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만 편집장
워커스 10호. (2016.5.18)
가습기 살균제가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 갔다. 1,528명이 피해를 봤고 이 중 239명이 사망했다(정부는 149명만 피해 사망을 인정하고 있다). 독극물이 든 제품이 연간 60만 개 이상 팔려 나갔으니 잠재적 피해자는 수백만 명에 이른다.
이 사건에 대해 역대 어느 정권도 자유롭지 못하다. 백 명 넘게 사망한 옥시레킷벤키저의 가습기 살균제에 사용된 물질은 해외에서 유해 물질로 규정되어 인체 사용이 금지된 화학 물질이었지만 1997년 환경부 심사를 통과해 김대중 정부 때인 2001년 옥시에서 살균제로 정식 출시됐다. 당시 이 제품은 KC마크(국가통합인증마크)까지 획득했다. 이후 2006년 노무현 정부 당시 다수의 아기가 폐질환으로 죽어 가자 아산병원 홍수종 교수는 관련 논문을 발표하고 대책을 촉구했고, 2007년 일선 의사들이 질병관리본부에 실험실 검사를 의뢰했지만 정부는 모두 무시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들어서도 의사들이 가습기와 폐질환의 관계 가능성을 제시하고 질병관리본부에 역학 조사를 건의했지만 역시 묵살됐고, 2011년 임산부와 영유아들이 폐질환으로 연속 사망에 이르자 이 살인 제품이 사용된 지 10년 만에 역학 조사가 실시됐다. 정부가 역학 조사를 통해 가습기 살균제와 폐질환의 인과 관계가 의심된다고 하면서 내린 조치는 고작 시판 중단과 과징금 5200만 원 부과였다. 가습기 피해자들이 해당 기업들을 고발했지만 박근혜 정부 아래서 검찰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2014년에서야 정부는 피해자들을 공식 인정하면서 검찰은 해당 기업들을 기소했다. 하지만 또 2년 가까이 수수방관하다가 총선이 끝난 4월 19일 처음으로 옥시 임원을 소환했다. 판매가 중단된 지 5년 만에 이루어진 첫 조치였다.
이 과정에서 옥시레킷벤키저는 관련 전공 대학 교수들을 돈으로 매수해 회사에 유리한 보고서를 작성케 했다. 이 교수가 본인의 논문을 김앤장이 조작했다고 주장하고 있어 사건의 진행 과정에 따라 국내 최고의 로펌이 가담한 대형 법조 비리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또한, 정부와 질병관리본부는 2013년 역학 조사에서 가습기 살균제의 폐 손상 위험도가 116배에 달한다는 결론을 냈다. 하지만 당시에 이를 발표하지 않았고, 3년이 지난 후 지난 3월 국제 학술지에 연구 논문으로 발표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옥시레킷벤키저와 같은 해외의 초국적 자본이 설립한 회사들은 대부분 유한 회사라는
것이다. 《워커스》 3호(정은희 기자, <“페이스북을 돌려받자”>) 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페이스북,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코카콜라, 맥도날드 등 해외 기업의 한국 법인들은 모두 유한 회사다. 이 유한 회사는 주식회사와 똑같은 활동을 할 수 있지만 외부 감사를 받지 않고 공시 의무가 없어 기업 회계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공개하지 않아도 된다. 옥시레킷벤키저는 2011년 가습기 살균제가 문제시되자 주식회사에서 유한 회사로 바꿨다. 지난 10년간 1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여 놓고도 이 살균제를 팔아 번 돈을 영국 본사에 얼마나 송금했는지 알 수 없다는 얘기다. 한편, 정부는 뒤늦게 안전 관리 대책을 마련한다며 2013년 5월 <화학물질의등록및평가등에관한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2015년 1월부터 시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대기업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했고 급기야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9월 25일 제3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화평법>에 대해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면서 “기업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법은 다시 개정됐고 결국 누더기가 되었다.
이처럼 대통령이 네 번 바뀌는 16년 동안 정부는 살인 기업들을 비호하고 관련 기관들은 수수방관했다. 이들이 수백 명의 사람을 죽여 가며 벌어들인 돈을 무사히 본사로 빼내는 동안 누구도 알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다시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법률로 막힌 규제를 풀어 주고 기업 활동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악마는 독성 물질을 판 기업보다 더 디테일하게 숨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