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줄거리
멸망을 앞둔 태양계의 지구 문명을 다른 행성계로 복원하는 오메가 플랜이 진행 중인 가까운 미래. 오메가 플랜의 데이터 분석학자 지민은 복원을 위해 백업 중인 역사 데이터에서 주요 전환점의 사건들에 개입하여 역사를 바꾸는 실험 중이다.
인물 소개
지민/ 인공 지능체 에이도스에 저장된 역사의 분기점에 개입하는 시간 여행자.
에이도스/ 새로운 행성에 복원할 인류의 문명과 역사를 백업하는 인공 지능체.
웬즈데이/ 국제적 해커 연대 고스트라이더의 리더.
하미강/ 오메가 섹터의 격리 구역 보안 책임자.
혜영아, 스물세 번째 생일 축하해.
반짝거리는 불빛에 혜영은 들고 있던 손전등을 만지작거렸다. 답례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전등의 건전지를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짧은 점멸 신호를 보내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이제 스물세 번째 생일을 맞이한 작은 체구의 앳된 혜영은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
보급품이 올라온 것은 일주일 전이 마지막이었다. 냉각탑으로 공급되던 전력이 끊긴 지는 보름도 넘었고, 무전기 배터리도 일주일 전에 다 떨어졌다. 아래쪽 소식을 듣지 않아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경찰이 세운 차 벽은 점점 범위를 넓혀갔고 동지들이 올려 주던 식사는 끊겼다. 덕분에 칼로리바만 몇 개 남았다. 경찰의 드론은 냉각탑 주변을 맴돌며 낮에는 방송을 했고, 밤에는 밝은 조명으로 혜영의 잠을 방해했다. 165일째 되던 날, 혜영은 냉각탑 상부 구조물 중 일부를 뜯어 파이프와 베어링으로 만든 공기총으로 경찰의 드론 두 대를 격추했다. 현장을 촬영하던 방송국의 카메라를 향해 혜영은 가운뎃손가락을 날렸다.
“세상에 스물셋이라니, 나는 그때 뭐하고 있었는지도 기억 안 나는데….”
지민의 한탄 섞인 말에 미강은 빙긋이 웃었다.
“저는 확실히 기억나요. 진해에서 구르고 있었으니까.”
미강은 연신 이마와 목덜미를 수건으로 훔치며 땀을 닦았다. 수염이 덥수룩한 거구의 사진기자 몸을 한 미강은 가상 현실 속에서 얻은 자신의 몸에 대해 불평하지는 않았지만 편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에 비하면 지민은 실제와 거의 비슷하게 40대로 접어든 여성의 모습이었다. 거울을 보았을 때 현실의 모습보다 주름이 더 깊다는 사실에 잠시 투덜대기는 했지만.
지민이 운전하는 차는 인터체인지를 벗어나 화성시로 방향을 틀었다.
“정리하자면 이런 거죠? 정 박사님이 복제 인스턴스에서 했던 ‘실험’ 때문에….”
미강은 실험이란 단어를 말할 때 양손으로 인용 부호를 그렸다.
“슈퍼, 슈퍼, 슈퍼…. 하여간 슈퍼가 한 백만 개는 붙을 것 같은 웬즈데이라는 해커의 가상 인격이 복제 인스턴스 안에서 새롭게 탄생했고 그 꼬맹이가 에이도스 안을 휘젓고 다니면서 데이터베이스를 교란시키고 있다. 박사님은 일단 그 꼬맹이를 잡아서 더 이상의 사고를 막아야 한다. 뭐 그런 거?”
“네, 뭐 그런 거….”
지민은 말꼬리를 흐렸다. 에이도스는 웬즈데이를 잠재적인 위험으로 간주하고 제거를 결심했지만 지민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미강에게 한 설명은 절반 이상이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우린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거?”
미강은 도로의 끝에 보이는 삼용나노텍 공장을 가리키며 느릿한 말투로 물었다. 어느샌가 자신의 외모와 어울리는 말투를 찾은 듯했다. 지민은 미강의 손에 들린 태블릿을 가리켰다.
