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 구조 10년 안전 관리 반장은 무기계약직
파키스탄 그레이트 타워 서벽을 오르다 추락했다. 절벽 아래로 내리꽂혔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운 좋게 건진 목숨으로 등반을 했다. 최초로 그레이트 타워 서벽 등정(초등정) 기록을 남겼다. 촐라체는 기어코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무너져 내리는 눈과 함께 촐라체 북벽에서 추락했다. 부상과 사투를 벌이다 정상을 400미터 남겨 두고 발길을 돌렸다. 하강 길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히말라야는 매번 그의 숨통을 아슬아슬하게 움켜쥐었다. 그는 스스로 좋은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의 원정이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때, 그는 히말라야가 살린 목숨으로 다른 목숨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산에서의 새 삶을 꾸려 나간 세월이 벌써 10년이다.
사람의 목숨을 끌어 올리는 일
황 모 씨(49․ 남)의 삶에는 언제나 산이 있었다. 산이 너무 좋아 잘 다니던 대기업까지 그만뒀다. 길게는 3개월가량의 원정 산행을 떠나려면 안정적인 직장은 불가능했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돈을 모았다. 어느 정도 돈이 마련되면 짐을 꾸려 원정을 떠났다. 산악인으로서의 삶은 12년간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야 다른 삶의 가능성이 보였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이어 갈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등반 대장이라는 호칭을 뒤로하고 그가 선택한 삶은 국립 공원 안전 관리반 직원이었다. 난폭하게 변해 버린 산속에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험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북한산은 산악인들의 메카였다. 그만큼 대형 사고 빈도가 잦았다. 꽤 오랜 시간 북한산에서 근무하며 40~50건의 사망 사고를 처리했다. 자살도 있었고 추락도 있었다. 보통 1년에 4~5건의 사망 사고가 발생했고, 많게는 10건에 달하는 죽음과 맞닥뜨렸다. 추락사로 두 사람이 동시에 사망한 사건은 종종 기억에서 되살아났다. 끔찍한 사람의 사체를 보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추락사는 육체가 온전히 붙어 있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몸이 분리되거나 어딘가가 터져 버린다거나…. 사고를 수습하고 집에 돌아가면 악몽을 꿔요. 밥도 안 먹히고, 기운도 없어져요.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하고요.”
분명 사망 사고 현장을 뒷수습하는 작업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에 매달린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것도 그의 업무였다.
사건이 발생하면 국립 공원 사무소나 119 상황실로 사고 접수가 들어왔다. 그러면 현장 가까이에 있는 안전 관리반이 가장 먼저 사고 현장으로 출동했다. 1차 응급 처치를 한 뒤, 119 구조대가 도착하면 같이 구조 작업을 벌이곤 했다. 계곡으로 추락한 등산객을 가까스로 구조해 목숨을 살렸고, 갖가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무사히 하산하도록 도왔다. 추락과 동상, 조난, 골절, 탈진, 심장 마비 등 숱한 위험에서 사람을 구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일찍 손을 쓰는 것도 중요한 업무였다. 탐방로 시설물 안전 점검 및 보수 작업은 안전 관리반의 몫이었다. 위험을 예방하고 차단하는 일은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작업 중 하나이기도 했다. “사고 빈도가 높은 사고 다발 지역이 있어요. 거기에 추락 방지 시설을 설치하는 일도 해요. 추락 지점에서 만약 사고가 나더라도 사망까지는 이르지 않게 하는 거죠. 예전에 북한산에서 일곱 곳에 직접 작업을 했어요. 그 뒤로 그곳에서는 사망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어요. 뿌듯하더라고요.”
불평등하고 막막한 산길을 오르는 사람들
그는 위험에 맞닥뜨린 사람들을 이고 메고 끌어 올렸다. 모두 험한 산속에서 이뤄진 구조 작업이었다. 위험에서 사람을 구하기 위해 그는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큰 사고만 안 당하면 다행이었다. 갖가지 부상은 노상 그의 몸을 떠날 줄 몰랐다. 일하면 할수록 그의 몸은 닳고 닳아 갔다. 2년 전, 100미터 계곡으로 추락한 등산객을 구조하다 어깨를 다쳤다. 부상의 후유증은 고통스러웠다. “100미터 아래로 추락했는데 다행히도 살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헬기가 접근이 안 되는 곳이었던 거죠. 119 구조대와 저와 제 동료, 이렇게 세 명이 그를 끌어 올렸어요. 80킬로그램 가량의 거구를 100미터 가량 끌어 올리다가 어깨를 다쳤어요. 아직 후유증이 남아 있죠.” 7년 전에는 들것에 사람을 실은 채 가파른 산을 내려오다가 허리를 다쳤다. 수천 일 산을 오르내리는 동안 무릎 연골은 닳아 버렸다. 10~15킬로그램에 달하는 구조 장비는 사고 현장으로 출동하는 그의 등과 어깨를 짓누르곤 했다. 그가 헛헛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충격들이 계속 몸에 축적이 되고 있어요. 구조라는 일이 기를 뺏기는 일이에요. 이제 예전의 싱싱했던 몸이 아니죠.”
