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줄거리]
멸망을 앞둔 태양계의 지구 문명을 다른 행성계로 복원하는 오메가 플랜이 진행 중인 가까운 미래. 오메가 플랜의 데이터 분석학자 지민은 복원을 위해 백업 중인 역사 데이터에서 주요 전환점의 사건들에 개입해 역사를 바꾸는 실험을 한다.
[인물 소개]
에이도스 새로운 행성에 복원할 인류의 문명과 역사를 백업하는 인공 지능체.
지민 인공 지능체 에이도스에 저장된 역사의 분기점에 개입하는 시간 여행자.
하미강 오메가 섹터의 격리 구역 보안 담당자로 부임한 해병 장교.
사흘이 지나서야 폭설로 고립된 평택 오메가 섹터의 진입로에 제설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날까지, 지민은 어느 날 갑자기 부모가 죽어 유산으로 받은 거대한 저택 안에서 홀로 살아가는 고아 같은 기분으로 사흘을 보냈다. 기지 안엔 경비 군인들뿐이었고, 그녀에게 명령을 내릴 이들은 모두 휴가 중이었다.
지난번 가상 현실 모드를 통한 시간 여행 이후 지민이 에이도스에게 들은 분석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초기 값을 0%로 놓고 봤을 때, 야당의 집권 가능성은 12%, 노동당만 특정하면 5% 정도 증가했네요.”
“겨우?”
“겨우요? 야당 전체로 봤을 때 12%인데 노동당이 5%예요. 원내 의원 한 명인 정당이요.”
지민은 오전 내내 밀린 업무를 처리하면서 바쁘게 보낸 뒤 격리 구역 연구원 전용 식당에서 늦은 점심 중이었다. 에이도스와 직접 접촉하는 소수 연구원들은 업무 구역과 생활 구역이 엄격히 격리되기에 식당은 늘 한산했다. 폭설로 기지가 고립된 동안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를 때우며 방학 같은 기분을 만끽했지만 영양사가 돌아오면서 방탕한 식사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두부와 샐러드로 가득한 식판을 포크로 휘저으며 지민은 온통 에이도스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웠다.
“안녕하세요? 정지민 박사님? 아까 인사드렸죠?”
지민은 맞은편 해병대 정복 차림의 여자에게 건성으로 고개를 꾸벅거렸지만 누군지 떠올리려고 고개 들어 한참을 쳐다봐야 했다. 보안 부대에 새로 전입한 하미강 대위였다. 아침 회의 시간에 잠깐 인사를 나눴지만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격리 구역 내에 보안 부대 군인이 드나드는 것은 낯설지 않았지만 함께 식사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민은 상대가 누구든 어색하거나 불편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재주가 있어 노골적으로 빈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하고많은 자리를 놔두고 왜 내 앞에 앉느냐는 뜻이었다. 10년간의 군 생활로 단련된 하미강 대위는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직업이었다.
“와! 밥상에서 뱀 나오겠다. 누가 보면 소 키우는 줄 알겠네. 격리 구역에선 원래 이렇게 풀만 먹여요?”
지민은 별다른 대꾸 없이 미강을 훑어보았다. 여태껏 본 보안 부대 해병과 크게 달라 보이진 않았지만 오른손에만 검은색 장갑을 낀 채로 식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의를 기울여 보니 희미한 모터음이 들렸다. 오른팔은 전자 의수였다. 상어가 그려진 수색대 휘장이 유난히 반짝였다.
지민은 미강이 의수를 단 경위가 궁금했지만 질문하지 않았다. 마주앉은 사람을 무시하는 데 익숙한 지민은 식사를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샐러리를 처음 먹는 사람처럼 인상을 찡그리며 잘근잘근 씹던 미강이 말했다.
“박사님, 이따 뵙겠습니다.”
지민은 미강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주춤거렸지만 한 시간 뒤 팀장 방에 불려 간 지민은 보안 부대장인 서창욱 대령과 함께 서 있는 미강을 만났다. 작달막한 키에 해군 근무복을 입은 서 대령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정년 퇴임을 앞둔 교감 선생 같았다.
“박사님, 오전에 인사하셨죠? 이번에 격리 구역 보안 총책임자로 온 하미강 대위입니다. 에이도스 시설 보안 책임자니까 박사님께서 오늘 안내 좀 부탁드립니다.”
지민은 거수경례하는 미강에게 고개만 까딱거린 다음 서 대령을 무시하고 팀장에게 질문했다.
“격리 구역 보안 총책임요? 그런 인원 편성 처음 들어 보는데요?”
