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의 속사정…링 위에 선 힐러리와 트럼프
미국 대선 돌아보기 1_쟁점과 전개 과정
김선철(에모리대 한국학)
세 번의 대통령 후보 TV 토론과 한 번의 부통령 후보 토론을 마치고 바야흐로 2년 가까이 지루하게 끌어왔던 미국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최근 제임스 코미 FBI 국장의 개인 돌발행동으로 다시 촉발된 힐러리 클린턴 이메일 유출 사건으로 클린턴의 안정적이던 지지세가 흔들리고 있다. 그럼에도 11월 1일 현재 많은 선거예측 기관들은 여전히 평균 8:2 정도로 클린턴의 우세를 점치고 있다. 선거를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이 사건의 의미나 여파는 오로지 선거결과가 나와야만 알 수 있을 듯하다. 이 글에서는 누가 이길 것인가의 물음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각종 뉴스거리를 만들어냈던 지난 미국 대선의 이슈와 전개과정을 돌아보고자 한다.
2016년 미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유권자들의 기존 정치권에 대한 반감이 유례없이 크게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러한 반감은 공화-민주 양당 경선과정에서 당시로써는 예상치도 못했던 도널드 트럼프나 버니 샌더스와 같은 외부자(outsider)의 돌풍으로 드러났고, 트럼프와 클린턴 간 본격적인 선거전이 시작되면서는 역사상 유례없이 비호감도가 높은 두 대선 후보가 경쟁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비호감도가 30%가 넘는 후보는 이기기 힘들다는 대선의 법칙에도 불구하고, 비호감도 4~50%의 클린턴과 5~60%의 트럼프 간의 격돌로 미국 유권자는 역사상 최악의 선택지를 앞에 두고 이후 4년 미국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떠안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 클린턴 두 후보는 잇단 스캔들에 시달려야 했다. 클린턴은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공적인 이메일을 사적인 계정과 서버에서 관리했던 문제 때문에 줄곧 비판 받아왔다. 그런데다 빌 클린턴과 함께 운영하는 클린턴 재단을 통해 이해관계가 있는 러시아나 중동국가들로부터 기부를 받는 등 부정한 거래가 오갔다는 의심을 받으며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스캔들은 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계속되는 트럼프의 막말과 여성비하 발언에 더해 10월 들어 그로부터 성추행당했다는 여성이 줄줄이 나오면서 여느 대선 같았으면 당선 가능성을 현저히 떨어뜨렸을 클린턴의 문제들은 트럼프 스캔들에 상대적으로 가려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40%대 이상의 지지율을 받아왔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정치지형과 대선 과정에서 주요한 이슈가 어떻게 드러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정치지형과 주요 이슈
1980년대 이래 미국의 정치 구도는 크게 두 가지 축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나는 연방정부의 경제 및 사회영역 개입의 정도 혹은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둘러싼 갈등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진보적일수록 교육, 의료, 교통, 환경부문 등 공공성을 담지하는 부문에서 연방정부가 큰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하는 반면, 보수적일수록 모든 것을 시장의 논리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다(전기, 통신 등 기간산업의 국가관리 문제는 적어도 현재의 양당 구도에서는 이슈가 아닌 지 오래되었다). 여기에 더해 보수로 갈수록 중요한 정책의 결정권을 연방정부가 아닌 주 정부가 가져야 한다는 입장인데, 이는 오랜 분권과 연방제 국가를 이뤄왔던 미국의 정치 문화적 맥락을 반영한다. 또 하나 중요한 지점은 1980년대 소위 “문화전쟁 (culture war)”이라 불린 가치관의 충돌로 촉발된 갈등 축이다. 여기에는 낙태와 여성권, 동성애, 흑인 등 성과 인종 같은 인권적 이슈에서부터 총기소유와 환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문화적 이슈에 관한 입장의 차이가 있다. 공화-민주 양당은 각각의 이슈에 뚜렷한 차이를 보여 왔다.
이런 이슈는 이번 대선에서도 중요하게 떠올랐는데, 대선으로 이어지는 정세에서 딱히 어느 당이 더 유리하다고 할 수는 없다. 따져 본다면 공화당에 약간 유리했던 상황이라고나 할까. 정치적으로는 상하원 모두 공화당이 다수당인 “여소야대” 상황에서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공화당의 공격이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국내 정책으로는 오바마의 의료보험 정책을 둘러싼 공방이 가장 거셌는데, 공화당이 집권한 주를 중심으로 연방정부의 새 의료보험의 효율적이고 광범위한 적용을 막으려는 시도가 잇달았다. 가입자의 부담 증가를 약점 잡아 다시 연방정부가 제공하는 의료보험을 비판하는 공세를 펴오기도 했다. 그 배경에는 물론 앞에서도 살펴봤듯 연방정부 개입을 통한 공공서비스 제공을 부정하고 시장주의를 모든 문제의 해법으로 파악하는 공화당과 미국 보수의 굳건한 철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가장 거센 보수의 공격은 외교부문에서였다. 2012년 리비아 벵가지 미국 대사관에 대한 테러공격으로 주리비아 대사를 비롯해 두 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은 미국 외교정책과 테러 대비에 대한 보수 진영의 격렬한 공격을 초래했다. 이 상황에서 당시 국무장관이던 힐러리 클린턴이 책임을 면하기 위해 관련 이메일들을 삭제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문제가 증폭됐다. 게다가 지리멸렬하게 진행되던 미국의 대테러전쟁이 시리아 내전과 난민사태로 문제가 터져 나왔고, 미국이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힘 있게 주도권을 쥐지 못했다는 비판에 오바마 행정부가 수세에 몰리는 형국이 되었다. 쿠바 국교정상화와 더불어 오바마가 치적으로 자랑하는 이란 핵 협상도 보수 진영엔 타협일 뿐이었다. 결국, 지난 봄과 여름, 유럽과 미국에서 터졌던 테러 사건들까지 겹쳐 공화당과 보수의 “강력한 테러 대응”이라는 프레임이 힘을 얻게 됐고, 오바마와 클린턴의 대외정책이 “약한 미국”을 만들었다는 공화당과 보수의 프레임 설정은 상당한 설득력을 얻었다.
