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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자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집

조직노동 너머,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에서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까지
2016년 6월 28일Leave a comment16호, 소소少笑한 연대기By 박점규

사진/ 홍진훤

2014년 여름 전북 남원의 작은 절 귀정사. 30도를 웃도는 폭염이 다른 세상 이야기인 듯 한기마저 느껴지는 깊은 숲속에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노동자 3명이 공양간(식당)으로 향한다. 그들 앞에는 공양주 보살님(절 음식을 장만해 주시는 분)이 쑤어 놓은 죽이 한 그릇씩 놓여 있다. 이들은 전북 전주의 시내버스 회사 신성여객에서 회사 국기봉에 목을 매 자결한 진기승 조합원의 한을 풀기 위해 18일 동안 단식 투쟁을 벌였던 남상훈 전북버스 지부장, 윤종광 민주노총 전북본부장, 김종인 공공운수연맹 수석부위원장이다. 민주노총을 탈퇴하면 복직시켜 준다는 회유에 회장 앞에 무릎까지 꿇었지만 이용만 해 먹고 지켜지지 않았다. 진기승 조합원은 “내가 자존심 버리고 살아 보려고 발버둥 쳤는데 나를 이용만 하네요”라는 글을 남기고 목을 매달았다. 동료들은 파업과 단식으로 맞섰고, 사경을 헤매던 그가 숨을 거둔 지 49일 만에 노사 합의가 이루어졌다.

길지 않은 단식이 끝난 후 곧바로 일상 활동을 하려던 그들을 동료들이 귀정사로 떠밀었다. 전주와 가까운 귀정사에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건강하게 복귀하라는 거였다. 단식 후 보식을 소홀히 했던 사람들이 건강을 망치는 걸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귀정사 내에 있는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의 문을 두드렸고, 인드라망은 흔쾌히 그들을 받아들였다. 독방에서 편안히 자고, 공양주 보살님이 만들어 주시는 회복식을 먹고, 만행산을 산책하고, 카페에서 책을 보면서 녹차를 우려 마셨다. 평생 경험하지 못했던 달콤한 휴식의 시간을 보내고 그들은 다시 치열한 현장으로 되돌아갔다.

 

단식자들의 달콤한 휴식처

2010년 12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모든 사내 하청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며 25일 동안 공장 점거 파업을 벌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을 끝내고 공장에서 천막 농성을 하고 있었다. 수배가 떨어진 파업 지도부였다. 김밥 한 줄로 하루를 버티고 용역 경비들의 공장 침탈이라는 긴장과 스트레스로 25일을 보냈는데, 파업을 끝내고 폭식을 하면서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 전남 순천 들풀한의원의 윤성현 원장이 대형 배낭 가방을 들고 천막을 찾았다. 그의 가방에는 의료 기기와 한약이 들어 있었다. 윤성현 원장의 손길이 닿자 노동자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모처럼 진료를 받은 노동자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해고와 오랜 수배 생활은 노동자의 몸과 마음을 크게 해쳤다. 쌍용자동차와 한진중공업에서 잇따라 목숨을 끊은 노동자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기륭전자, 쌍용자동차를 비롯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진료 활동을 해 왔던 그는 생각했다. 지친 노동자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힘을 얻고 돌아갈 수 있는 쉼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마저 깊은 상처를 입어 생사의 경계에서 신음하는 이들이 모든 걸 내려놓고 와서 치료를 받고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윤성현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 하나둘 모였다. 희망버스 승객들처럼 연대의 마음을 놓지 않는 소중한 이웃을 보면서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자고 했다. 실상사가 1,500년 동안 수행자들의 정진 도량이었던 귀정사 터를 내주었고, 많은 시민과 단체가 십시일반 돈을 모았다. 멀리서 소식을 들은 목수들이 찾아와 손수 쉼터를 지었고, 기술도 돈도 없는 해고 노동자들은 ‘몸빵’을 했다. 2013년 10월 마침내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www.shimte.org)이 문을 열었다.

