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 코빈 영국 노동당수의 재선
이유철(영국 브리스톨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
제레미 코빈 영국 노동당 대표는 최근 50만여 명이 참가한 당 대표 경선에서 61.8%의 지지를 획득, 경쟁자 오웬 스미스(38.2%)를 압도적인 차이로 따돌리고 대표직을 연임하게 됐다. 코빈의 승리는 쿠데타와 다름없는 다수 의원단의 강한 반대와 경선 방해공작, 프로파간다에 맞서 그들과 대비되는 반긴축, 국유화 담론으로 기층 당원의 지지를 얻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많은 언론은 코빈 신드롬을 두고 그의 승리에 대한 평가와 전망, 당내 갈등 등을 다루었다. 그러나 정작 영국의 사회적 특이성과 그 안에서의 계급 주체들 간의 상호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그들의 사회문화적 토대를 살펴보고 그 안에서 노동당과 코빈의 한계에 관해 살펴본다.
명예혁명이 불러온 민주적 코포라티즘 그리고 노동당
코빈이 재신임에 승리한 원동력이자, 나아가 당내 주류인 의원단에 맞설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무엇보다도 기층 당원의 힘이었다. 그러나 경선 과정에서 2015년 이후 새로 가입한 노동당원들은 코빈의 팬클럽일 뿐이라는 의원단의 비난은 당내 갈등의 핵심을 보여준다.
사실 이러한 노동당의 분위기는 영국의 자본주의 형성 과정이 만든 독특한 정치구조에서 비롯됐다. 지주계급에 의한 자본주의 혁명은 귀족적 위계 질서와 자본주의적 계급 질서가 공존하는 이중 구조로 영국 사회를 형성시켰다. 이에 따라 영국의 지배계급들은 민주적 코포라티즘을 통해 의회 내에서 노동자의 요구를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수용했다. 따라서 노동당 창당 당시 전투적 노동조합 운동이 살아 있었음에도 그들의 요구는 사회 혁명적 요구보다 시민권적 요구가 강했다. 일단 전투적 노동운동을 통해 기초적 시민권을 확보한 노동계급에 의회라는 공간은 그들의 시민권을 완성해줄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페이비언주의 중간계급 지식인들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위계 사회에서 엘리트 집단으로서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노동자 계급을 하나의 대항 헤게모니로, 그리고 변혁적 세력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오히려 그들은 급진적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노동계급에 부르주아적 합리성을 심어주었다. 결국 그들의 태생적 한계는 지식인들을 위계적 사회 내 하나의 지배계급으로 발전시킨다. 이들은 엘리트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권력으로 기능하며, 일국적 차원, 나아가 세계적 차원의 자본주의 수호자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제는 급진적 자유주의마저 사라졌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엘리트주의로 대변되는 영국 엘리트주의 정치 카르텔은 학벌을 기반으로 하여 사법계와 언론, 기업 등에서 이데올로기 유포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허브로 기능하며 계급, 계층 간 괴리감을 더욱 크게 하는 역할을 한다. 노동당도 예외가 아니다. 즉, 태생적 한계와 엘리트주의 네트워크는 노동당 의원들의 변신을 거리낌 없게 만들어 왔던 것이다.
노동당, 그리고 신노동당
노동당은 1945년 총선에서 전쟁 영웅 처칠의 보수당 정부를 무너뜨린다. 압도적인 승리였다. 당시 급증하던 노조 조직률과 2차 세계대전 당시 국가재건위원회가 발간한 <베버리지 보고서>가 한 몫 한 결과였다. 대중은 복지 정책과 영국의 장밋빛 미래를 그린 그 보고서를 실현해 줄 수 있는 것은 노동당뿐이라 믿었다. 그러나 냉전의 기운은 영국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노동당은 1950년 총선에서 아슬아슬한 승리에 그친다. 그러자 노동당은 <베버리지 보고서>를 버리고 한국전쟁을 위한 국방예산을 들고 나왔다. NHS(국민보건서비스)예산 삭감에 분노한 어나린 베반과 그를 중심으로 한 좌파그룹, 킵 레프트는 지구당을 장악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당 내외의 압박으로 노동당 정부는 51년 조기 총선 카드를 내민다. 의회 노동당의 자율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들의 개혁 자본주의 구상에서 사회주의적 수사와 노동조합 세력은 부담일 뿐이었다. 그해 총선을 비롯해 55년, 59년까지 연거푸 패배한 노동당은 선거 패배의 책임을 당내 좌파에게 돌린다. 냉전 질서는 그들에게 좋은 구실이었다. 비록 그 첫 단계로서 주요 산업의 사회화를 명기한 당헌 4조의 폐기는 실패하지만, 이를 계기로 당내 아슬아슬한 권력 균형이 형성된다. 노동당을 ‘현대화’된 정치조직으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우파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좌파, 이 둘 간의 긴장 관계 속에서 경제적 이해를 취하고자 하는 노동조합 관료들 간 힘의 균형이 그것이다. 이러한 균형은 케인스주의적 타협을 지속시킬 수 있는 요인이었다.