그나마 민주당이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것은 사회경제적인 이슈에서인데, 경제부문에서는 오바마 행정부 아래에서 전후 최악으로 평가받는 2008년 경제위기가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는 평가가 커졌다. 오바마 집권 초기, GDP 및 주가가 증가하는데도 경제회복이 체감되지 않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목되었지만, 재선 이후 꾸준한 고용률 증가로 고용이 경제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고 작년부터 실질소득 상승으로 이어짐으로써 어느 정도 해결책을 찾아가는 양상을 보였다. 경기가 살아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미국인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은 오바마의 민주당 집권 8년에 대해 여론이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도 사상 유례없는 소득/세금 상의 불평등과 전통적 제조업의 쇠퇴로 인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나 한미FTA 등 자유무역협정이 실패했다는 인식이 광범한 지지를 받게 됐다. 이로 인해 클린턴은 과거 자신이 밀었던 환태평양자유무역협정(TPP)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됐다.
트럼프의 자충수, 클린턴의 어부지리
기존 정치권에 대한 혐오가 강해지고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불평등 문제가 주목받는 분위기는 “외부자” 트럼프에 대한 대중의 기대를 높였다. 여기에 추락하는 미국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두려움, 극단 이슬람주의 테러리즘에 대한 공포, 그리고 점점 다인종사회로 변해가는 조건(2043년이면 미국에서 백인 인구구성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고 한다)에서 백인이 가지는 불안감까지 더해져 트럼프 지지층은 굳건하게 형성되었다. 그러나 마치 트럼프가 당선될지 모른다는 식으로 호들갑을 떤 한국 언론의 선정성 보도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이길 가능성은 애초부터 거의 없었다. 주 단위의 투표 결과에 따라 선거인단 수가 정해지는 미국 선거제도를 감안해 시뮬레이션한 예측결과들은 전국 여론조사에서 트럼프가 앞섰던 지난 6월에조차 6:4로 클린턴의 당선을 예측했다. 인종주의와 여성혐오 등 반인권, 반민주적 정서에 기댔던 트럼프의 담론은 이길 수가 없는 전략이었다. 게다가 선거기간 내내 부정선거를 주장하고 마지막 TV 토론에서는 패배 시 결과를 인정하겠다는 약속도 내놓지 않았다. 그가 미국 민주주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는 인식이 공화당 내에 퍼지며 150명이 넘는 주류 공화당 리더가 그에 대한 반대를 천명했고, 온건 공화당원과 중간층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10월 말 한 연설에서 클린턴은 대부분의 공화당원이 이제는 “힐러리 지지자”로 변했다는 뼈있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트럼프의 자충수로 가장 큰 어부지리를 얻은 것은 물론 클린턴이었다. 클린턴은 양당의 전당대회가 끝난 여름부터 ‘크게 주목받지 않는 선거전’을 기조로 삼아 트럼프 발언에 대한 사회적 공분을 자신의 지지로 끌어내는 전략으로 삼아왔다. 자신에 대한 미국인들의 높은 비호감도에 대한 계산이 이런 포복전략(low-profile strategy)을 낳았지만, 이를 가능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은 오바마나 샌더스의 강력한 지지였다. 오바마 대통령과 미셸 오바마는 9월 들어 본격적인 클린턴 지지 유세를 펼치면서 클린턴이 해낼 수 없는 열광과 흥분의 도가니를 만들어냈다. 특히 몇 차례 명연설을 통해 많은 미국인의 심금을 울린 미셸 오바마는 본인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지지세력으로부터 강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될 정도였다. 오바마가 레임덕에도 불구하고 유례없는 지지세를 나타내고 있는 조건에서 클린턴은 당연히 현직 레임덕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강조해오던 관행을 끊고, 오바마 정부와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전략을 삼았다.
클린턴의 지지세 상승에는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민주당 정강”을 만들어내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버니 샌더스의 역할도 지대했다. 샌더스는 클린턴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지지층을 클린턴 지지로 이끌어내기 위해 SNS를 통한 캠페인을 벌이고 유세에도 나서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펼쳤다. 언뜻 보기에 고개가 갸웃거릴 이런 샌더스의 행보에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선 안 된다는 인식과 이후 민주당 정부에서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에 대한 고려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샌더스는 민주당 경선결과에 승복하면서 “혁명은 지속된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최종 선거 결과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샌더스의 이 ‘혁명’이 이후 어떻게 전개될지, 미국의 다양한 사회운동이 어떤 식으로 대선 과정과 접합되었는지 그리고, 미국에서 제3 독자정당은 가능한지 등에 관해서는 다음 호에서 다루기로 한다.<워커스 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