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줄거리]
멸망을 앞둔 태양계의 지구 문명을 다른 행성계로 복원하는 오메가 플랜이 진행 중인 가까운 미래. 오메가 플랜의 데이터 분석학자 지민은 복원을 위해 백업 중인 역사 데이터에서 주요 전환점의 사건들에 개입해 역사를 바꾸는 실험을 한다. 지민은 2020년으로 가서 광범위한 정보 통신망 감청 시스템을 개발 중인 폴라시스템에서 국회의원들의 개인 정보를 수집한 뒤 구본석 전무와 함께 이를 빼돌린다.
[인물 소개]
지민 인공 지능체 에이도스에 저장된 역사의 분기점에 개입하는 시간 여행자.
에이도스 새로운 행성에 복원할 인류의 문명과 역사를 백업하는 인공 지능체.
고찬욱 에이도스가 구현한 가상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지민의 아바타.
구본석 2020년 국정원의 정보 통신망 감청 시스템을 개발 중인 하청 업체의 전무.
지민이 국회의원 300명에게 보낸 메일은 폴라리스 시스템이 본격 가동될 때 국정원이 메일 수신자 정보를 어디까지 수집할지 생생히 보여 줬다. 며칠 동안 구본석 전무와 지민은 휴대 전화를 끄고 답장 메일이 오길 기다리며 서울을 벗어났다. 지민은 에이도스에게 계속 가상 현실에 있어도 괜찮을지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괜찮아요. 현실 시간으로는
약 45분 지났거든요. 뇌파에 연동해서 의식에 직접 구현하는 상태라 그곳이랑 현실계는 시차가 있어요. 대신 언제든 속이 울렁거리거나 두통이 생기면 말씀하세요. 즉시 중단할게요.”
아무리 가상 현실이라도 남자 둘이 돌아다니면 눈에
띌까 봐 지민은 낚싯대를 샀다. 둘은 저수지에 자리 잡은 낚시터를 돌며 낮 시간을 보내고 밤에는 지민이 피시방에 가서 답장 메일이 왔는지 확인했다. 300명 중 답장을 보낸 이는 단 한 명이었다. 노동당 의원인 한종철이었다. 몇 번의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메일이 오갔고 경기도 안성의 한 저수지 낚시터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여긴 죄다 떡붕어네요.”
한종철 의원은 쌀쌀한 바람에 차가워진 손을 입김을 불어 녹이며 구시렁거렸다. 좌대에 앉은 채로 우두커니 찌를 응시하던 구본석 전무 얼굴은 며칠 사이에 많이 거칠어졌다. 그는 처음에 자신을 이런 처지로 몰아넣은 고찬욱 이사를 원망했지만, 국정원에 쫓기면서 고찬욱은 그의 유일한 동료가 됐다.
“나머지 299명 의원 모두 침묵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두 분이 보낸 메일에 겁먹어서가 아닙니다. 어차피 의원들은 <사탐법>(국가안전을위한위험정보사전탐지에관한특별법)에 관심 없어요. 자기들이 국정원 감시를 받는 걸 모르지도 않아요. 국정원 감시가 이 정도니 앞으로 더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밖에 안 됩니다. 한마디로 건드리기 귀찮다 이거에요.
아, 이쪽은 안 되겠네….”
한종철 의원은 낚싯대를 들어 올려 다른 지점에 다시 던졌다.
“그것 보세요, 저는 그냥 납기를 연장할 방법을 찾아 달라고 이사님을 부른 건데, 이사님이 일을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 버렸어요.”
구본석 전무는 지민에게 힐난의 화살을 돌렸다. 당장이라도 저수지에 뛰어들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지민은 말했다.
“하지만 의원님은 여기에 오셨죠? 휴대 전화나 보좌관도 없이 혼자.”
지민의 찌가 살짝 흔들렸다. ‘살짝 당겨 볼까?’ 그녀는 생각했다.
