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중심은 견디지 못한다.” 러시아 혁명 발발 2년 뒤이자, 1차 세계대전 종전 1년 뒤인 1919년에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쓴 <재림>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데 중심이 못 견디면 체계는 해체될 수밖에 없다. 예이츠가 당시 <재림>을 쓴 것은, 그가 인류문명이 2000년을 주기로 발전과 쇠퇴를 반복한다고 보는 ‘가이어(gyre) 이론’을 믿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시의 마지막 두 행에서 “어떤 거친 짐승이 끝내 제 시간을 맞아/태어나려고 베들레헴으로 구부정하게 걸어가는가?” 하고 묻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다면, 시인이 당시 상황을 두려움 속에 보고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보수적 성향의 그에게 수백만 목숨을 앗아간 세계대전, 세계질서를 뒤집은 혁명이 일어난 것은 인류문명을 뒤흔들 ‘거친 짐승’의 행보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예이츠의 시가 문뜩 머리에 떠오른 것은 최근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 때문이다. 다음은 <재림>의 첫 두 행이다. “넓어지는 나선형으로 돌고 또 도니/ 매는 매부리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오늘날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꼭 이런 것 같다. 매부리가 선 곳은 나선의 중심일 터, 그러나 매가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나선 운동의 장력을 벗어나며 비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에서 그려지는 상황이 예이츠가 살았던 20세기 초에 일어난 체계 해체에만 적용될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속한 세계 또한 지금 뿌리째 무너져 내려앉는 중이다. 지난 40여 년 간 세계 체계를 관리해오던 신자유주의 질서가 해체되고 있지 않은가.
신자유주의가 더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계경제가 8년 넘도록 위기를 겪고 있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2008년 베어스턴스, 메릴린치, 리먼브라더스 등 세계 5대 투자은행 가운데 3개가 매각되거나 파산한 미국 발 금융위기로 시작된 세계경제 위기는, 이후 유로존 위기, 신흥국 위기로 이어지며 회복되기는커녕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주요 자본주의 국가가 은행을 살려내고 경기를 회복시키려고 ‘제로금리’, ‘양적 완화’라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했지만 어디서도 약발이 듣지 않는다.
이런 위기를 반영하는 듯 신고립주의가 국제질서의 새로운 원리로 부상하고 있다. 신고립주의는 신자유주의가 그동안 금과옥조로 앞세워온 세계화, 다시 말해 자본(특히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운동을 위해 강화해온 국제질서와는 반대되는 경향에 해당한다. 지난 6월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가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된 데서 볼 수 있듯이, 개별 국가의 고립주의 추구는 이제 엄연한 현실이 되었다. 물론 신자유주의는 아직도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유럽에서 그런 노선을 대변하는 트로이카(EU집행부, 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도 영국의 EU 잔류를 강력하게 희망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런데도 브렉시트가 결정된 것은 이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는 다른 국제질서에 대한 요구가 커졌고, 그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만만치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탈퇴를 선택한 사람들은 대체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 특히 노동자였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지역별로 보면, 상대적으로 부유하거나 사회보장이 좋은 런던이나 스코틀랜드는 잔류를 선택한 반면,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피해를 본 잉글랜드는 탈퇴를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립주의 현상은 미국에서도 확인된다. 금년도 미국 대선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진보적 성향의 버니 샌더스가 민주당 후보 결정 과정에서 의외의 선전을 했고, 공화당에서는 ‘듣보잡’ 수준의 도널드 트럼프가 후보 자리까지 거머쥐었다는 것일 게다. 샌더스와 트럼프는 한쪽은 사회주의에 가깝고 한쪽은 친기업 노선이라는 점에서 크게 대비되지만, 둘 다 미국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한다는 미국중심주의 또는 고립주의를 취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은 반통상, 반자유무역 노선을 피력한다는 점에서 모두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그런 점에서 ‘고립주의자’인 것이다. 물론 친기업 노선에다 인종차별주의자이기도 한 트럼프와 사회주의 성향의 샌더스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고립주의가 영국과 미국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최근 들어와서 유럽 전역에서 각종 민족주의가 창궐하고 있는 것도 같은 흐름일 것이다.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등에서 급속도로 세를 얻고 있는 극우 정당들은 예외 없이 자국 중심주의를 내세우고 있고, 이는 중동 난민 유입을 계기로 외국인혐오증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영국에서 애초에 브렉시트를 주도한 것도 독립당(UKIP)이었다.
좌판본이든 우판본이든 신고립주의는 그동안 자본주의 체계를 관장해온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반발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매부리 소리를 듣지 않는 매가 나선 운동을 벗어나 날아가 버리듯이, 고립주의는 세계 체계를 해체시키는 원심력으로만 작용할 뿐이라는 점이다. 현 단계 세계 체계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문제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헤게모니는 위기에 처할수록 포악한 모습을 띠곤 한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다. 신자유주의 위기 국면에서 나타난 신고립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의 트럼프, 영국의 독립당, 유럽의 극우 정당들은 한 결 같이 소수자, 외국인 같은 타자에 대한 극단적 배제 태도를 띤다는 점에서 헤게모니 위기 국면에서 예상되는 우려스런 양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에서 최근 박근혜 정권이 보여주고 있는 언어도단의 행태도 그런 양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신고립주의가 신자유주의 위기의 해결책이 아니라면 어떤 세계질서가 필요한 것일까. 새로이 요구되는 세계질서의 원리가 고립주의일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신자유주의가 추구해온 세계화여서도 안 될 것이다.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신자유주의와 신고립주의는 배제를 강령으로 삼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새로운 체계는 그와는 반대로 소수자 타자와의 호혜적 삶을 허용해야 하고, 연대에 기초한 국제주의를 원리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만 원심력에 의해서만 작동하지 않고 구심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세계 체계 해체 국면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그동안 매부리로 군림해온 신자유주의 세력을 대체하고, 국제연대가 가능한 새로운 매부리-매 관계를 수립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우리는 고립주의가 아니라 국제주의를 지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