어느덧 안전 관리반 직원으로 일한 지 10년이다. 그 세월 동안 강산도 변했고 그의 몸도 서서히 변해 갔다. 반장이라는 직책도 달게 됐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무기 계약직 신분이었다. 계약직에 비해 고용 불안은 덜하지만, 처우는 여전히 계약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한 직급. 승진도 없었고, 임금 체계도 정규직과 달랐다. 10년간 일을 해도 그의 월급은 200만 원을 넘지 않았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은 처우를 참지 못하고 일터를 떠나갔다. “이직률이 놓아요. 보수가 적고 승진도 없고, 정규직 전환도 안 되니까요. 젊은 친구들은 못 견디죠.”
그나마 그는 기간제 비정규직에서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이 됐으니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해야 할까. 그와 함께 국립공원사무소에서 일하는 5명의 안전 관리 반원과 재난 구조대 인력 중 4명은 모두 1년짜리 계약직이었다. 예전 일터에서는 안전 관리반 28명 중 20명이 계약직이었다. 안전 관리반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각종 자격증을 취득해야 하고 경력도 갖춰야 했다. 기술과 경력을 갖추고 지속적인 업무를 하는데도 이들은 계약직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다. 1년이 지나면 재계약을 해야 했고, 월급은 오르지 않았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차별을 받아요. 아무리 일을 해도 정규직은커녕 무기 계약직으로도 전환이 안 돼요. 그러다 보니 직급 간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에서 힘든 경우도 생겨요. 제가 바라는 건 똑같이 일하면 똑같은 처우를 받게 해 달라는 거예요.”
그가 일하는 국립공원사무소 직원 중 60%가량이 비정규직이다. 안전 관리반, 재난 구조대, 녹색 순찰대, 자연환경 해설사 등의 이름을 가진 노동자들이다. 그들의 노동은 매번 비법정 탐방로 안에서만 서성인다. 산길에서 일을 하지만, 정작 그들이 정상에 도달할 만한 길은 없다. 사람이 제멋대로 만든 산길은 불평등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안전을 지켜야 하는 노동, 위험한 삶으로 내몰리는 노동
안전 관리 업무 노동자들의 삶은 안전하지 않다. 그들의 위험은 불안정 노동에서 시작된다. 불안정한 노동은 그들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안전조차 휘청거리게 한다. 안전 관리 업무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는 일은 꽤 빈번하게 발생한다. 지난 4월 5일. 괴산에서는 산불 진화 대원이 산불을 진압하다 소방차에서 떨어져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달 31일에는 외주 하청 업체 19세 청년 노동자가 지하철 구의역 스크린 도어를 정비하다 목숨을 잃었다.
안전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이들의 불안정 노동도 덩달아 주목을 받는다. 2년여 전 세월호 참사 역시 불안정 노동 문제를 피해갈 수 없었다. 당시 여객선을 지휘하는 선장은 1년짜리 계약직이었고, 핵심 승무원 70%는 비정규직이었다. KTX 승무원, 지하철 경정비 업무, 항공사 조종사와 공항 안전 업무, 운송업과 원자력 발전소까지. 생명과 직결되는 업무에 비정규직이 넘쳐 난다.
지난 2013년 국정 감사에서 이종훈 새누리당 의원은 “북한산, 설악산, 지리산 등 전체 국립 공원 내 재난 구조대, 안전 관리반 등 안전 관리 전담자 95%가 비정규직”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3년 후 현재, 산에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안전 관리 노동자들은 여전히 1년짜리 계약직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올해 국립공원관리공단이 공고한 20개 국립 공원 안전 관리반과 재난 구조대 채용 조건은 모두 1년 미만 계약직 일자리였다. 고용 기간은 채용일로부터 올해 12월 31일까지. 채용 공고문에는 ‘차기 년도 고용은 보장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적시돼 있다. 아울러 2년을 초과해 근무하더라도 기간제법에 따라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자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공지도 나와 있다. 사회적 일자리 창출 사업이라 정부 시책에 따라 축소, 폐지될 수 있다는 경고도 포함돼 있다. 단기 고용이라는 불안정성에, 일자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더해진다. 하지만 안전 관리반이나 재난 구조대는 사고 예방과 구조를 위해 매년 필요한 일자리다. 지난 5년간 국립 공원에서 발생한 인명 피해는 총 1,250명. 지난해 산악 구조 활동 건수는 1만 86건에 달한다.
