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하다. 지금까지 왜 열심히 살았는지 모르겠다”는 한탄이 들린다. ‘우리 사회가 그래도 합리적일 것’이라는 믿음이 철저하게 깨져서다. 이토록 비합리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때로는 억대의 빚을 깔고도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거나,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도 “여기는 스쳐 지나가는 일자리야”라고 자기 위안을 하거나, 아니면 아예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냥 산다. 그렇게 현실을 덮고 살다 보니 마음에는 불안이 가득하고, 스트레스와 우울증,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 불특정다수에 대한 분노가 가득하다. 이렇게 우리는 현실에 눈을 감고 자기 최면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우리의 자기 최면을 철저하게 깨버렸다. 이 사회가 얼마나 비합리적인 사회인지 철저하게 드러났다. 이제 우리는 냉정한 현실 앞에 서게 됐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다시 들여다본 현실은 참혹하다. 월 200만 원 미만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절반을 넘고, 대다수 자영업자는 그만큼의 수입도 안 된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가까스로 일자리를 구한 이들은 성과의 압박에 시달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일터에서 한 해 2,400명이 산재로 목숨을 잃는다. 담뱃값도 오르고 세금도 오른다. 수학여행길에 올랐던 학생들은 정부가 구조하지 않아서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사드 배치나 개성공단 폐쇄, 국정교과서, 한일협정과 같은 중요한 정책이 시민의 의견을 듣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결정되고,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을 억압한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거리로 나온 이들을 향해 경찰은 물대포를 쏘고 그렇게 목숨을 잃은 농민의 시신을 부검하겠다고 덤빈다.
노동자와 시민이 눈을 감고 버텨오는 동안, 전경련은 박근혜-최순실이 만든 미르-K스포츠재단에 800억 원의 돈을 바치고, 자신의 요구사항인 비정규직 확대, 의료민영화를 관철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과 재벌들은 자신의 이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침묵으로써 동조했다. 때로는 억압적 방식으로, 때로는 협력적 관계로 포장되어 있지만 해방 이후 모든 정권은 보수언론에 의탁했고 재벌과 서로 이익을 주고받으며 노동자를 쥐어짰다. 그렇기 때문에 재벌과 보수언론에는 ‘어떤 인물’이 권력을 갖고 있는가가 중요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그 권력을 바꾸거나 혹은 바뀐 권력과 협력 관계를 유지했을 뿐이다. 그들의 오랜 동거가 만들어낸 삶이 바로 지금의 ‘헬조선’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유가 권력자들의 세력 싸움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현재 노동자와 시민의 분노는 정부와 재벌, 보수언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려고 한다. 이것은 ‘분노’이지만 감정에 사로잡힌 분노가 아니라 ‘현실을 인정하게 된 이들의 허탈함’이며, 현실을 이렇게까지 만든 데에 대한 자책이다. 보수언론은 ‘최순실’의 과한 행적들을 샅샅이 파헤치며 이 냉정한 분노를 감정적인 분노로 만들려고 한다. 한 사람에게 감정적으로 집중하여 그가 철저하게 몰락하게 될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얌전히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노동자와 시민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현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진짜 바꿔야 할 것은 이 현실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 현실이 어떻게 바뀔 수 있을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므로 방황할 뿐이다.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켜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대통령 한사람이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을 유지했던 기반들이 무너져야 한다. 그래서 박근혜 ‘정권’ 퇴진이다. 국회에 ‘탄핵’을 해달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 직접 요구하니 대통령은 스스로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것은 능동적인 주권의식의 발현이다. 그래서 박근혜 정권 ‘퇴진’이다. 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연관된 이들이 이 사태의 수습자로 나서지 않도록 하겠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절차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시민이 원하면 퇴진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허울뿐인 절차만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살리는 길이며, 노동자와 시민이 주권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박근혜 정권 퇴진’을 현실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물론 여기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탄핵’은 박근혜 대통령이 내려간 이후의 삶을 다시 기존 질서인 국회에 의탁하는 것이지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것은 이후 사회를 어떻게 구성할지 우리가 결정하겠다는 ‘지향’을 포함하는 것이다. 퇴진 투쟁 과정에서 많은 이가 거리로 나올 것이고 광장이 열릴 것이다. 그렇다면 그 광장에서 토론해보자. 민주주의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역사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평화는 무기로 가능한가 대화로 가능한가,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정책이 필요한가, 검찰은 어떻게 개혁할 수 있는가, 언론은 어떻게 해야 바뀔 수 있는가. 우리 사회의 쟁점이 된 많은 문제에 관해서 토론하고 그것을 정책으로 발전시키고, 정치적 힘으로 전환해서 시민이 삶의 주체가 되는 정치적 경험을 만들어보자.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다. 때로는 이 현실을 회피하고 싶다. ‘지금의 상황은 그저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불과하며 그를 처벌하면 우리 사회는 다시 합리적인 사회로 돌아갈 것’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때로는 순응하고 싶다. 하지만 이미 현실을 들여다보았다면, 국민주권이란 허울뿐이며 이 사회가 권력자들의 카르텔에 의해 지배됨을 깨달았다면, 우리가 고통스럽게 생존을 위해 분투해왔던 것도 권력자들의 정책적 선택의 결과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더 이상 회피할 수는 없다.
이제 우리 힘이 얼마나 강한지도 확인해야 한다.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 힘을 확인하는 첫걸음이다. 그리고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고 생명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업의 탐욕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지, 비하와 혐오와 차별이 없는 세상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퇴진 투쟁의 열린 광장에서 미래사회의 전망을 토론하고 대안을 만드는 것이 우리 힘을 확인하는 두 번째 걸음이다. 우리 사회는 바뀔 수 있다. 우리는 충분히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