“개인 메일 계정을 AWS(Amazon Web Services, 아마존사의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의 메일 서버에 만들어 사용하시더라고요? 덕분에 홍나오(紅腦, 붉은뇌)의 추론 엔진이 의원님 개인 정보를 못 빼냈어요. 국가 표준 암호 알고리즘(ARIA)의 취약점을 폭로하신 예전 컬럼 기사를 보니까….”
지민이 한종철 의원의 이력을 읊으려 하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아, 그건 욕 엄청 먹었죠. 변호사 나부랭이가 뭘 알고 지껄이냐고.”
한 의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지민은 학부 시절 논문에서 다뤘던 과거의 인물과 마주하니 가상 현실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감격에 젖을 뻔했다. 지민은 덧붙였다.
“의원님 관심을 끌 주제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역시, 공인 인증서였나요?”
한종철 의원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에게 지민이 보낸 메일은 다른 의원에게 보낸 내용과 달랐다. 다른 의원들은 폴라리스 시스템이 수집한 의원 개인 정보를 담고 말미에 국정원 하청으로 개발 중인 폴라리스 시스템을 간단히 소개했다. 그러나 한 의원에겐 공개된 개인 연락처를 통해 캐낼 정보가 없었다. 사용하는 메신저, 메일 등은 폴라리스 시스템이 패킷을 감청해도, 풀어낼 복호화 키를 탈취할 수 없었다. 지민은 한 의원이라면 자신의 메시지를 알아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겐 보다 상세한 폴라리스 시스템의 구성도를 보냈다.
“암호화된 패킷을 가로채도 그것을 풀려면 각 개인의 해독키가 필요하죠. 국정원이 이 정도의 실시간 감시 체계를 갖추려는 건 이미 광범위한 해킹 툴이 전 국민에게 심어져 있어야 가능해요. 그리고 그건… 의원님이 전부터 주장했던 대로….”
“금감원을 통해 배포되는 공인 인증서지요. 그냥 돈독이 오른 놈들인 줄만 알았지, 국정원하고 붙어먹는 것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한 의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현실은 늘 상상을 압도해요.”
지민은 여전히 침묵하는 구본석 전무를 힐끔 돌아보고는 푸념했다.
지민의 말처럼 한 의원의 관심사는 변호사 시절부터 공인 인증서의 보안 개선과 개인 정보 보호 이슈였다.
“게다가 정식 절차를 거쳐 도입한 그레이트 월 2(Great Wall 2)나 홍나오는 그렇다 쳐도, 솔루션이나 데이터들은 불법이나 다름없어요. 심지어 중국에서 암거래되는 레인보우 테이블2까지 있잖아요? 사탐법은 이런 불법에 면죄부를 주게 됩니다. 약간만 과장하면 전 국민을 국정원 앞에 발가벗겨 놓는 시스템입니다. 당장 기술적으로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 발판을 마련해 주겠죠. <사탐법>으로 면죄부까지 주면 이 시스템은 통제 불능의 괴물이 될 겁니다.”
한 의원은 손가락으로 지민이 인쇄해 온 폴라리스 시스템의 구성도를 두들기며 빠르게 말했다. 그의 걱정은 폴라리스 시스템의 위법성을 폭로하고 사탐법이 그것의 면죄부를 주려는 위험한 시도임을 주장할 때 필요한 내부 고발자였다. 지민은 구본석 전무를 내부 고발자로 그의 앞에 데려다 놓았다. 고발보다 더 힘든 것은 고발 이후 삶이다. 하지만 구본석 전무는 처음부터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 게임에 끌려왔다.
구본석 전무는 낚싯대를 걷어 올렸다. 그가 원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생활이었다.
“왜 하필 접니까?”
한 의원은 구본석 전무의 질문에 입에 발린 소리조차 안 나왔다. 지민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그가 어떤 답을 내놓을지 궁금했다. 잠시 침묵 뒤 한 의원이 입을 열었다.
“안 하셔도 됩니다.”