산불 감시원, 산불 진화 대원은 ‘계절직 노동’이라는 기이한 직급으로 분류된다. 봄철을 앞둔 시기, 지자체들은 각각 일정 인원의 감시원과 진화 대원을 채용한다. 이들의 고용 기간은 3개월. 봄철 반짝 일을 하고 다른 단기 계약직 일자리를 전전해야 하는 신세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다년간 사회적 일자리에 연속적으로 참여한 사람에겐 응시 자격에 제한을 두기도 한다. 여름철 물놀이 안전 감시원 또한 지자체에서 직접 채용하고 있다. 채용 기간은 2개월가량. 산불 감시원과 진화 대원, 물놀이 안전 감시원은 평균 4만 4,000원~5만 3,000원가량의 일당을 받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 창설된 국민안전처는 재난 안전 총괄 기구다. 이들은 산과 강, 바다 등에서 발생하는 안전사고 예방 업무도 병행하고 있다. 국민안전처는 올해 산불 조기 진화를 위해 산불 감시원(1만 2,000여 명), 진화 대원(1만여 명)을 활용해 취약 지역을 집중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물놀이 관리 지역에 안전 감시원 등 7,948명을 배치해 구조, 구급 태세를 강화하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는 반복되는 위험을 야기하는 근본적인 시스템의 변화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불안정 노동으로 인한 안전의 외주화, 비정규직화는 주변적인 문제로 남겨 둘 뿐이다. 안전의 문제가 불안정 노동, 빈곤의 문제와 맞닿는 길은 아직 멀다. 안전을 관리하는 노동자들은 가장 안전하지 않은 삶과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
에필로그
그는 살인범의 가족이자 살인 피해자의 유족이었다. 죽은 동생을 떠올리며 형에 대한 분노를 쏟아 내다가도 이내 연민의 감정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라 했다. “죄를 지었으니 어떤 형벌이라도 받아야지요. 형제 입장에서는 아주 나쁜 놈인데, 그래도 엄마가 살아 있다면 미워만 했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그의 등 너머로 투박한 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장 씨의 집이 보였다. 거무튀튀한 목조 주택과는 어울리지 않는 파란 지붕이 햇빛을 받고 있었다. 그는 형과 동생이 사라진 집에서 혼자 지붕을 고쳤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었지만, 엄마와 형제들과 함께 살았던 고향 집이기도 했다. 지붕이 넘어가 버린 고향 집을 기괴한 모습으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지붕을 다 고칠 때까지만이라도 고향에 내려와 있기로 했다. “형님이 몇 년 형을 받건 간에 살 집이 있어야 할 것 같고. 어떻게 보면 형이 또 이 집으로 돌아오기란 만무하고. 그래도 어머니 집이니까. 하찮은 시골집이라도 고쳐는 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거라도 안 하면 마음이 편치가 않아서….”
휑한 집에 들어앉아 짐을 정리할 때마다, 죽은 여동생의 삶이, 그리고 살인자가 된 형의 삶이 눈앞에 살아났다. 여동생은 작년에서야 한글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그녀의 삐뚤빼뚤한 글씨가 새겨진 공책과 그림 연습을 했던 스케치북은 도저히 태워 버릴 수가 없었다. 집 구석구석에서는 형이 마셨을 술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술병은 쌓이고 쌓여 마대 자루 두 포대가 됐다. 지난겨울 내내 술병을 부여잡고 추위를 견뎠을 형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작년 겨울에 보일러가 터졌대요. 죽은 여동생을 안동에 있는 동생 집에 보내 놓고, 자기 혼자 그 추운 집에서 겨우내 술기운에 잤어요. 여기는 5월에도 밤에는 불을 때는 곳입니다. 불 없는 방에서 겨울을 난다는 게….” 누구도 형의 삶을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장 아팠다. 보일러만 수리했어도, 누군가 손만 내밀었다면 이런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미련도 그를 괴롭혔다.
마땅한 일자리가 없는 시골 마을에서, 장 씨는 산불 감시원 같은 계절직 노동을 했다. 일용직으로 근근이 노동을 했지만, 그마저도 안정적인 직장은 아니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또 다른 일거리를 찾아 전전했다. 자신이 여동생의 손과 발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돈은 벌어야 했다. 그의 노동과 삶은 여러모로 불안정했다. “여동생 옆에는 사람이 붙어 있어야 해요. 대소변도 못 가릴 만큼 장애가 심했어요. 형이 일하러 나가면 동생이 부르스타 불을 켜기도 하고. 형이 매번 놀라서 왔다 갔다 하는데,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무치는 미움을 떨쳐 내지 못한 채, 그는 구치소에 수감된 형을 면회했다. 왜 그랬느냐는 물음에 형이 대답했다. “몸이 아팠다”고. 슬픔과 분노, 억울함이 뒤엉켰다. “자기 혼자 죽어 버리면 남은 동생이 불쌍하니까. 출가한 동생들에게 부담 안 주려고… 걔도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고….” 형은 죽다가 살아났다. 영월도립병원으로 후송됐지만 위급하다는 진단을 받고 헬기로 원주 세브란스병원으로 다시 이송됐다. 혼수상태였던 형이 가까스로 눈을 떴다. 형은 이제 죗값을 치르게 될 터였다. 그리고 형만 죗값을 치르면 끝날 일이 됐다. 사건은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기구한 사연쯤으로 간단히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워커스15호 2016.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