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희, 박홍준을 듣다
홍재희: 독립영화감독. 인디포럼에 작품을 냈다가 떨어진 경험이 있다. 박홍준 감독을 만나 찌질하게 시비 걸다. 단편 <먼지>, <암사자(들)>, 독립 다큐멘터리 <아버지의 이메일>을 만들고 동명 책을 냈다.
박홍준: 인디포럼 작가회의의 새 의장. 법대 졸업 후 증권 회사에 다니다가 더 이상 정체를 숨기지 못하고 한예종 영상원에 들어갔다. 한예종 학생일 때 만든 단편 <소년 마부>가 2009년 인디포럼 폐막작으로 선정되며 인디포럼과 인연을 맺었다. 지금은 개성 강한 작가들이 모인 인디포럼 회의를 진행하랴 자기 영화를 준비하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독립 영화 감독의 산실이자 놀이터 인디포럼 영화제. ‘포럼’이라니까 무슨 세미나나 학회인 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디포럼은 ‘독립 영화 감독들이 직접 참여해서 만드는 비경쟁 독립 영화 축제’다. 올해로 벌써 21주년이 된 인디포럼 영화제. 영화제를 주관하는 인디포럼 작가회의 의장으로 새롭게 선출된 박홍준 감독을 꽃향기 만발한 봄, 미세먼지를 뚫고 낙원동에서 만났다.
홍재희(홍): 고백하겠다. 처음에 뮤지션으로 착각했다. 2013년도 인디포럼 영화제 포스터에 나온 걸 보고 인디밴드 뮤지션이 찬조 출연 한 줄 알았다. 평소 뮤지션 같다는 말 듣지 않나?
박홍준(박): 그렇다. 하하. 이 머리 스타일 때문에.
홍: 그 머리를 도대체 몇 년째 고수 중인가?
박: 2004년부터 이 머리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홍: 그런데 은근 잘 어울린다. 아예 뮤지션으로 나서 보는 건?
박: 에이, 무슨! 사실 음악 영화를 하나 준비할 생각이긴 한데. 우쿨렐레를….
홍: 우쿨렐레에 대한 영화?
박: 아, 아니! 내가 우쿨렐레 배우려고. (웃음)
박홍준 감독은 소심하게 말꼬리를 내렸다. 사진에서 보이는 까칠한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 얼굴을 마주 댄 감독은 겸손하고 털털했다.
홍: 이송희일 감독이 십 년 동안 인디포럼 작가회의 의장을 맡다가 올해 3월 드디어 의장이 바뀌었다. 들리는 말에 올해부터는 의장직을 1년마다 돌아가면서 맡기로 했다는데. 그래서 본인이 맡았나?
박: 그, 그렇지.
홍: 오호! 1년만 하는 게 아니었음 안 맡았을 거란 소리?
박: 뭐, 그런 셈이지. (웃음) 누가 하긴 해야 하는데 오래 활동을 한 감독들 중에 시간적 여유가 있는 내가 맡게 된 거다.
어라? 낚아 볼까 하며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졌지만 감독은 전혀 걸려들지 않는다. 의외로 솔직한 박홍준 감독의 대답에 인터뷰어의 의도가 빗나간다. 나는 급 실망에 빠졌다.
박: 인디포럼은 감독이 모여 있는 느슨한 집합체 같은 거다. 인디포럼 의장이라는 건 특별한 권한이 전혀 없다. 회의 진행을 하는 정도다. 인디포럼 구조 자체가 영화를 상영한 감독들 중심으로 극영화, 다큐멘터리, 실험 영화 감독 및 평론가로 구성되어 있다. 인디포럼 작가회의라는 명칭은 상영 작가를 대상으로 일단 감독이 가입 신청을 하고 활발히 활동하는 감독이 상임 작가가 된다. 대략 40명 정도 된다. 이렇게 신, 구 감독이 전부 망라되어 있다. 다들 인디포럼을 통해서 관객에게 새로운 영화를 소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만든 감독들에게 에너지를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활동한다.
홍: 감독들이 제각각 개성이 강해서 영화 만들 때 빼고는 따로 노는 성향이 강한데 그런 감독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하고 영화제를 만든다니 놀랍다.
박: 맞다. 나도 꿈에도 생각 못 했다. 학교 졸업한 후 밖에서 혼자 영화 찍을 생각하니 외롭고 암담했다. 그러던 중 인디포럼을 알게 됐다. 치열하게 독립 영화를 찍는 사람들이 있더라. 2009년 영화제 지원도 끊기고 빚을 크게 졌다. 그 빚을 어떻게 갚을까 고민하는 자리였다. 감독들 예닐곱이 모여 회의하고 있더라. (웃음) 그게 계기가 되었다. 영화제 기간에는 보통 열 명 내외 감독이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나도 궁금해서 다른 감독들에게 물어본다. ‘이거 왜 하냐’ 그랬더니 자기도 모르겠단다. (웃음)
홍: 그럼 나도 똑같은 질문을 하자. 본인은 왜 하나?