지민의, 아니, 고찬욱의 인상이 구겨졌다.
“뭐라고요?”
지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하지만 한 의원은 계속 구본석 전무에게 말을 건넸다.
“청문회 출석이나, 기자 회견, 기타 등등 신원을 노출할 만한 그 어떤 일도 할 필요 없습니다. 집에 며칠이나 못 들어갔지요? 국정원이 찾아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저에게 연락하세요. 당 차원에서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다른 당의 의원들과 연합해 이슈로 만들겠습니다. 하지만 전무님이 희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충분히 희생하셨습니다.”
구본석 전무는 지민과 한종철의 얼굴을 번갈아 힐끔거렸다.
“그럼 집에 가도 되는 겁니까?”
“잠깐, 에이도스! 멈춰!”
지민은 에이도스를 불렀다. 그의 지시에 따라 세상이 멈췄다.
“지금 한종철 의원의 결정은 실제의 한종철 의원이라면 이렇게 결정했으리라는 네 추론이야?”
“당연해요, 지민 씨가 보는 세계는 지민 씨와 저의 사고가 개입돼 있어요. 그 이야기는 한종철의 결정에는 지민 씨가
해 왔던 판단들을 토대로 이루지는 거죠.”
“내가 해 왔던 판단들이란 대체 뭘 말하는 거야?”
“그동안 보아 왔던 지민 씨의 말과 행동들, 업무 처리 방식, 저한테 저장된 지민 씨 관련 모든 정보를 기반으로 하죠.”
“네 말은, 내가 만약 한종철 의원이었어도 지금 같은 결정을 했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맞아요, 지민 씨가 내린 결정이나 마찬가지예요. <사탐법> 저지를 위해 국회를 움직여야 한다고 판단한 것, 공인 인증서가 대규모로 변조되는 사실을 한 의원에게 알리고 구 전무를 내부 고발자로 만드는 계획은 지민 씨 것이죠. 마찬가지로 구 전무가 내부 고발자가 됐을 때 닥칠 고통을 걱정해 이 일에서 빠지길 원하는 것도 지민 씨 결정이죠.”
지민은 실제 역사 속에서 구본석에게 닥친 일들을 기록으로 알고 있었다. 폴라리스 시스템은 납기일을 훨씬 넘겨 납품됐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기술적 결함이 많았고, 구 전무는 회사와 국정원 사이에서 두들겨 맞는 신세가 됐다. 회사 옥상에서 투신 전 부인에게 남긴 마지막 문자는 ‘이게 아니었는데…’ 였다.
“정말로 구본석 전무를 보호할 수 있습니까?”
한종철은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쑥스러운 표정이었다.
“이 배지 단 지 6개월밖에 안 됐어도 국회의원은 국회의원입니다. 소수당 의원도 의원은 의원이에요.”
“국정원과 금감원을 동시에 공격해야 할 텐데 그러다 고립되거나 흐지부지 넘어갈 수도 있어요.”
“그런 일을 겁냈다면 국회에 들어오지도 않았죠. 그리고 저 주목받는 거 좋아합니다. 국정원도 포함해서요.”
한 의원은 지민에게 구본석 전무를 증인으로 세우지 않고도 국정원과 금감원이 결탁해 공인 인증서에 복호화 키를 빼돌리는 프로그램을 삽입했고, 이를 통해 전 국민 감시망을 구축하고 있음을 폭로하겠다고 했다. 지민의 눈엔 지나치게 낙천적이고 무모해 보였지만 한 의원의 기록을 떠올렸다. 그는 2023년에 공인 인증서 체계를 완전히 없애고 표준 보안 알고리즘을 뒤바꿔 놓으려 시도했다. 물론 장렬한 실패로 끝났지만.
“호랑이를 굴 밖으로 나오게 하려면 불을 피워야죠. 하지만 불은 우리가 안 피웠어요. 국정원이 스스로 질러 놓은 불이죠.”
한종철 의원은 말했다.
(계속)
(워커스4호 2016.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