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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2018년 8월 10일Leave a comment45호, 워커스 사전By 채효정

[출처: 김용욱]

채효정(정치학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


하이데거는 공포와 불안의 차이를 그 대상이 있고 없음에 따라 구분한다. 공포를 느낄 때와 불안을 느낄 때 우리는 비슷한 심리상태에 빠지지만 그 두 기분은 전혀 다른 정서적 작동이다. 공포는 분명한 대상이 있다. 따라서 공포의 원인을 제거하면 공포는 해소되고 평온이 찾아온다. 그러나 불안은 대상을 모르는 것이다. 원인을 알 수 없기에 근원적 해소는 불가능하다. 심리적 평온은 불안을 외면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불안은 안개와 같다. 숲속에서 들리는 야수의 울음소리는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지만, 야수로부터 피하거나 그를 죽임으로써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러나 안개는 누가 적이고 누가 내 편인지 구분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든다. 안개를 피하는 방법은 눈을 감는 것뿐이다.

이를테면 군부독재 정권하에서 저항세력이 느끼는 것은 공포다. 독재자에 대한 공포이며 총칼에 대한 공포이며 납치와 고문과 학살에 대한 공포다. 그것은 괴물에 대한 공포다. 그 공포가 클수록 맞서 싸우기도 힘들지만, 종국에는 그 괴물을 없애지 않고서는 해방되지 못함을 알기에 그 대상을 향한 싸움에 나서야만 한다. 반면에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불안을 통해 작동한다. 독재 권력과 달리 시장권력은 시장 질서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죽이지 않는다. 죽건 말건 내버려 둘 뿐이다. 알아서 살라는 것이 시장권력의 통치술이다. 시장의 질서를 반하면 굶어 죽는다는 ‘불안’은 말을 듣지 않으면 죽임당할 수 있다는 공포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으로 개인을 억압한다. 심지어 그 억압조차도 자기 자신의 선택이자 스스로의 명령으로 둔갑시킨다. 시장의 논리는 모든 이들의 일상 속에 공기처럼 스며들어 내재화돼 있다. 삶의 공식이 돼 버린 시장의 공식에 대항해 싸우는 것은 독재자에 맞서 싸우는 것보다 힘들다. 심지어 그 싸움의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불안과 싸우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쳐 떨어져 나간다.

증오와 혐오는 공포와 불안에 대한 심리적 반응과 연관된다. 우리는 억압과 고통의 원인 되는 대상을 ‘증오’한다. 반면 불안의 대상이 원인을 알 수 없듯, 혐오에도 설명 가능한 합리적 이유가 없다. 혐오는 다만 불안한 것에 대한 혐오다. 증오의 배경에는 그 증오가 생겨난 연원이 존재한다. 그러나 혐오의 원인은 각자 다양한 계기를 가지며 사안에 따라 유동적이다. 증오가 이념과 가치의 영향을 받는다면 혐오는 취향의 영향을 받는다. 같은 대상을 향한 집단적 증오에서는–그것이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공통가치를 발견할 수 있지만, 집단적 혐오에서는 그 혐오 외의 다른 공통적 집단가치를 발견하기 쉽지 않다. ‘제주 난민 수용 불가 청원자들’ 속에는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만큼이나 그것이 아닌 다른 사안에선 대립적 입장을 갖거나 다른 지점에서 서로를 혐오할 수 있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다.