인드라망은 모든 차별에 반대하며 참된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는 과정에서 쉼이나 재충전이 필요한 이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권익을 위한 사회적 갈등과 분쟁 과정에서 지쳐 위로와 휴식의 공간이 필요한 이들, 국가 폭력 및 각종 사회 폭력의 피해자와 희생자 가족들을 위한 쉼터다. 1인 1실과 하루 두 끼(점심, 저녁)를 제공한다. 텃밭을 일구거나 귀농 학교를 다닐 수 있고, 상담과 치료도 받을 수 있다. 물론 모두 공짜다. 재정은 후원자들의 회비로 운영한다. 지난 3년 동안 많은 해고자와 사회 운동가들, 그리고 쉼이 필요한 이들이 이곳을 찾았다. 인드라망은 생사의 경계에 선 아픈 이들을 따스하게 품었다.

 

외롭지 않게 부둥켜안는 집

용산 참사,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잇따른 죽음,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고공 농성과 희망버스. 국가 권력과 자본은 어느 때보다도 잔인했고,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은 어느 때보다도 무력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던 사람들이 스러져 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마음을 모으기 시작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심리 치유 공간 와락, 영등포 산업 선교회의 쉼 힐링 센터,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심리 상담 센터 ‘도반’ 등이 만들어졌다. 노동자들의 치유와 회복, 개인 심리 상담, 노동자 상담 활동가 양성 프로그램, 노동자를 위한 힐링 여행, 템플스테이 등의 사업이 진행됐다. 이들 단체가 모여 오는 7월 1일에 사회 활동가와 노동자 심리 치유 네트워크 ‘통(通)통(統)톡(talk)’이 출범한다.

지난 6월 11일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 창립총회가 <경향신문> 9층에서 열렸다. 차디찬 길거리에서 한뎃잠을 자며 싸우고 있는 동양시멘트, 콜트콜텍,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모였다. 기륭전자, KTX 승무원, 기아차 화성 비정규직, 현대차 비정규직, 현대제철 순천 비정규직 등 비정규직 당사자들도 함께했다. 백기완 선생과 문정현 신부, 시민 사회 각계각층의 200여 명이 모였다. 30년 전 구로동맹파업의 주역이었던 대우어패럴의 한 선배 노동자는 “우리가 일할 때는 비정규직이 없었는데 후배들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주게 돼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날 꿀잠 창립총회에서 참가자들은 “쓰러지기 위해 들어오는 집이 아닌, 일어서기 위해 들어오는 집, 내 가족만을 위한, 내 미래만을 위한 집이 아닌, 우리 모두의 꿈과 소망이 담길 집을 짓자”며 “혼자 외로워하지 말고, 아파하지 말고, 함께 부둥켜안고 씩씩하게 일어서자”고 다짐했다.

 

비정규노동자의 집을 짓는다는 소식에 시민들이 십시일반 마음을 보냈고, 스토리펀딩을 통해 전국에서 손길이 이어졌다. 통상 임금 승소분의 일부를 기증한 서울지하철 노동자들, 돈을 모아 보탠 서울대병원 노동자들, 예수회 신부와 수녀 등 많은 사람이 주춧돌을 놓는 일에 함께했다. 백기완 선생이 “한 달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겨우 써 내려간” 붓글씨 40여 점, 문정현 신부가 괴로울 때마다 심장을 깎는 심정으로 매달려 온 서각 70여 점을 비정규노동자의 집 건립에 쓰라고 내놓았고, 오는 7월 5일부터 류가헌 갤러리에서 2주 동안 전시회가 열린다.

“저 때문에 쓰는 힘은 칼이 되지만 벗나래 때문에 흘리는 땀은 하제가 되느니라.” 세상을 위해 흘린 땀은 내일(희망)이 된다는 백기완 선생의 붓글씨 내용이다. 2016년 여름. 여전히 앞은 보이지 않고, 힘겨운 하루를 싸워 내야 하는 시절이다. 남을 위해 단 하루도 살아 보지 않은 자들의 힘이 막강한 시대다. 하지만 우리 곁에는 벗나래를 위해 마음을 모으고 땀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 거점, 해고 노동자들의 연대와 소통의 공간, 지치고 아픈 노동자들의 어깨를 두드리는 장소…. 가진 자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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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점규
workers1@jinbo.net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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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 2016년 6월 28일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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