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
문화 평론가로서 중요한 모든 세상사에 끼어들려 한다. 운전 면허, 신용 카드, TV가 없다.
총선 직후 보수 정당들은 모두 민생을 내세우고 있다. 민생이란 보수 정당들이 평소에는 방치해 두었다가 정치적 곤경에 몰리게 될 때에서야 마지못해 내보이는 가짜 알리바이다. 한국 보수 정당들은 민생이란 말을 립서비스로만 쓴다. 한국의 보수 정당들은 불과 몇 년 전까지도 민생이라는 말 뒤에 ‘투어’라든가 ‘탐방’이라는 말을 붙여 썼다. 생활과 생계를 어렵게 꾸려 나가는 당사자인 대다수의 국민-유권자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건방지고 방자하며 발칙한 발상인데, 보수 언론들도 이에 대한 문제 의식 없이 ‘민생 투어’라든가 ‘민생 탐방’이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썼다.
이번 총선은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과 같은 보수 정권, 그리고 특히 신자유주의적 보수 정권으로는 한국 경제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국민들 대다수가 이미 깨닫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콘크리트 지지층이라고 표현되던 박근혜 지지자들 일부가 국민의당 내지는 더민주당을 지지한 것이다. 앞으로 새누리당에서는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보수’를 지향하는 정파가 헤게모니를 잡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국민들이 자기네를 좋아해서 찍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 스스로도 잘 아는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소위 ‘민생’을 둘러싼 정치적 경쟁을 하면서 좀 더 우경화할 가능성이 크다. 김종인이 소위 구조조정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 바로 그러한 예다. ‘짜르’라고 불리는 김종인의 파쇼 스타일은 박근혜와 전혀 다를 바가 전혀 없다. 나는 이 두 정당을 개인적으로 ‘덜민주당’ 및 ‘궁민의당’이라고 부른다.
한편, 안철수가 내세우는 ‘새 정치’란 그 내용이 정말 아무 것도 없다는 점에서만 말 그대로 ‘새’ 정치다. 과거의 보수 정당들은 뭔가 조금은 다른 새 것을 덧붙이기는 했던 것이다. 예컨대, 노무현의 국민 ‘차며’ 정부 슬로건과 박근혜의 경제 민주화 사기질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튼 합리적 보수 분파가 패권을 잡는다고 하더라도 새누리당은 물론이고, 덜민주당, 궁민의당 등과 같은 보수 정당들로서는 한국 경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가 없다. 한국 경제는 저성장-고령화의 구조적 덫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일부 종이 신문들은 이 구조적 문제의 해결 전략을 통일에서 찾으려고 한다. 보수지는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신문들도 사설에서 이런 관점이나 전망을 가끔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노동력 및 상품 시장의 창출이라는 명백한 이점에도 불구하고, 독점 자본이 노골적으로 통일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통일이 될 경우, 이제까지 남한 사회에 부과해 왔던 바와 같은 동일한 정도의 정치적 헤게모니 및 산업적 기율, 그리고 사회적 훈육 시스템과 통제력을 한반도 전체에 걸쳐서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다는 보장을 독점 자본으로서는 쉽사리 얻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 체제를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사회주의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향수가 아직 엄존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식의 신자유주의적 자본 축적에 대한 중국 민중의 사회적-이념적 저항은 의외로 강력하고 끈질기다. 북한 민중은 중국 민중보다 더욱 더 끈질긴 정치-사회적 저항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예컨대 삼성으로서는 통일을 통해서, 더 저렴한 노동력과 새로운 상품 시장을 확보할 수야 있지만, 반면에 삼성 노동자에 대해서, 그리고 한국 민중 전체에 대해서 삼성이 휘두르던 정치-사회적 헤게모니 및 산업적 규율 통제력을 잃어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노조도 인정해야 하고, 백혈병 노동자들의 산업 재해도 인정해야 하는데, 삼성으로서는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현재 삼성이 유일하게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란 M&A, 그것도 자기네 그룹 안에서만 하는 M&A뿐이다. 그 일이 끝나면 재빨리 이건희에게서 호흡 장치를 떼어 버릴 것이다.
‘덜민주당’과 ‘궁민의당’이 소위 구조조정이라는 사안에 대해 적극적, 긍정적으로 나서는 것은 우리에게는 크나큰 도전이 된다. 이제까지 한국 사회에서 구조조정이란 노동자들을 일방적으로 해고하는 것만을 뜻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 또는 독점 자본가들이 제대로 책임지는 일은 전혀 없었다.
구조조정을 위한 최소한의 전제 조건은 해외 도피 중인 김우중을 잡아들이고, 삼성이 저지른 온갖 불법적이고 반사회적인 악행에 대해 엄단하는 것뿐이다. 독점 자본에 대한 전 국민적, 전 민중적 통제 없는 구조조정이란 이미 독점 자본이 진행시키고 있는 노동자 대량 해고에 대해서 정치적 기름칠을 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
민생이 보수 정당의 가짜 알리바이란 얘기는 바로 이런 사정을 말한다. 한국 경제가 이렇게 개판이 된 것은 보수 정당들 책임이다. 일종의 구조적 경제 범죄를 저질러 온 보수 정당들이 마치 범죄 현장에 없었다는 듯이 이제 민생이라는 가짜 알리바이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재벌에 대한 통제 없이는 민생이든 경제 민주화든 간에 결국 립서비스에 불과하다.(워커스 8호 2016년 5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