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 – 참세상 이야기]
노조 파괴를 위해 권력은 어떻게 움직였나
정재은 미디어충청 기자/ 사진 정운
“저기 보이는 금강(아파트)이 광호 형 집입니다.” 유성기업 노동자 고(故) 한광호 씨 시신이 안치된 장례식장에서 불과 500미터 거리에 그의 자택이 있다. “저기 치킨 가게에 광호 형이 자주 갔습니다. 가게 주인과 광호 형은 친구입니다.” 한 씨의 동료 박효종 씨는 손가락으로 가게를 가리키며 뜨문뜨문 말했다.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마치 그림을 그리듯 설명하던 박씨의 표정이 일순간 어두워졌고, 함께 자리에 있던 동료 임영재 씨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박씨와 임씨는 고인이 세상과 단절했던 기간 유일하게 연락이 닿았던 동료들이다. 이들은 수차례 걱정과 그리움을 담아 “형 돌아오세요”라는 내용을 3명이 소통하던 SNS에 남겼다. 한 씨는 3월 17일 새벽 12시 20분 SNS에 “미안하다 사랑한다”고 남겼다. 동료들도 사랑을 고백하며 “제발 돌아오세요”라고 했다. 한 씨는 같은 날 오전 6시 40분께 충북 영동군 양산면 한 공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숨진 채 발견됐다. 임씨는 “광호 형이 ‘쉬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어 여관 등 가 볼 만한 곳을 다녔는데 찾지 못했습니다. 형이 부친의 묘소 인근서 발견됐다고 하는데 내가 왜 그곳에 가 볼 생각을 못 했는지”라고 말끝을 흐리며 자책했다. 마지막까지 고인은 동료들과 진한 우정을 나눴지만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
2007년 야간 노동, 2016년 괴롭히기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한 씨의 죽음에서 다른 동료의 죽음을 기억했다.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이었던 유성기업 노동자 이 모 씨는 야간 노동 등 장시간 노동에 따른 과로사로 2007년 11월 24일 자택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해 29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 씨는 발목 부상 산업 재해로 3개월간 치료를 받고 회사에 복귀했다가 다시 무릎 십자인대 파열로 회사의 동의 아래 수술 치료 뒤 복귀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이 이 씨의 산업 재해를 불승인 처리해 재해 보상은 물론 회사에서 받았던 임금의 30%가 공제되는 처지에 놓였다. 김성민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장은 “그는 임금을 토해 내야 했기 때문에 이를 만회하기 위해 무릎이 아픈데도 3주 연속 야간 노동 등 장시간을 일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노조가 이 씨의 산업 재해 인정과 장시간 노동을 제기해 노사 양측은 일주일 만에 교섭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회사가 사망 사고에 대해 산업 재해 승인을 받도록 하는 데 적극 협조하기로 했고, 유족 보상과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노조는 당시 선전물에 “장시간 노동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우리 스스로 알고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노동조합 사업을 강화해 가겠다”고 밝혔다. 김성민 지회장은 “임금을 더 받기 때문에 야간 노동은 당연하다는 사회 분위기와 조합원의 인식 속에서 2007년 야간 노동을 없애자는 고민을 처음 시작했고, 2009년에야 회사에 이를 요구했기 때문에 조합원들도 고민이 많지 않았다”면서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야간 노동이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하고, 경제 상황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불안정한 임금 체계가 아닌 월급제에 대한 고민이 확장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벌써 9년이 흘렀지만 한광호 씨와 이 모 씨 두 사람의 죽음은 ‘노조 파괴’ 길목에서 만난다. 