“이번에 새로 생겼어. 하 대위는 보안 등급으로 탱고를 받았으니까, 정 박사가 활동하는 모든 구역의 보안 책임자야. 에이도스 업무는 앞으로 하 대위하고 같이 진행해.”
팀장 말에 지민은 다림질이 필요할 정도로 인상을 구겼다. 밀착 감시조라 이거지? 지민은 혹여 에이도스에 복제 인스턴스를 생성해 가상 역사를 만드는 걸 감시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하미강 대위 부임은 그의 첫 번째 시간 여행 이전에 결정됐다. 지민은 최대한 귀찮은 기색을 억누르며 미강에게 에이도스에 자료를 입력하고 검증하는 절차를 설명했다. 미강은 지민의 설명보다는 병실을 연상시키는 그의 사무실에 더 관심이 많았다. 액자나 꽃, 개인 물품은 물론, 흔한 거울조차 없었다.
“여긴, 일종의… 유배지 같군요.”
미강은 조심스럽게 감상을 꺼냈지만 지민은 그 감상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수정해 주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형수 감방 같은 곳이죠. 그쪽은 무슨 일로 왔어요?”
지민의 말에 미강은 자신의 정복에 달린 출입증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하미강 대위입니다. ‘그쪽’이 아니라.
지민은 사과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어차피 멸망할 세상이라면, 마지막 기록을 남기는 일에 동참하고 싶었어요.”
미강은 그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종신형 대신 이곳을 선택했어요. 평생 오메가 섹터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요.”
지민은 미강의 말에 얼굴이 굳어졌다. 오메가 섹터의 격리 구역, 즉 오메가 플랜의 빅프로즌 수행 구역에서 일하는 연구원과 관리자는 절대 비밀 엄수를 조건으로 들어왔다. 생전에 태양계 종말을 볼 수 없는 나이의 공학자는 사명감으로 계획에 동참했지만 젊은 나이의 직원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었다. 지민 역시 오메가 섹터를 자신의 무덤이라고 여겼다. 이곳에서 그녀 홀로 길고 긴 장례식을 치르는 셈이었다.
입안이 바짝 마른 지민은 무슨 죄목이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통했는지 미강이 말을 꺼냈다.“작전 중 상관 살해요. 어차피 알게 되실 테니까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 팔과 관련이 있나요?”
지민은 미강의 의수를 가리키는 대신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미강의 대답은 짤막했다.
“네, 그래서 왼손으로 방아쇠를 당겼죠.”
지민은 미강을 데리고 격리 구역의 주요 시설을 안내했다. 도면과 실제 구조를 비교해 보던 미강은 지민이 평소에 생각지 못했던 상황을 가정해 질문을 던졌고, 질문 방향은 예기치 못한 화재나 내부 직원에 의한 테러 쪽에 방향이 맞춰졌다. 방재 업무는 지민의 분야가 아니라 대충 얼버무리거나 담당자를 알려 주고 말았지만 에이도스로 들어가는 방에 이르렀을 때 녹초가 됐다. 에이도스 본체로 들어가기 전 방호복을 갈아입으면서 미강이 질문했다.
“그러니까, 에이도스라는 것은 초대형 슈퍼컴퓨터라기보다는 일종의 생명체에 가깝군요?”
“네, 데이터를 처리하는 구조가 달라요.
하드웨어적으로도 주요 프로세서들은 유기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의 신경망 구조와 유사해요. 지구의 양자 컴퓨터들이 양자의 위상을 값으로 삼는다면 에피델인들의 방식은 방향과 속도를 값으로….”
“저기, 죄송한데… 그렇게 열심히 설명하진 마세요. 어차피 저는 못 알아들어요. 제가 박사님한테 IED2 해체법을 열심히 설명해도 모르는 것처럼.”
지민과 함께 에이도스 앞에 선 미강은 잠시 말없이 에이도스의 검은색 본체를 올려다봤다. 에이도스는 낯선 방문자가 입은 방호복으로 그의 생체 정보를 스캔하고 빅프로즌에 저장된 데이터를 찾았다.
“정말로 인류의 모든 정보가 여기에 저장된단 말인가요?”
“모든 정보는 아니에요. 누락되는 문헌이나 인물 정보, 유전자 정보도 있죠. 하지만 최대한의 정보를 에이도스로 옮기는 게 오메가 플랜의 목적이죠. 전 세계에서 오메가 플랜에 참여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만 빼고요.”
지민의 말에 미강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나라라는 게 설마….”
“어디겠어요?”
미강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북한?”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새롭게 복원된 지구에서 북한은 커다란 구멍으로 남겠죠. 모두 알고 있지만,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실체는 사라진 나라.”
(계속)
1 Wintersun, 2004.
2 Improvised Explosive Device.
급조 폭발물, 사제 폭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