증오와 혐오는 권력관계와 방향에서도 차이가 있다. 증오는 아래에서 위로 작동한다. 혐오는 대부분 위에서 아래로 작동한다. 즉 혐오는 권력적 우위에 있을 때만 가능한 감정이며 우월적 시선을 반영한다. 남성우월주의 사회, 여성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에 대해 느끼는 것은 공포이며 증오다. 남성이 여성의 낯선 모습에서 느끼는 것은 불안이며 혐오다. 여혐이란 개념은 성립해도 남혐이란 개념은 성립할 수 없는 이유다. 한국인이나 중국인이 일본을 증오하는 것은 과거 식민지에서의 기억과 경험 때문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일본에 대한 감정은 증오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군대에 갖는 감정은 증오다. 그러나 일본 극우파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감정, 팔레스타인 난민들에 대한 이스라엘 국민들의 감정은 혐오에 가깝다. 혐오는 우위의 감정이기에 인간은 고양이를 혐오할 수 있지만, 고양이는 인간을 혐오할 수 없다. 고양이는 인간을 증오할 수 있을 뿐이다.

혐오는 낯선 대상에 대한 불안의 감정이기도 하다. 공포는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생겨나지만 불안은 경험되지 않은 가능성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런 점에서 공포는 과거로부터 오고, 불안은 미래로부터 오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낯선 미래’라는 미래 담론은 사회에 불안을 주입하는 효과적 통치 수단이다. 불안의 압력이 임계점에 도달해갈 때 낯선 타자적 존재가 출현하면 사회적 스트레스는 극에 달하게 되며 그 낯선 존재가 약자일 때 개인들은 거리낌 없이 혐오를 표출하게 된다. 낯선 타자는 기존의 질서를 위협하는 불안한 존재로 인식되며 그로 인해 혐오의 대상이 된다. 최근의 ‘페미 혐오’나 ‘난민 혐오’, ‘조선족 괴담’ 같은 것은 모두 동일한 맥락성을 가진 사회적 혐오의 사례들이다. 바퀴벌레를 싫어하는 것과 같은 개인들 각자의 혐오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혐오를 공통분모로 하여 ‘바퀴벌레와 같은 인간을 싫어하는 사람들’로 사회화할 때이다. 그런 혐오의 사회화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국가(polis)의 목표는 정의(dike)의 수립이라고 말한다. 정치는 계속 무엇이 우리에게 정의인가를 묻고 수립하는 일이다. 정의는 신의 질서와도 자연의 법칙과도 구분되는 인간 스스로 옳고 그름의 기준을 만들어내어 수립해야 하는 인간의 질서이며, 인간만이 지켜야 할 법이다. 불안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그 정의가 수립되어 있을 때이다. 정치공동체가 공적으로 수립하는 정의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만 증오는 혐오로 전환되지도, 약자를 향해 쉽게 분출되지도 않는다. 그때 사회는 집단적 불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불안은 시장의 도구이다. 시장은 불안을 상품화하며 이윤은 불안마케팅 위에서 탄생한다. 불안과 경쟁의 마케팅은 정치공동체의 시민들을 서로 불안의 대상으로 만들고 상시적인 마음의 내전 상태로 몰아간다. 치안국가는 시민의 불안을 관리하고 통치한다. 통치의 기술은 공포를 불안으로 전환시키며 국가에 대해 시민들이 안전과 질서의 보장을 강력하게 요청하도록 만든다. 동료 시민 전체를 내부공격자 혹은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하는 치안국가는 정치공동체에는 치명적으로 해로우며 반민주주의적인 것이다. 시장국가와 치안국가는 쌍생아다.

노동혐오, 여성혐오, 소수자혐오 등 권력적 약자에 대한 혐오를 멈출 수 있는 길은 권력의 격차를 점점 줄여나가는 것이고 그런 혐오를 ‘불의한 것으로서’ 미워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혐오를 증오하는 것만이 그것을 멈출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혐오를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증오하고 그것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기준으로 행위에 대한 결과론적 단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자’가 아니라 이 혐오가 어디서 생겨났는지를 알고 우리가 무엇을 증오해야 할지 제대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야 올바른 방식으로 올바른 대상에 대해 증오하는 힘을 기를 수 있고, 억압된 분노가 약자를 향한 혐오가 아니라 저항의 형식으로서 표출돼 나올 수 있다.[워커스 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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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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