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표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움직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 방문한 인천공항이 첫 신호탄이다. 이를 시작으로 공공기관, 민간기업 할 것 없이 정규직화 계획을 내놨다. 공공부문에선 미래창조과학부 출연연구기관, 한국전력과 한국수력원자력, 예금보험공사가 비정규직 정규직화 추진을 발표했다. 민간부문도 기민하게 움직인다. 롯데그룹과 현대백화점그룹은 회장이 직접 나와 비정규직 정규직화 계획을 발표했다. SK브로드밴드는 이미 실행에 들어갔다. 언론에 나온 비정규직 정규직화 규모는 7만 명에 달한다. 마치 ‘비정규직 제로 시대’가 도래할 것만 같은 분위기다.
자회사 ‘정규직’은 없다
하지만 이 모든 정규직화 과정에 이상한 공식이 끼어든다. 문재인표 정규직화를 상징하는 인천공항공사부터가 그렇다. 공사 관계자는 다수의 언론 인터뷰에서 “자회사 설립을 통한 정규직화를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공사 정규직으로 직접고용할 생각이 없다는 말이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노동연구원도 여기에 힘을 싣고 있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상임연구위원은 언론을 통해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고용안정과 소속감을 개선하기 위해 자회사 정규직화를 생각해볼 만하다”며 “인천공사 비정규직 연봉은 낮은 수준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일괄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할 경우, 정권 말기엔 인건비 증가가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민간기업도 이 같은 흐름에 보폭을 맞추고 있다. SK브로드밴드는 이미 자회사 설립 추진에 들어갔다. SK브로드밴드는 6월 중으로 5,200명에 달하는 비정규직 기사들을 자회사 설립을 통해 직접 채용하겠다고 밝혔다. 희망연대노조 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지부 조합원은 지난 1일 투표로 자회사 설립에 찬성했다. 이날 SK브로드밴드는 103개 협력업체 중 80여 곳과 위탁 계약을 해지했다.
# 사례1. 다산콜센터
언론이 자회사 정규직 전환의 ‘좋은 예’로 꼽는 곳은 서울시의 120다산콜센터다. 애초 다산콜센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서울시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싸움을 벌여왔다. 2013년과 2014년에는 파업도 했다. 결국 서울시는 2014년 12월 연구 용역을 의뢰해 정규직화 방식을 찾겠다고 발표했다. 결과는 재단(자회사) 설립을 통한 정규직 전환이었다. 다산콜센터 비정규직 430여 명은 지난 5월 1일자로 재단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서울시가 재단 설립 방식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총액인건비 상승을 막기 위해서였다. 정부는 각 기관의 정원과 인건비 예산을 기준인건비(총액인건비) 제도라는 이름으로 통제하고 있다. 만약 이들을 서울시에 직접고용할 경우 인건비 상승이 불가피해진다. 자회사를 설립해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고용안정은 보장하면서 기존 임금 수준은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정규직이 된 다산콜센터 상담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은 어떻게 변했을까. 다산콜센터 노동자들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평가였다. 민간 위탁 당시, 상담원들은 업무테스트와 상담품질(QA), 콜 수 등을 바탕으로 평가 등급이 매겨졌다. S~D등급까지 성과급도 차등 지급했다.
재단 정규직이 된 지금, 노조의 문제 제기로 한 달에 한번 꼴로 진행되는 업무테스트는 실시하지 않지만, 상담품질(QA)과 콜수 등의 평가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7월 이후 평가제가 사라질지, 아니면 또 다른 평가 항목이 추가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은 정규직이지만, 또다시 비정규직 신분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다. 현재 재단 이사장은 시장이 임명한다. 예산도 시장이 집행한다. 재단의 실질적 업무 권한은 시가 가지고 있다. 시장이 바뀌면 또 어떻게 재단이 바뀔지 모를 일이다. 재단이 구청, 교통 민원 등의 일부 부서를 다시 외주화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A씨는 “공공기관 산하에 있는 회사가 용역을 준 사례는 비일비재하다”며 “사회정보원도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인데 용역을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 사례2. 도시철도ENG
도시철도ENG 역시 자회사 정규직 전환의 성공 모델로 꼽히는 사업장이다. 하지만 서울시가 자회사를 설립한 진짜 속내는 따로 있다. 노조는 도시철도ENG 자회사가 서울시의 인건비 절감을 통한 ‘경영 효율화’와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설립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서울시는 2008년 3월 ‘경영혁신 추진을 통한 양공사(서울메트로, 서울도시철도공사) 인력운용 효율화 방안’에 이어, 9월에 ‘서울시 공기업 혁신안’을 발표하며 구조조정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도시철도공사 정원 6,920명 중 10% 감축을 골자로 하는 내용이었다. 결국 공사는 도철ENG를 2008년 12월 30일 자로 설립해 외주 용역 업무를 통합했다.
자회사에는 용역업체에서 일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공사에서 퇴직한 이적자들이 뒤섞였다. 용역업체 출신 노동자들은 경력을 인정받지 못했고, 공사에서 전적한 노동자들은 직급과 호봉을 유지했다. 저임금 구조도 공고하다. 노조에 따르면 ENG에 입사한 신입 7급 사원의 경우 월 급여총액이 200만 원에 미치지 못한다. 입사 만 6년이 된 5급 사원의 임금은 휴일 수당 등을 포함해야 200만 원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다.
