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브라질 노동자당…호세프에 맞선 우파의 쿠데타
좌파 정당들과 사회 운동은 호세프 탄핵에 반대
정은희 기자
브라질이 20년 만에 최대의 정치적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집권 노동자당(PT)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의 탄핵 여론이 고조되고 있고, 100~300만 명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호세프는 우익이 민주주의를 짓밟고 자신을 끌어내리려 한다며 사임을 거부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전 대통령도 호세프 탄핵 기도를 쿠데타라고 표현했다.
미국국가안전보장국(NSA)의 도·감청 행위를 특종 보도한 글렌 그린월드가 지난달 18일 미국 온라인 매체 <인터셉트>에 지적한 것처럼, 대다수 서구 언론은 거리 시위에 초점을 맞춰 호세프 탄핵을 정당화하고 있다. 미국 의 유명 앵커 척 토드는 반정부 시위를 “민중 vs 대통령”이라고 묘사하는 내용을 SNS에 올렸고, 이를 <글로보> 같은 브라질 우익 언론이 다시 퍼 나르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 3월 7일 <조선일보>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룰라는 한때 계층을 막론하고 브라질 국민을 하나로 통합시켰다. 그가 이제는 상대를 비방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려 하고 있다”는 분석을 인용 보도했다. <한겨레>도 “이번 선택은 실질적 권력 이동을 의미한다”는 <월스트리트저널>의 분석을 인용해 룰라가 사실상 섭정을 예고했다고 전했다.
최악의 경제 위기 속에서 벌어진 부패 스캔들로 브라질 정부에 대한 여론이 싸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호세프 대통령 탄핵의 정당한 사유도 없고, 룰라 전 대통령에 관한 혐의도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파 사법부와 정치인, 그리고 언론은 한목소리로 호세프 정권에 대한 흑색선전을 유포하며 탄핵과 반정부 시위를 선동하고 있다.
우익 정당과 언론, 사법부의 공세
호세프 대통령 탄핵 시위는 2014년부터 브라질 연방 검찰이 부패 혐의로 국영 석유 회사 페트로브라스를 수사한 ‘세차 작전(Lava Jato)’이 발단이 되었다. 연방 검찰은 호세프 대통령이 페트로브라스 이사회 의장이던 2003~2010년 사이 이뤄진 불법 계약 혐의로 현재까지 50여 명의 여야 정치인을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형량 협상을 통해 페트로브라스 자금이 노동자당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또 노동자당 정치인의 뇌물 수수와 돈세탁 혐의도 제기했다. 룰라 전 대통령도 이 부패 스캔들에 연루됐다. 룰라나 호세프 대통령에 대한 직접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세차 작전’을 지휘하는 세르지우 모루 연방 법원 판사가 3월 16일 룰라와 호세프 대통령 간 전화 통화를 불법 감청한 내용을 언론에 흘리면서 야권의 탄핵 요구에 기름을 부었다. 모로 판사는 하버드 법대 교환 프로그램을 이수했고 미국 국무부가 주관하는 국제 방문 지도자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미국통이다.
야권은 이미 지난해 12월 호세프 대통령 탄핵 절차에 돌입했다. 야권은 연방 회계 법원이 2014년 호세프 정부의 회계가 재정법을 위반했다고 판결하자 대통령 탄핵에 착수했다. 호세프 정부가 국영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실업 보험과 저가 주택 공급 등 사회 복지 사업에 사용한 후 이를 제때 상환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애초 야권은 2014년 대선도 부정 선거라며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이 같은 움직임에 앞장선 정당은 브라질 사회민주당(PSDB)이었다. 이름에 사회민주주의가 들어가 있지만, 이념과 정책으로 보면 우익 정당이다. 모루 판사도 사회민주당과 가깝다. 그는 지금 브라질 최고 인기 스타가 됐다.
노동자·빈민의 대통령 룰라의 노동자당, 격랑 속으로
탄핵은 야권과 사법부 그리고 우파 언론이 주도하고 있지만, 거리 시위는 노동자당에 대한 대중적인 배신감과 불만 때문에 확산했다. 노동자당은 1980년 창립한 라틴 아메리카의 좌익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노동자당은 당시 민주화 운동을 선도한 노동운동의 정치적 성과였고 국제적으로도 새로운 좌파 정당의 모델이었다. 특히 창당을 주도한 룰라 전 대통령의 카리스마도 노동자당의 발전에 일조했다. 빈민층 출신의 룰라는 10살 때까지 글을 읽지 못했다. 청소년 시절 학교를 중퇴하고 일찍 노동자가 됐다. 이후 노동자 운동에 투신한 그는 독재 시절 구금되기도 했다. 브라질 하층 계급에게 룰라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2002년 집권 후 볼사 파밀리아 등 경제·사회 개혁안을 추진하면서 룰라에 대한 빈곤층의 지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실질 최저임금이 70% 가까이 올랐고, 비록저임금 노동이었지만 2000년대엔 2100만 개의 신규 일자리도 생겼다. 룰라는 브라질 기득권층에겐 위협이었지만 83%라는 높은 지지율 속에서 퇴임했다. 룰라의 후임자 호세프 현 대통령도 2010년 약 12%포인트 차이로 대선에서 승리했다. 2006년 약 20%포인트 차로 이긴 룰라보다는 낮은 수치다. 2014년에도 호세프는 약 3%포인트 차이로 재임했다.