60년대 노동당 정부의 케인스식 재정금융정책의 실패와 보수당 정부의 <신노사관계법>에 의한 노조탄압, 70년대 IMF 구제금융과 차관조건에 근거한 전방위적 영국 자본주의 구조 개편은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노동조합은 파탄에 이르고, 노동당의 사회주의 강령은 유명무실해졌다. 83년 총선에서 역대 최악의 득표율을 보인 것은 노동당의 전통적 기반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파편화된 노동조합이 선거에서 역할을 못 하자, 힘의 균형은 완전히 무너졌고 노동당의 현대화 담론은 우파 노동당 의원들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블레어 체제의 1993년 전당대회는 당내 세력균형의 종언과 우파 노동당의 이념 지향을 완성하는 장이었다. 당내 선거인단 구성 비율을 동률로 함으로써 사실상 블록투표제를 무력화하여 노동조합의 권력을 축소하는 한편, 현역 의원의 재신임 조항을 개정하여 일반 당원의 권한도 축소했다. 특히, 그동안 번번이 실패한 당헌 4조 폐기에 성공하며 우파 노동당의 숙원, 신노동당은 드디어 완성된다.
벤 좌파의 저항 그리고 노동당 민주화 투쟁
1970~80년대는 신노동당 태동뿐만 아니라 이에 저항하는 노동당 내 세력들이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EEC(유럽경제공동체) 가입여부 문제가 당내 큰 이슈로 떠오르자 이를 계기로 우경화된 노동당을 아래로부터 재구성하고자 하는 시도가 시작된 것이었다. 조합 관료들에 의해 유지되어온 당내 권력 균형의 붕괴는 관료와 현장의 괴리를 가져왔다. 68혁명의 영향으로 활동가들이 노동당으로 들어가고, 토니 벤과 켄 리빙스턴의 등장으로 이들은 하나로 묶이며 당내 권력지형을 크게 변화시킨다. 좌파 평당원들이 중심이 된 노동당민주화운동(CLPD)과 68혁명의 영향을 받은 젊은 활동가들과 지역 활동가들이 중심이 된 노동당 조정위원회(LCC)가 구성되었고, 이후 이들은 풀뿌리운동위원회(RFMC)로 통합되며 소위 ‘벤 좌파’라는 하나의 계파를 탄생시킨다. 이들은 소위 구 좌파인 트리뷴과는 구분되었다. 당헌 4조를 찬성한다는 점에서 같으나, 의원단 권력 구조 해체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구분됐다. 기층 당원이 중심이 된 벤 좌파의 당내 민주화 투쟁은 많은 성과를 이룬다. 벤 좌파의 목소리가 가장 거셌던 1981년 특별 전당대회에서 그동안 의원단 투표로 선출해온 당수와 부당수를 선거인단에서 선출하기로 한 것이었다. 나아가 기존 현역 의원의 재출마에 관해 지구당 집행위원회의 재신임 조항을 삽입했다. 이들은 노동당을 유지하면서 노동당의 주류를 해체하고 재구성할 힘을 가졌다는 점에서 최후 보루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트리뷴의 당내 우파와의 연대와 배신으로 벤의 당권 수복 계획은 실패한다. 결국 1980년대 후반, 트리뷴도 벤 좌파도 모두 산산조각 나고 만다.
