 처리하는 것도 스트레스다. 정규군보다는 게릴라식 활동이 나에게 맞는 것 같았다. 일종의 적의 허를 찌르는 변칙 공격을 위해서랄까.
과격한 투쟁을 할 때가 있다. 용산 참사 투쟁 당시 혈서 얘기는 유명하다. 전혀 상상한 적 없는 투쟁이었다
용산 때 혈서가 극단적이기는 했지만 나름 사정도 있다. 처음에 전지 열 장 들고 경찰서를 찾아가 혈서 쓰러 왔다고 하니까 경찰이 ‘쓰려면 쓰던가’라며 무시하더라. 그래서 혈관을 뚫어 혈서를 쓰기 시작했다. 굵직한 글자를 썼는데, 글자 포인트를 너무 크게 잡은 거다. 나도 당황했다. 전지 하나에 한 문장도 다 못 썼다. 두 번째 장을 쓰려고 하는데 경찰이 놀라서 그만하라고 막아서서 더 못 썼다. 여름이어서 특히 피가 줄줄 많이 나왔다.
경찰뿐 아니라 주변에서 많이 놀랐을 것 같다. 왜 혈관 뚫기를 한 거냐
일반적인 관점에서 과격한 투쟁이다. 근데 관점을 전환해 보면, 헌혈과 다르지 않다. 나는 사회복지사 할 때 엄청 헌혈을 하고 다녔다. 헌혈은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 그런데 그때는 한 사람에게 헌혈하는 것보다, 길바닥에 피를 쏟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헌혈하는 사람에게 과격하다고 하지 않지 않나. 피 쏟는 양은 비슷하다. 나에게는 사랑이 동반된 아름다운 활동이었다.
그럼 헌혈하는 심정으로 종종 혈서를 쓰나
민주당 출신 군산시 국회의원 중 비양심적 병역 기피와 미디어법 반대 투쟁에 물타기를 하던 강 모 의원이 있었다. 시청 게시판에 비판을 했다. 그러니 강 의원의 사촌이자 그의 보좌관이 글을 지우지 않으면 고소하겠다며 협박 전화를 했다. 사과하라고 전단을 뿌리니 고소를 했더라. 민주당 전당 대회장을 찾아갔다. 나를 보더니 그의 얼굴이 공포에 질리더라. 고사의 시간이 무르익어 바늘로 혈관을 찔렀다. 근데 겨울이라 혈관이 굳어 피가 안 나왔다. 나는 미처 그 사실을 몰랐다. 바늘을 빼서 다시 찔러보고, 혈관을 눌러 보기도 하고 여러 시도를 했는데도 피가 잘 안 나왔다. 그러고 있으니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행사 관계자들이 나를 밀어내 미수로 그쳤다.
“주춤거리는 것 또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 비판 전단 제작, 배포로 구속된 후 판사에게 “저에게 사형을 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탄원서를 보냈다. 포복절도했다
40일간 구치소 생활을 한 뒤 보석을 신청했다. 변호사나 나나 받아들여질 줄 알았는데 기각되니 불편해지더라. 거기다 구속 6개월 후 집시법으로 추가 구속이 됐다. 경찰서 앞에서 구호를 외치지 말라기에 ‘멍멍’이라고 외쳤다. 그게 집시법 위반이라더라. 검사가 구형 3년을 때렸다. 예전 같으면 가슴이 철렁했을 텐데, 그때는 웃음밖에 안 나와 킥킥댔다. 그래서 최후 변론에서 “그럴 거면 처음 잡혀 왔을 때 즉결 처형을 하지 뭐하러 시간 낭비하면서 이런 재판을 진행했느냐”고 말했다. 돌아와서는 탄원서를 썼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못 느끼나
판결보다 변호사들이 더 무서웠다. 변호사들도 언론을 통해 탄원서를 봤나 보더라. 나를 빨리 빼내기 위해 변호사 4명이 달라붙어 있는데, 피고인이 감옥 안에서 사형시켜 달라고 굿을 하고 있으니 열이 안 받겠나. 변호인단이 앞으로 내가 보내는 편지는 공개되지 않도록 직권 조치를 해 버렸다. 편지고 뭐고 다 막혀 버렸다. 그때 오히려 벼랑에 떨어진 느낌이 들더라.
박근혜 정부를 그렇게 비판하는 이유가 뭐냐
사람들은 내가 박근혜를 증오하고 있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박근혜에 대한 나의 마음은 가슴에서 나오는 참사랑이다. 잘못된 길을 가는 자식에게 엄하게 구는 주권자의 심정이다. 현 정부는 국가 권력의 안위를 위해 국민을 마음대로 조종, 감시, 통제하고 있지 않나. 국가로서의 역할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 이런 정부와는 극렬하게 싸워야 한다. 저들의 독재도 민주주의가 아니지만, 저들의 독재에 주춤거리는 것 또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취미가 없어 보인다
SNS에서도 사람들이 밥 먹자, 술 마시자 하는데 안 간다. 제주 강정마을 투쟁 때도 밥은 중덕이(강정마을 주민들이 키우던 개)랑만 먹었다. 밥 먹으면서 머릿속으로 영상을 편집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말을 걸면 헷갈린다. 중덕이랑 앉아 있으면 편집도 잘되고 아이디어도 나온다.
단지 취향이냐
핵 폐기장 투쟁을 했을 때, 사람들이 밤새워 술 마시면서 나라와 겨레를 위한 투쟁 의지를 불태웠다. 근데 다음날 뻗어서 아무도 전단 뿌리러 안 나오더라. 그래서 나 혼자 뿌렸다. 나라와 겨레 걱정은 몇 사람만 해도 되고 굳이 안 해도 된다. 거대 담론만 이야기하며 정작 자기가 해야 할 활동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발상이 운동의 침체를 가져온 것 아닌가. 사람들과 술 마실 시간에 전단 하나 더 뿌리고 싶다. 내가 사는 지역만 바꾸어도 세상은 바뀐다.
궁극적인 활동 목표는 뭐냐
지금도 나의 활동은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한 긴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름대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과격한 사회복지사라고 소개를 하기도 한다. 사회복지사 1급에 평생교육사 2급 자격증이 있다. 겸사겸사 교육학 쪽 공부도 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사회 복지사의 길을 가고 싶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세기의 명저인 《둥글이의 유랑투쟁기》가 잘 안 팔린다. 관심 좀 가져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