그러나 노동자당의 정체성은 집권을 전후로 퇴색해 갔다. 집권 전에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다양한 정파가 연합한 운동 정당이었으나 집권 뒤에는 사회민주주의의 제도 정당으로 우경화했다. 또 선거 승리와 의회 내 정책 협상 등을 위해 부패한 정치 문화에 빠져들었다. 브라질 출신 알프레도 사드 필호 영국 런던대(SOAS) 교수는 미국 사회주의 언론 <자코뱅>에 “브라질 ‘민주주의’에서 정치를 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고 지적했다. 브라질 하원에서 노동자당 비율은 2010년 17.1%, 2014년에는 13.3%였고 룰라 시절인 2006년에도 15%에 불과했다.
게다가 집권 2기를 전후로 세계 경제 위기가 브라질 경제를 강타하면서 호세프 정부의 지지율은 거침없이 추락했다. 호세프는 애초 룰라로부터 급속히 성장하는 경제를 물려받았다. 브라질은 지구적 위기 속에서도 힘차게 튀어 올랐다. GDP(국내총생산)는 2010년 7.5%까지 늘어났다. 호세프 정부는 투자와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금융 분야에도 적극 개입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 경제는 비틀거렸고, 중국의 성장은 정체했으며 소위 원자재 슈퍼 사이클(20년 이상의 장기적인 가격 상승 추세)은 사라졌다. 원자재 가격 하락에 따른 충격과 미국 금리 인상으로 브라질 통화 헤알화 가치는 지난해 달러 대비 31% 하락했고 실업률은 최근 6년 내 최고치인 7.9%, GDP 성장률은 마이너스 3.7%를 기록했다. 브라질 정부도 긴축 정책을 시행하면서 민심은 이탈해 갔다. 한편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이어 월드컵 등 대형 행사에 예산을 집중 배치했고 급기야 2013년 상파울루에서 버스비 인상에 맞선 대중 시위가 터져 나오면서 호세프 정권에 대한 첫 번째 경보음이 울렸다.
좌파 정당들과 사회 운동은 쿠데타 반대
위기 의식은 노동자당 내부에도 팽배했다. 룰라 전 대통령은 정부의 긴축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는 한편 당내 ‘정치 혁명’을 촉구했다. 또 2018년 대선에 다시 출마할 것이라고 밝혀 왔다. 그가 다시 대선에 나오면 당선 가능성이 크다. 브라질 선거 제도는 ‘의무 투표’라 다수인 빈민층이 룰라를 지지하는 한 소수의 상류층이나 중산층이 지지하는 우파가 승리하기 어렵다. 우파가 두려워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지금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는 우파는 1963년 선거로집권한 조앙 골라르트 브라질 좌파 정부를 이듬해 쿠데타로 전복한 군부 지지 세력과 같다. 브라질 기득권층과 우익 언론은 군부 쿠데타와 독재를 지지했다. 이후 21년 동안 이어진 군부 독재는 잔혹했다. 이들이 반대자에게 사용한 고문 기술은 미국과 영국에서 배웠다. 브라질 진상조사위원회는 2014년 미국과 영국이 브라질 심문관에게 고문 기술을 가르쳤다고 밝혔다. 미국은 부정하지만 브라질 군부 쿠데타 음모를 지원했다는 여러 기록이 계속 나오고 있다. 호세프 대통령도 군부의 희생자였다. 그는 1970년대 반정부 좌익 게릴라로 활동하다 투옥돼 고문당했다. 브라질에서 계급과 인종적 모순은 지속되고 있다. 브라질 기득권층은 대개 백인 부유층과 소수 중산층이다. 우파는 현재도 군부의 개입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군부가 움직일 가능성은 적다고 알려졌다.
호세프 정권의 위기는 2009년 온두라스, 2012년 파라과이에 이은 의회 쿠데타 경로와 닮았다. 베네수엘라에서도 니콜라스 마두로 좌파 정권에 맞서 우파 야권의 탄핵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알프레도 사드 필호에 따르면, 현재 브라질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은 간단하지 않다. 호세프는 정치적 지지와 자본의 신뢰를 잃었고 공직에서 제거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우파가 룰라까지 투옥하려 한다면 그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호세프와 룰라가 정치 무대에서 제거된다고 하더라도 우파가 현재 브라질 내 정치적 안정이나 경제 성장을 복원할 수는 없다. 노동자당과 다른 좌파 정당, 많은 사회 운동 단체는 쿠데타에 맞서 호세프 정권을 지지하고 있다. 남미 정부 간 경제 협력체 남미공동시장(MERCOSUR)도 탄핵은 브라질 헌법과 제도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워커스 4호(2016.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