박: 그러니까 내 말이! 이거 한다고 누가 돈 주는 것도 아니고 내 돈 들여 가면서, 게다가 내 영화 뽑아 주는 것도 아닌데! (웃음) 사실 인디포럼 활동하면서 내가 더 많이 변했다. 여기서 정말 다양한 감독들을 만난다. 그게 참 좋았다. 학교 다닐 때 내가 만든 영화와는 전혀 다른 영화를 접하면서 눈을 떴다. 특히 인디포럼에서 충격을 많이 받았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규격화되고 정형화된 영화가 아니라 자유분방한 연출이 돋보이는 영화다. 그걸 깨닫고 나니 영화 만드는 게 더 쉽지 않아졌다. 물이 싹 빠졌다고나 할까. 누구는 그렇게 변한 나를 두고 마이너라고 하는데. 내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 했다. 상업 영화 할 거라 생각했다. (웃음)
홍: 5월 26일부터 6월 2일까지 인디포럼 영화제 기간이다. 영화제 준비는 잘 진행되고 있나?
박: 올해는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영화 제작 워크숍을 연다. 극영화 감독 넷, 다큐 감독 한 명이 참여한다. 관객인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작업이다. 스스로 내가 뭔가 만들었다, 표현했다는 느낌과 마음을 경험하는 자리다. 자신이 만든 영상물이 곧 독립 영화라는 것. 독립 영화는 어렵거나 특별한 누군가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체험해 보는 거다.
기회가 된다면 인디포럼에서 사전 제작 지원 사업도 해 보고 싶다. 원석을 발견해서 힘을 실어 주고 싶다는 뜻이다. 돈이 없어서 당장 큰돈은 지원할 수 없지만 단 몇백만 원이라도 영화 작가들과 영화 제작을 지원하고 싶다. 지원도 받고 배급까지 꿰찬 소위 잘나가는 영화 말고 그런 구조에서 벗어난 영화나 외면받는 작품을 지지하고 싶다. 영화를 접어야 하나 마나 고민하는 친구들이나 지원을 한 번도 못 받은 감독들에게 우리가 힘과 용기를 주고 싶은 거다.
나 역시 회사를 다니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학교에 들어가 영화를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열등감도 있었다. 다들 영화과나 영화 동아리 출신이었다. 하지만 6개월 지나니까 뭐 비슷해지더라. 자신감이 생겼다. 형식을 배우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만의 형식을 발견하는 건 오래 걸린다.
홍: <오월의 봄>, <소년 마부>, <러너스 하이>를 만들었다. 연출력이 상당하다. 영화를 보면 대체로 비정규직이라든가 우리 사회의 약자이자 소수자가 주인공이다. 이들 편에 선 감독이 보내는 애정 어린 시선과 사회 비판적인 태도가 동시에 느껴졌다. 상업 영화 투자자를 잘 속여서 이런 영화를 찍으면 좋을 텐데. (웃음)
박: 하하. 돈 벌 궁리만 하는 사람들 속이는 게 쉽지 않지.
홍: 영화 왜 하나? 돈도 안 벌려 나이는 먹어 알아주지도 않아, 그런데도?
박: 예전에는 우스갯소리로 그랬다. 이름 남기려고 영화 한다고. 그런데 이름 남기려면 책을 쓰든가 그림을 그리는 게 훨씬 낫지.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은 오로지 내가 느끼고 고민하고 생각하는 걸 영상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다. 영화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내 영화를 비롯해서 독립 영화 예술 영화는 어렵고 진지하고 우울하다는 선입견이 있다. 일부러 우울해지려고 영화 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영화가 우울해도 정서를 건드릴 수 있다면 누구라도 좋아할 수 있다고 난 믿는다. 단 백 명의 관객이라도 그렇게 소통할 수 있다면 좋겠다.
홍: 그럼 이름 안 남기고 유명해지지 않아도 되나?
박: 그렇다. 지금은 이름 남기는 거에 관심 없다. 뭐랄까. 내 영화를 본 사람들과 이야기 나눌 때 관객들에게 영화 잘 봤다, 정말 고마웠다는 말을 들으면 뭉클하다. 그게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다. 그런 느낌과 경험이 소중해서, 그래서 난 영화가 좋다.
‘영화가 좋다’라는 뻔하고 식상한 대답. 그러나 그 이상의 진실이 없을 진실한 그 한마디가 자꾸 가슴에 메아리쳤다. 너무 당연해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초심, 영화를 만드는 이유, 감독의 진심이었다.
이야기를 하고 싶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박홍준 감독은 천생 영화쟁이다. 마음속에 샘물처럼 차오르는 수많은 느낌과 감정과 생각을 영화로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꾼. 우쿨렐레를 배우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감독이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로 관객을 찾아갈지, 감독이 만들 음악 영화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당신이 인디포럼 영화제에 간다면 뒤풀이 자리 어딘가에서 조용히 미소 짓고 있을 감독을 찾아내 살짝 물어보시길. 그러면 감독이 당신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자근자근 영화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