지난해 5월 구의역 참사 이후, 서울시는 안전 업무에 대한 대대적인 직영화를 약속했다. 하지만 서울시는 소방설비, 전기, 냉방, 환기 등의 업무만 직고용 전환 대상자로 쪼갰다. 직고용 전환 역시 ‘안전업무직’이라는 직군을 신설해 정규직과 차별적 처우를 꾀했다. 도시철도ENG노조는 현재까지 서울시를 상대로 모든 안전업무에 대한 직군 분리 없는 정규직화를 요구하고 있다.
2006년 KTX 승무원 해고 투쟁 역시 철도공사가 자회사 KTX관광레저(현 코레일 관광개발)로 승무 업무를 위탁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동양시멘트 노동자 19명은 현재까지도 ‘자회사로 취업하게 해줄 테니 소를 취하하라’는 사측의 회유에 맞서 장기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월, 실적 압박과 저임금으로 현장실습생을 죽음으로 내몬 LB휴넷도 LG유플러스의 자회사다.
[출처: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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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차별, 직무급제
문재인 정부는 공공부문 성과연봉제를 폐기하는 대신 직무급제를 도입할 가능성이 크다.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임금체계를 ‘산업 단위 표준 직무급 중심’으로 개편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지난 5월에는 기획재정부가 한국노동연구원에 공공부문 직무급제 도입 관련 연구 용역을 맡겼다.
직무급제는 직무를 분리해 임금, 승진체계, 고용 구조 등을 달리하는 임금체계다. 직무의 가치, 중요도, 난이도 등에 따라 분리 돼 다른 직무와 차별을 겪게 되는 구조다. 직무의 차이가 차별로 고착화되는 셈이다.
# 사례1. 이마트
더불어민주당은 직무급제가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하는 임금체계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애초 직무급제 도입은 재계의 절실한 요구였다.
초창기 직무급제 도입을 요구한 곳은 금융기관이다. 2006년 12월, 당시 황영기 우리은행장은 “직무급제는 임기 안에 못하면 ‘유언’으로라도 남기고 가야 할 인사제도의 미래”라고 호소했다. 당시 감사원은 국책 금융기관 감사를 통해 운전사, 청원경찰 평균 연봉이 6,700만 원, 6,300만 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직무와 관계없이 단순 업무 노동자의 임금이 너무 높다는 여론이 일었다. 비정규직 보호법 통과로 인건비 부담이 커질 것이라는 주장도 이어졌다. 재계는 단순 업무 노동자에 대한 임금 통제가 필요했다.
이듬해 재계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데 인건비 부담이 막중하다며 직무급제 도입을 요구했다. 신세계 이마트는 2007년 비정규직법 시행에 앞서 비정규직 캐셔 5천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들은 직무급제의 적용을 받아 기존 정규직과는 다른 임금을 받았다. 5천 명에 달하는 캐셔 노동자의 임금은 최저임금이 인상되는 만큼만 올랐다. 2017년 3월 기준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받는 정규직은 2만 명에 달한다.
이마트는 2015년 신인사제도를 도입해 직무급제를 공고히 했다. 정규직 관리 사원은 ‘공통직’으로, 캐셔와 매장 진열 노동자는 ‘전문직’으로 통합했다. 김성훈 이마트노조 사무국장은 “승진에서 유일하게 임금 인상을 기대할 수 있는데, 직무급제는 직무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임금이 오를 수가 없다”며 “전문직은 시급 약 6,900원, 단시간 근로자는 6,700원 정도로 묶여있다. 지난해 노조의 요구로 근속수당이 도입됐지만, 여전히 승진 경로는 직무급 안에 갇혀 있다”고 말했다.
# 사례2. 서울대 비학생조교
지난 5월 28일, 고용안정을 걸고 투쟁해온 서울대학교 비학생조교가 학교와 정년 보장에 합의했다. 대학노조는 무기계약직 전환으로 고용안정을 보장받는 대신, 법인직 8급 임금의 88% 수준으로 임금을 삭감하는 안에 합의했다. 현 임금조건에서 최소 18%, 최대 42%가 삭감된다. 비학생조교를 일종의 직무로 묶어 다른 정규직과 임금 차이를 두는 방식이다.
대학노조 서울대지부 송호현 사무국장은 “고용안정이 중요하기 때문에 합의했지만, 직무급제 형식이 될까 우려스럽다”며 “연세대는 과거 대학 이사회가 정규직 인건비의 80%만 주는 소위 ‘행정 비정규 직군’을 만들어 전체 임금이 하향 평준화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어서 그는 “학교 행정업무는 지금도 정규직과 무기계약직 업무에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특정 업무에 우선순위를 매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지금도 대학본부 직원은 업무 가산점이 붙어 퇴직금, 성과급, 연금이 더 높다. 직무급제가 들어서면 이 같은 차별이 더 강화돼 모두가 학부행정실을 떠나 본부로 가려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는 이 같은 직무급제가 신자유주의적 위계구조를 완성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김 활동가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 행정직, 기타업무 등을 분리하자는 것은 ‘교육’이 상호 연결돼 하나의 완성을 이룬다는 원칙을 저버리는 것”이라며 “아울러 각 업무가 ‘필요한 업무’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삭제하려는 시도”라고 지적했다.[워커스 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