대중과 코빈 신드롬
전 세계적 좌경화 흐름은 2010년 에드 밀리밴드 노동당 대표 당선을 가져온다. 노동당 우파는 노동조합의 지지를 업고 다시금 찾아올 수 있을 당내 저항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밀리밴드는 신노동당 노선을 폐기하지만, 동시에 노동조합 개입력을 약화시키고자 블록투표제를 완전 폐지하며 실질적으로는 신노동당 노선을 완성한다. 그러나 노동조합과 좌파 세력을 패퇴시키기 위한 그들의 전략이 코빈을 당선시키게 될 줄은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두 번의 코빈의 노동당 집권 과정은 지난 노동당 좌파의 정치 경로와 차이가 있었다. 우선 7~80년대를 풍미했던 정치 명문가 출신의 토니 벤은 노동운동 세력들의 조직적 지지를 받았다. 좌파들은 전략적 입당주의를 통해 노동당 내 주요 기구를 장악해 들어갔다. 그러나 코빈의 경우는 이와 상반된다. 주변인이자 노조 출신인 코빈은 조직적 지원이 전무했다. 벤을 지지했던 68세대마저도 이미 당을 떠난 후이기에 그 기반이 없었다. 따라서 2015년 당 대표 선거 승리는 오직 그의 정책과 대중의 자화상인 코빈 자체에 대한 관심과 지지였다. 글로벌 금융 위기와 유로 위기 후 외피를 벗은 자본주의의 모습을 인지하기 시작한 대중에게 코빈이 내놓은 정책은 기성 노동당 정치인의 ‘어쩔 수 없다’는 뻔한 이야기와는 달랐다. 조직적 지원도 없이 새로운 당에 대한 열망을 뛰어 넘어, 대중의 분노가 기성 정당(노동당)의 주변인들에게 모였다는 점은 영국 사회의 특이성이 작용한 결과지만, 동시에 그들의 반엘리트주의는 영국 사회 근본 문제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2016년 경선은 2015년과는 또 달랐다. 무엇보다 코빈에 대한 지원은 이전보다 더욱 조직적이었다. 흩어진 68세대가 다시 모였고, 노동당의 좌경화를 당 밖에서 이끌어 오던 레프트 유나이트와 레프트 유니티 등의 조직적 지원과 입당 전술 그리고 연대 요청이 있었고, 사회주의노동자당(SWP)과 사회당(SP) 등의 트로츠키주의 정치조직을 비롯해 각종 좌파적 성향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연대체를 꾸려 그를 적극 지원했다. 조직적 지원은 노동당의 폭발적인 당원 수 증가로 이어졌고, 이는 노동당에 대한 불신과 분노, 동시에 기대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과거 벤이 그랬던 것처럼 코빈이 가는 곳에는 그를 지지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이런 집회는 우파가 장악한 당내 캠페인보다 외부에서 노동당의 기대를 모으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브렉시트에 있다. 코빈을 지지하는 좌파 조직들은 브렉시트에 찬성이었지만, 노동당을 지지하는 대중의 경우 반대가 주류였기 때문이다. 당시 코빈은 유럽적 가치와 보수당, 극우파에 대항한 EU 잔류 캠페인을 이끌지만, 브렉시트 가결로 (브렉시트에 반대했던) 노동당 지지자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은 무엇보다도 중산층과 고학력 젊은 층에서 두드러진다. 이에 더해 정책 실현가능성에 대한 회의도 무시할 수 없다. 이는 다음 총선에 대한 불확실성을 증대해 민주적 코포라티즘에 익숙한 대중의 이탈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만약 당 대표로 만들어 준 대중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코빈은 더욱 일찍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노동당의 경선이 큰 화제를 낳았지만 지지부진한 지지율은 이를 보여준다.
나가며
앞서 언급했듯이 영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이중적 구조의 특이성과 이에 기반한 노동당의 정체성은 앞으로 코빈이 마주할 어려움이 단순히 당 내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는 자본과 엘리트주의 카르텔 뿐 아니라 영국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형성된 민주적 코포라티즘이라는 신앙과 대결해야 한다. 이는 벤 좌파의 노동당 민주화 운동이 당내 좌파 정치의 활성화에서 나아가 형식적 당내 민주화를 이룩했지만, 집권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여러 시사점을 던진다. 당내 우파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영국 사회문화적 조건도 노동당의 투쟁의 대상인 것이다. 따라서 당내 투쟁과는 별도로 외재적 힘이 필요하다. 현장 노동계급의 활성화와 사회운동의 분출, 대중의 요구와 이에 기반을 둔 강령과 변혁적 정책들이 함께 가야한다는 것이다.
코빈이 이를 실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는 늘 반 긴축과 반 노동 악법을 주장해 왔고 이를 위한 노동자의 파업을 지지해 왔지만, 노동조합이 늘 그 법 테두리 안에 있길 원했다. 그에게 파업은 시민권의 표출이며 동시에 인권적 저항이다. 따라서 그 파업은 합법적이어야 한다. 물론 불법적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대중적일 필요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주장하는 사회변혁의 과정이라면 이미 과거의 실패가 충분히 반면교사가 된다. 그가 가진 민주적 코포라티즘에 대한 신념과 노동당에 대한 충성이 가져올 미래는 여전히 불명확하다. <워커스 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