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던 스위스의 ‘보편적 기본소득’ 개헌안이 지난 6월 5일 시행된 국민 투표 결과 부결되었다. 이번 안건이 부결되리라는 것은 사실 투표 이전에 이미 예상된 일이다. 하지만 막상 나온 반대표 76.9%는 예상을 뛰어넘는 수치로, 스위스 국민 절대다수가 기본소득안을 수용할 뜻이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런 결과가 나온 데에는 기본소득안이 통과될 경우 최근 유럽으로 유입되는 난민이 대거 스위스로 몰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적잖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기본소득안을 발의해 국민 투표를 끌어낸 사람들은 투표 결과를 놓고 오히려 크게 고무된 모양이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스위스 챕터의 대표 랄프 쿤디그는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이처럼 중요한 의제에 대해 광범위한 공적 논의를 끌어낸 것 자체가 승리”라고 자평한 것이 좋은 예다. 기본 소득을 지지하는 경제학자인 세르지오 로시는 “5명 가운데 1명이 무조건적 기본소득에 찬성표를 던졌으니 그 자체로 성공”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찬성 23%의 성과를 자축하는 파티를 스위스 로잔에서 열었다는 기본소득 지지자들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패한 투표 결과를 놓고 지지자들이 자축 파티를 열었다는 것은 자신의 운동이 이제 더 큰 관심을 끌며 전개될 것이라는 자신감과 기대 때문일 것이다.
사실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는 이제 더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는 석유 자원이 풍부한 미국 알래스카 주처럼 단일 국가 일부 지역의 특수 상황을 활용해 기본소득을 제공한 경우가 있었지만, 이제는 국가 차원에서 보편적 기본소득 도입을 검토하는 곳도 적지 않다. 유럽 몇몇 나라의 최근 동향이 특히 관심을 끈다. 유럽에서 보편적 기본소득 도입을 고려하는 나라는 스위스만이 아니다. 핀란드도 복수의 모델을 만들어 무작위로 뽑은 1만 명에게 2년 동안 기본 소득을 제공해 효과를 확인한 뒤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실시할지를 결정할 예정이다. 네덜란드는 네 번째로 큰 유트레흐트를 비롯한 19개 도시에서 복지 혜택을 받는 시민을 대상으로 기본소득 실시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영국에서도 최근 제1 야당인 노동당이 보편적 기본소득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할지를 검토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영국 노동당은 자동화로 인해 줄어드는 일자리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기본소득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 바 있듯이 인공 지능을 포함한 과학 기술이 얼마나 고도로 발전했는지에 대해서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노동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다. 노동당의 부대표 톰 왓슨이 최근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2001년 이후 영국에서는 자동화로 인해 8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고, 10년 안으로 1100만 개의 일자리가 자동화될 것이라고 한다. 비슷한 시기 노동당 그림자 내각(예비 내각) 재무장관 존 맥도넬이 노동력의 로봇화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보편적 기본소득 지지를 면밀하게 검토할 계획임을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의 일이다. 맥도넬은 노동당 당수인 제레미 코빈의 오른팔로 경제 정책을 맡아 이끌고 있다. 영국 노동당 고위 인사들의 최근 발언을 보면 자동화로 인해 노동의 미래가 불안해질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고, 기본소득을 주요한 대안으로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사정은 물론 다르다. 기본소득이 아직은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부상하지 못했고, 대중의 관심도 덜하다. 국내에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를 중심으로 기본소득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고자 하는 활동가나 연구자, 그리고 조직의 노력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외국과 달리 기본소득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낮다. 원내에는 기본소득을 정책으로 도입하려는 정당도 없다.
하지만 한국이라고 기본소득과 같은 정책의 필요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의 노동 시장은 지금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유연화되어 있고, 비정규직이 850만 명이 넘는다. 불안정 노동이 초래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기술 발달과 함께 노동력의 로봇화도 큰 몫을 차지한다. 지금 한국의 자본은 조선, 해운 산업 부문의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어서 노동자들이 대량 감축될 예정이다. 이번 구조조정은 기본적으로 조선업과 해운업의 불황 때문으로 알려졌지만, 노동력의 자동화나 로봇화와도 관련이 있다.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찬반이 분분한 것이 사실이다. 국내에서는 주로 보수 언론이 앞장서서 포퓰리즘적 환상이라는 비난을 퍼붓지만, 진보 진영에서도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스위스의 국민 투표 과정에서도 유력 노동조합이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입장을 낸 바 있고, 핀란드에서도 가장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세력은 노동조합과 사민당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보 진영이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것은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수립된 임금 체계와 기존 복지 체계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 일부는 개인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은 기존의 시장 질서를 온존시킬 뿐이라는 지적도 내놓고 있다. 그럴 경우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의도와는 다르게 자본주의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는 꼴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알파고의 위력이 증명한 바 있듯이, 이미 많은 분야에서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기 시작한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하게 되면, 노동에만 의존한 임금 체계와 기존 복지 제도를 통해 안녕을 확보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불안정 노동이 만연하고, 일자리 잃은 사람의 빈곤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은 복지를 기존의 방식 이외의 방법으로도 확보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 준다. 이때 한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이 기본소득이다. 단, 그 현실적 효과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은 만큼 기본소득의 도입 여부는 득실을 면밀하게 따져야 한다. 기본소득은 물론 임금과 복지에 대한 논의가 더욱 깊이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워커스15호 2016.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