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역 사망 사고’는 박근혜 정권 노동 정책의 결과
요즘 ‘구의역 노동자 사망 사고’에 대해 조 · 중 · 동을 포함한 모든 언론이 야단법석을 떨고 있다. 지하철역의 ‘스크린 도어’에서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므로 심각한 문제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보수 언론은 ‘안전장치 없이 굶어 가며 일해야 하는 노동자 계급의 현실’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 원인을 왜곡하며 정치적 공세를 이어 가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묻자면 박근혜 정부의 ‘창조 경제’와 ‘노동 개혁’의 허구성에 물어야 한다. 나아가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되는 하도급의 다단계 구조를 문제 삼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질서를 근본으로 생각하는 박근혜 정권의 노동 정책의 오류에서 비롯된 ‘필연적 사고’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들 언론은 서울시의 잘못으로 책임을 축소하는 논조뿐이다.
물론 서울시에도 책임은 있다. 특정한 하청 업체에서 같은 사고가 반복될 때, 서울시는 그 업체와 계약을 해지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했어야 함에도 방관적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반복된 사고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서울시의 담당인 서울메트로는 광고권과 유지 · 보수 업무를 유진메트로컴에 하청을 줬고, 유진메트로컴은 은성PSD에 재하청을 줬다. 다단계 하도급의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와 시민의 몫이 되고 만다. 마지막 단계의 하도급 업체는 안전과 서비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수익을 보존하기 위해 노동 강도와 저임금 구조를 정착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스크린 도어’의 안전은 뒷전일 수밖에 없는데 재발 방지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다. 구조적 모순에서 발생하는 사고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근본 원인을 고치기는커녕 보상으로 업체의 책임을 퉁 치는 한 같은 사고는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스크린 도어 사고와 관련한 정치권의 반응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자칭 ‘노사의 달인’임을 자임한 새누리당 노동위원장은 이번 사고에 대해, <파견법>을 포함한 ‘노동 개혁’을 통과시켰더라면 구의역 사고는 막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수십 년간 노동부에 몸담았다고 자랑이니 노동부 공무원 전체를 무지한 관료로 만든 꼴이다. 비정규 노동자의 고용 행태가 어떻게 분류되어 있는지 기본적인 상식조차 없는 것으로 보인다. 스크린 도어 정비 업체가 도급 업체인데 <파견법>을 원인으로 지목한 것도 그렇고 정부의 <파견법> 개정안에 ‘철도 업무 종사자는 정규직’이라는 조항이 있다는 것을 예로 든 것을 보아도 그렇다. 이 조항에 해당하는 업무는 승무원, 역무원 등 여객 운송 업무로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만을 내세우기 위해 노동자 민중을 눈속임하는 견강부회격 주장을 펼치고 있다. 더욱 기막힌 것은 정부와 집권 여당이 개악하려고 노심초사하는 <파견법>은 파견 제한법이 아니고 파견 확대법이라는 것이다. 그 국회의원의 사고 체계가 정상적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구의역 사고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구의역 스크린 도어 사고’는 온라인상에서 큰 이슈로 부상했으며 보수 신문이 앞장서서 띄우고 있다. 기사는 무려 30만 건 이상 작성되었다. 이 숱한 기사 중에 체제의 문제와 노동자 계급이 안고 있는 모순은 발견할 수 없다. 열아홉 살 노동자가 스크린 도어에 끼어 죽고 나서 바로 다음 날 남양주 공사장에서 가스 폭발로 4명이 또 죽었다. 구의역과 연관된 문제가 남양주 공사장에는 없었을까? 유성기업의 폭압적 노무 관리로 죽음에 이르게 된 한광호와는 무관할까. 그리고 매일같이 산업 재해로 평균 다섯 명씩 죽어 나가는 현상과는 무관할까. 노동법 개악을 통해 1200만 명의 비정규직을 양산한 것과 무관할까. 안타깝게도 각각의 사안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 중심에는 노동자가 자신의 가치를 산정할 수 없는 구조가 정착되고 있다.
비정규 보호법을 깨고 산업 재해의 왕국을 무너뜨릴 투쟁이 필요하다. 아울러 노동조합이 노동의 가치를 산정하고 그 가치를 갖고 당당하게 자본과 맞설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산업 재해로 죽어 나가는 노동자에게 보상금이라는 명목으로 자본의 책임은 없어지고 결국 노동자의 부주의에 의한 사고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노동의 가치에 무지한 자본과 정치인들은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을 노예 사회로 보는 듯하며, 이것은 역사의 발전에 역행하는 것이다.
(워커스14호 2016.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