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훈(옥천신문 기자)
어떤 광기(狂氣)에 대해 생각해보자. 광기의 전제는 ‘무조건’이다. 당신이 부르면 태평양을 건너서라도 무조건 달려가겠다는 유행가 가사야 다소 낭만처럼 보일 수 있겠다만 무조건이란 결국 비이성과 맹목의 의미다. 그러니까 ‘내가 널 만나려고 태평양을 건너는 건 이성이고 합리고 나발이고 신경쓰지 않는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이라는 의미. (사실 연인관계에서도 이렇게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인 관계는 낭만보다는 공포에 가깝다.)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를 단 하나로 일축한다. 하여 결국 폭력을 잉태한다. “길라임 씨가 내겐 송혜교고 전지현”이라고 여기던 분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선 집회에서 행하는 폭력을 보라. 광기의 결과는 결국 폭력이다.
이 광기는 그저 ‘적폐세력’에게만 있다고 여기는 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대상이 길라임 씨에서 ‘우리 이니’로 달라졌을 뿐 행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기자 개인의 SNS 좌표를 찍어 화력을 집중하고, 구매력으로 언론사를 압박하거나 입맛에 맞지 않는 모든 비판을 가짜뉴스로 이해한다.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으로 세상 모든 가치를 ‘우리 이니’로 일축해 버리는 폭력.
하지만 ‘그래서 문빠들은 안 돼’라고 말하는 당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당신의 일상에 스며든 맹목과 광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국뽕’에 젖어 든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면서, ‘문빠’들의 몰지각함을 욕하면서, 그러니까 황우석과 심형래와 노무현과 문재인, 이덕일, 환단고기, 두유 노 강남스타일을 욕하면서 당신이 던진 그 멸칭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그것은 무엇을 배제했는지. 또 당신은 그 욕설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했는지.
뽕, 빠, 까
뽕, 빠, 까(집단적 광기, 아니 그보다는 광기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들엔 왜 하나같이 된소리가 쓰이는 걸까) 같은 단어들로 지칭되는 집단의 공통된 정서적 근간은 ‘상징적 타자’에게 자기의 욕망을 모두 투사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욕망도 비난도 자기 자신이 아닌 상징의 몫이 된다. 모든 집단 광기의 투사, 상징적 타자를 향한 돌팔매질은 나와 당신, 우리의 뱃속에 숨어 있는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입신양명의 신화, 경제적 성공의 신화, 산업화와 근대화가 빚어낸 먹고사니즘의 신화 같은 괴물. 거기에 성숙하지 못한 정치제도와 반지성주의의 파토스가 양념처럼 버무려져 만들어낸 촌극. 결국 자기 내면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욕망과 배반의 꼭두각시놀음이 부끄러워 은폐하는 광기의 카니발 같은 것.
얼마 전 동네 학교에서 성추행 사건이 일어났다. 이 학교의 교사가 학교 축제에서 학생들에게 부적절한 발언과 신체접촉을 한 사건이다. 취재를 시작하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보도를 자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반면 이 사건을 처음 제보한 학생들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학교의 다른 잘못들도 보도하고 기사화 해달라고 요청했다. 다른 사건들에 대한 제보도 이어졌다.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다소의 잡음은 덮자고 말하는 어른들과, 그런 어른들을 조롱하며 도리어 더 많은 학교의 잘못을 고발하고 성토하는 학생들의 대비. 학교라는 상징에 자기들의 욕망을 투여하는 어른들과 그 상징에서 얻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학교라는 상징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학생들의 대비. 학교의 ‘어른’들은 학교라는 상징이 자기의 명예라도 되는 양 이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학교의 평판이 떨어지면 대학입시 성과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면서 울먹거리던 그를 보면서 실소가 나왔다. 도대체 학교에서 발생한 성추행 사건과 대입결과의 상관관계를 연결지으려면 뇌 내엔 어떤 망상이 가득차야 하는 걸까. 제보를 해온 학생들은 해당 교사의 사소한 잘못을 들추느라 여념 없었다. 수학여행에 가서 그 교사만 다른 층에 묵었으니 특혜라거나, 그 교사만 생활지도가 유독 엄격했다거나 하는.
상징에 집착하면 본질을 잃게 된다. 이 학교의 교사를 비롯한 어른들은 학교의 명예에 집착하는 광기 어린 태도로 폭력을 만들었다. 그들의 언어 어디에도 피해자는 없다. (그들은 실제로 ‘사건을 명확하게 고발하고 나선 이가 없으니 피해자가 없는 셈’이라는 논리를 들고 오기도 했다. 끔찍했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가해 교사라는 ‘악’의 상징에 집착하느라 사건의 본질을 보지 못했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 발생한 젠더 권력의 격차, 교사와 학생이라는 위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주목하지 않았고 그저 ‘가해자’ 개인에게 모든 문제를 치환했다. 그래서 그 악을 치우고 나면 그 자리엔 또 무엇을 채워 넣게 될까.
마찬가지로 박근혜가 떠난 자리에 문재인이 들어 무엇이 달라질까. 문재인이 떠난 자리에 다른 이를 채우면 또 무엇이 달라질까. 상징을 깃발처럼 올리고 그걸 빼앗고 찢겠다며 싸우는 동안 결국 웃는 건 누구일까. 깃발을 숭배하는 집단이 광기를 부리는 동안 배제되는 건 깃발조차 올리지 못한 이들이다. 광기의 집단이 올린 깃발을 찢겠다고 덤비는 일은 오히려 광기가 짓밟은 깃발조차 올리지 못한 이들의 존재를 은폐하는 일이다. 또 다른 광기. 랑시에르의 지적처럼 정치란, 또 삶과 투쟁이란 깃발과 상징들의 싸움이 아니라 그 밑에 깔린 몫 없는 자들의 싸움이어야 한다. 깃발을 보며 미치지 말자. 당신이나 나나 몫이 없긴 마찬가지.[워커스 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