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만(참세상연구소)
자본주의 미래에 대해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 전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2008년 공황 이래로 신자유주의의 지속 가능성은 매우 회의적인 현실이 되었고, 그 후 자본주의 발전에 어떤 가능성도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포스트 자본주의 즉, 자본주의 다음으로 새로운 후기 자본주의가 등장한다는 전망이 있다. 한편에서는 로봇과 인공지능, 디지털 전환에 따른 생산력의 발전이 과소소비를 유발하고, 이윤율 하락과 생산의 한계비용을 0으로 만들어 더 이상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유지되지 못하고 붕괴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다른 한편, 동료생산(peer production) 또는 무료경제 형태가 발전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대체하여 협력, 협동에 의한 새로운 생산관계로의 변화를 전망하기도 한다.1) 상품 생산이 스포츠와 문화 영역을 넘어 지식재 또는 정보재와 같이 인간 두뇌 활동의 창조물에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즉 인간의 두뇌 활동을 상품으로 만들고 (교환가치를 생산하고) 시장을 형성해 이윤을 확대한다. 다시 말해 자본은 인간의 두뇌 활동도 집합적으로 사회화시켜 생산에 집적시킴으로써 더욱 심화된 생산의 사회화로 나아가고 있다. 이렇게 사회화된 생산을 통해 사회화된 이윤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독점하고 사적소유를 보장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강력한 법적 수단을 가지게 된다. 지식재산권제도와 같은 강력한 법적 보호수단이 없으면 교환가치를 상실하는 재화(지식재, 정보재)의 탄생은 바로 생산의 사회화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 대한 모순을 더욱 첨예한 것으로 만든다.2) 그런데, 이런 첨예화된 모순 속에서 기술이 발전하고 공유경제가 확산되면서 자연스럽게 자본주의가 붕괴하고 공유사회가 도래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공유경제론이 놓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잉여가치를 둘러싼 이윤경쟁은 전쟁과도 같다. 전쟁의 승자들이 영토를 지배하고 전리품을 획득하듯이 자본가들은 시장을 독점한다. 그리고 다시 시장의 영토를 확대하고 그것으로 자본주의의 사회적 생산력을 확대해 나간다.
공유 경제의 시장화
공유 경제의 핵심 원리에는 동료생산(peer production)이 자리잡고 있다.3) 동료생산은 시장논리나 조직의 위계로부터 자유로운 개인들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재화의 생산을 위해 각기 동등한 위치에서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생산 모델을 가리킨다. 리눅스, 구텐베르그 프로젝트, 위키피디아, 웹브라우저인 파이어폭스와 같은 것들이 동료생산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여기에 동료생산을 더 확대하여 인터넷 공간을 보다 공개적이고 민주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웹 2.0’은 집단지성, 위키노믹스, 크라우드 소싱과 같은 구호를 내걸며 등장했고, 이들이 모여 공유경제의 근간을 형성했다.
동료생산, 웹2.0, 공유경제와 같이 생산관계를 사회적으로 확대시키려는 경향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자본은 이를 다시 시장과 이윤의 논리로 포획하면서 자본의 공간으로 바꾼다. 마치, 타인의 자본으로도 기업을 운영하게 만든 주식시장제도와 같이 생산의 사회화는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지만 생산관계가 이를 계속 시장체제로 담아내고 있다.
동료생산 모델의 이점(그것은 자기 자산의 무료제공 즉 무급노동이다)을 알아차린 기업들은 동료생산이 창출하고 있는 디지털 공유지를 자신들의 독점적 수익의 원천으로 삼는 전략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웹 2.0 기업들은 디지털 경제를 대표하는 기업들로 성장했다.4) 동료생산의 최선두 주자였던 리눅스는 개발자 내부에 상업화 흐름이 생겨나 분화되었다. 이를 이용한 것이 익스플로러 때문에 망해가던 넷스케이프의 파이어폭스다. 구글의 안드로이드도 리눅스의 오픈소스 운동을 상업적으로 활용해 성공한 모델이다. 비시장, 비독점 경제라 일컫던 공유경제도 우버와 에어비앤비가 점령해 들어왔고 이제 더 이상 공유경제는 남는 자원을 타인과 함께 사용하는 순진한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2008년 금융위기를 보고 은행의 화폐 독점을 비판하며 개발한 비트코인이 또 다른 투기와 불법의 온상이 되고 있는 현실도 마찬가지다. 비트코인이 제도적으로 안정화되더라도 목표로 했던 화폐 독점을 해소하기는커녕 블록체인이라는 암호화 기술을 확대하는 것 외에 주식시장과 같은 투기의 장을 확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을 비롯하여 공유경제 최대 기업이라고 일컫는 우버와 에어비앤비 등과 같이 ICT 영역을 선도하는 모든 기업들은 글로벌 독점 대기업이다. 일찍이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독점은 자본에 내재된 경향이다. 설사 동료생산 형태의 수평적이고 비시장적인 사회적 기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들이 똘똘 뭉쳐 독점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자본주의 생산 관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구글, 페이스북과 같은 또 다른 독점 기업이 될 뿐, 생산관계의 변화는 저절로 일어나지도, 기술 발전의 변화에 따라가지도 않는다. 다만 생산의 사회화 경향에 따른 모순이 확대하고 있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모순이 해결 불가능하거나 적대적 모순관계인지는 여전히 불명확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산의 요구로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전변시켜 낼 수 있다는 것은 근거 없는 낙관일 뿐이다.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사람
계급관계에 의해서 사회의 체제는 바뀐다. 그 외는 모두 조건이고 환경일 뿐이다. 공유경제, 포스트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로봇과 인공지능 등 로봇경제의 발달에 따른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 축소되고 인간은 여가를 즐기면 된다는 케인스적인 유토피아가 기술발달에 따른 자연적인 결과로 도래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제의 디지털 전환과 로봇경제의 확산에 따라 노동시간이 줄고 여가(free time)가 늘어야 하지만 지구촌 그 어디에도 그런 일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노동과 여가의 경계가 흐려져 집에서도 일을 하는 등 정규 노동시간 개념이 없어지고 있다. 생산과 소비의 경계도 모호해지고 있다.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프로슈머(prosumer)는 이제 흔하게 보인다. 심지어 놀이와 노동의 경계도 희미해지고 있다. 플레이버(plabour)는 학자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현실을 반영한 용어이다. 결국 노동의 경계마저 흔들리고 있어 우버와 에어비앤비의 노동자들, 긱경제 하의 크라우드 워커들은 노동인 듯 아닌 듯, 자영업자인 듯 아닌 듯 노동하고 있다. 아룬 순다라라잔 뉴욕대 교수는 정규직 고용이 20세기의 짧은 기간 동안 특수한 고용관계이며 오히려 비정규, 임시 노동이 일반화된 사회가 공유경제 사회라고 주장한다.