유성기업 노사 갈등은 2011년 5월 ‘밤에는 잠 좀 자자’며 주간연속2교대제(야간 노동 철폐) 시행과 관련해 교섭을 하다 회사가 돌연 직장 폐쇄를 하고 용역 경비를 대거 투입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노조 파괴 공작이 드러났다. 금속노조와 인권 단체 등은 한광호 씨 죽음의 원인이 2011년부터 6년째 계속되는 사측의 ‘노조 파괴와 노동자 괴롭히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노조원 이정훈 씨는 “회사가 불법으로 지배 개입해 설립한 기업 노조 간부들과 회사 관리자들은 우리를 몰래카메라로 감시했고, 폭력을 행사했고, 징계, 고소 고발, 벌금 청구 등으로 계속 괴롭혔다”고 말했다. 회사는 한 씨가 사망하기 7일 전 한 씨에게 징계위원회 개최를 위한 사실 조사 출석 요구서를 발부했다. 한 씨는 이미 두 차례의 징계와 다섯 차례의 고소 고발을 당했고, 사측 관리자에게 폭행도 당했다. 김성민 지회장은 “두 사람의 죽음은 야간 노동과 노조 파괴의 결과”라면서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2007년에는 금속 단일 노조였다면 지금은 어용 노조가 생겨 절반의 노조로 회사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노조 파괴 작동법
2011년 5월 18일 극심한 노사 갈등이 시작되자마자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이 기획, 실행한 노조 파괴 내용이 구체적으로 담긴 문건이 나왔다. 창조컨설팅이 기업을 비롯해 노동부와 경찰, 검찰 등 정부 기관 인사들에게 전방위적으로 로비한 정황도 담겼다. ‘공권력 투입 요청’까지 적힌 문건을 증명이라도 하듯 6일 만에 경찰 병력 31개 중대가 투입돼 유성기업 모든 노조원을 연행했다. “창조컨설팅이 나선 노조 파괴는 사설 전문 법률 집단과 공권력, 노동부와 검경 등 수사 기관, 폭력적인 용역 경비가 모두 세팅돼서 들어온다”고 다른 노조 파괴 사업장 A 씨는 말했다.
하지만 국가 권력 수장이 나서면서 절차를 거친 합법 파업에 대한 공권력 투입도 정당화되는 효과를 누렸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자동차 부품사 파업에 이례적으로 나서 ‘유성기업 파업, 연봉 7천만 원 받는 근로자의 불법 파업 엄정 대처’ 입장을 밝혔다. 이정훈 씨는 “대통령 한마디에 파업하는 노조는 불법이며, 귀족 노조라는 딱지가 붙었다”면서 “연봉 7천만 원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여론화되면서 헌법이 보장한 노동권은 무시되고 ‘귀족 노동자가 또 파업해?’, ‘불필요한 집단’, ‘피곤한 집단’ 등 노조 혐오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권력 기관인 검찰이 사용자의 부당 노동 행위를 줄줄이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하자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게 선례가 되고 있다고 노동자들은 우려했다. 검찰 수사 결과와 반대로 법원이 노조 측 재정 신청을 인용 결정해 만 5년이 지난 지난해 유시영 대표 등 사측 관계자 8명이 법정에 섰고, 관련 재판이 아직 지방 법원에서 진행되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같은 노조 파괴의 배경에 국내 굴지의 대기업 현대기아차가 있다. 2011년 당시 유성기업의 주간연속2교대제 교섭이 현대기아차의 교대제 교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현대기아차가 유성기업 노사 관계에 관여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2016년 드러난 검찰 수사 자료에서는 “현대기아차가 유성기업 기업 노조 신규 가입자를 높이라고 직접 지시하고, 매주 1회 회사(유성기업), 창조(컨설팅)를 불러서 주간 실적 및 차주 계획, 동향을 면밀히 파악하라”고 주문하는 등 유성기업 노조 파괴에 직접 개입한 증거가 나왔다.
노측 변론을 맡아 온 김상은 새날법률사무소 변호사는 “6년 동안 유성기업 사측은 노사 협상에 임하지 않았다. 직장 폐쇄 이전 노사 대화와 협의, 상식적인 해결 가능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탄압으로 몰아붙였다”고 진단했다. 2011년 임금과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 관련 교섭은 6년째 멈춰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변화가 있다면 현대기아차는 주간연속2교대제가 이미 시행됐고, 먼저 시행하려고 했던 협력사 유성기업은 노조 탄압으로 노동자가 사망해 ‘열사 투쟁’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