생산력의 확대에 따라 노동시간이 줄고 여가가 늘어나야하지만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바로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적으로 노동조합 운동이 후퇴했고 초연결사회가 되고 있다는 오늘에서도 계급적 연대의 힘과 끈이 옅어진 결과다. 거기에 앞선 예와 같이 누가 노동자이고 아닌지, 노동인지 놀이인지, 생산인지 소비인지조차 불분명해지면서 이른바 ‘계급’으로서의 의식이 지체되고 있다.
힘내라 맷!
상품의 생산과 소비는 그 사회의 계급구조와 권력관계를 반영한다. 로봇생산으로 노동자의 임금이 줄고 한계비용이 0으로 수렴되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중단될 수 있다. 이것은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바탕으로 이윤을 수취하고 자본의 확대발전을 위해 재투자하면서 유지되어 왔던 자본주의 시스템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관계가 바뀐다는 점에서 포스트 자본주의의 전망과 같을 수 있지만 결론은 정반대다. 현재의 계급구조가 유지되면 생산관계는 후퇴할 가능성이 더 크다. 특히 노동자 운동이 후퇴하고, 애매한 계급관계 속에 새로운 계급형성이 지체되고 있어 더욱 그렇다.
이윤이 남지 않아도 생산은 계속될 수 있다. 어차피 한계비용은 0에 가까워서 팔리는 것과 무관하게 생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산관계는 잉여가치 형태로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 아닌 노예의 수탈을 통해 단순한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노예경제 같은 것이 된다. 로봇경제도 이와 동일한 생산 방식을 갖게 될 수 있다. 이 경제는 더 이상 교환가치가 가치법칙으로 지배하는 시장경제체제가 아니다.
로봇 소유주들이 (자본의 확대재생산이 가능한 상황에서는) 독점이윤을 긁어모으거나, (자본주의적 생산이 중단된 상황에서) 사용가치의 무한 생산이 가능하게 되면 계급관계의 변화도 예상할 수 있다. 더 이상 생산수단을 둘러싸고 인간이 자본가와 임금노동자로 구분되지 않는다. 영화 엘리시움(Elysium)은 로봇 경제의 계급관계에 대해 하나의 가설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로봇 소유자들은 최신의 현대 기술로 지구와 분리된 완전한 우주 행성을 구축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로봇이 제공하는 사물과 서비스를 사치품으로 삼으며 지구와 분리된 삶을 살고 있다. 나머지 인류, 즉 노동계급은 지구상에서 빈곤, 질병 및 불행 등으로 생계조차 유지하지 못하며 비참하게 살아간다.
이런 엘리시움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결정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누가 생산 수단을 소유할 것인가? 완전히 자동화된 행성에서, 로봇에 의해 생산된 제품과 서비스는 어떻게 소비될 수 있도록 분배될 것인가? 그것은 로봇 소유자 즉 생산 수단의 소유여부에 달려 있다.5) 엘리시움은 주인공 맷 데이먼과 지구의 노동자들이 우주 행성을 점령하여 인류 모두가 행성의 소유권을 갖고 공유하는 것으로 끝난다. 결국 로봇경제에서도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누가, 언제, 어떻게 바꿔 낼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힘내라 맷! 미래가 달려 있다.[워커스 39호]
[각주]
1) 『포스트 자본주의 새로운 시작』, 폴 메이슨, 안진이 옮김, 2017, 더퀘스트
2) 『Digital Labour and Karl Marx』. Christian Fuchs, 2014, New York: Routledge
3) 『네트워크의 부』, 요하이 벤클러, 2015, 최은창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4) ‘동료 생산(peer production)과 시장’, 이항우, 경제와사회 통권 제99호, 2013.9, 153 – 183
5) 마이클 로버츠 블로그 https://thenextrecession.word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