“거기 있는 기혜영이란 여자요. 기사 봤잖아요. 웬즈데이는 그 친구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요. 정확히는 2036년의 기혜영에게요.”
거짓말이었다. 기혜영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순전히 지민 스스로의 판단이었다.
삼용나노텍 공장은 수원-화성에 걸친 산업 단지 안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지평선을 할퀴고 있었다. 주변의 아파트 단지를 내려다보는 위압적인 구조물들 사이로 탄소 튜브의 소재를 생산하는 블록은 냉각탑들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거리가 좀 더 가까워질수록 공장 벽면에 새겨진 구호들은 더 선명하게 시야로 파고들어왔다. 투쟁과 결의의 구호가 가까워질수록 단지 주변을 막고 있는 바리케이드와 경찰의 병력 수송 차량은 더 빠른 속도로 지민에게 다가왔다. 벽에 새긴 그 모든 결의와 의지 사이에는 그것을 조롱하기 위한 벽이 세워졌다.
“어이구, 첨 뵙는 얼굴이시네?”
지민이 내민 기자증을 본 남자는 고개를 숙여 차 안을 들여다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단지 입구에 세워진 임시 검문소는 정보과 형사 2명이 지키고 있었다.
“<한겨레>나 <경향신문>도 끝물이라고 발길 뜸해진 것 같은데 뭐 이런 데까지 오십니까?”
“사진이나 찍어두려고요.”
지민은 말꼬리가 잡힐까 봐 짧게 대답하고는 핸들을 가볍게 손으로 두들겼다.
“온 김에 주변 아파트 단지 주민들도 좀 취재해 주쇼. 민원이 장난 아니야. 저기 올라가 있는 미친년 하나 때문에 욕은 우리가 다 먹어.”
형사는 지민의 기자증으로 가장 높게 솟은 냉각탑 쪽을 가리킨 다음 돌려주었다. 곧게 뻗은 도로였지만 임시로 가설된 바리케이드와 경찰 차량이 만든 구불구불한 방벽을 지나 단지 입구까지 접근한 지민의 차는 다시 한 번 정복 경찰들의 제지를 받았다. 단지 입구는 철거된 현수막들이 한곳에 쌓여 있었고, 공성전을 앞둔 군대의 진지처럼 혼란 속에서도 질서를 잡아 가고 있었다. 그것들을 제외하면 단지 앞은 기묘한 정적만 감돌았다. 단지를 출입하는 출고 차량과 납품 업체 차량들은 눈앞의 방벽이 애초부터 있던 시설물인 양 행동했다. 복직 투쟁 초기에 노조와 시민들이 함께 농성하던 흔적은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미강이 투덜거리며 장비를 차에서 내리고 난 다음 잠시 헤매다가 카메라에 외장형 모니터를 연결하고 600밀리미터 망원 렌즈 포커스를 냉각탑 쪽에 맞췄다.
“상태는 어때 보여요?”
지민은 모니터를 통해 냉각탑 위에 있는 혜영의 모습을 좇았다. 혜영이 하는 동작의 의미를 이해 못 한 지민이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미강은 넋 나간 표정이 되었다.
“버피* 중인데요? 지난 며칠 칼로리바만 먹으며 버틴 것 치고는 괜찮아 보이는데요?”
작은 체구와 검게 그을린 피부 덕분에 더 깡마르게 보이는 몸이었지만 적어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상태가 좋아 보였다. 지민은 내심 안도했지만 주변 지휘 차량 위에 달린 대구경 망원 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보고 마음속에 서늘한 한기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경찰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모니터 속에서 아래를 향한 시선을 애써 피하며 몸을 폈다 다리를 당기고, 일어나는 동작을 반복하는 혜영의 얼굴에 새겨진 것은 의지보다는 분노였다.
“어우, 저 꼴통 같은 년.”
낌새도 없이 등 뒤로 다가온 형사의 목소리에 놀란 지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다 하마터면 카메라를 넘어뜨릴 뻔했다. 하지만 미강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동작으로 그것을 잡아챘다.
“쟤 봐, 쟤… 어어, 저… 저 짓을 며칠째 계속하고 있어.”
형사는 지민의 불쾌한 시선은 아랑곳 않고 모니터의 혜영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민이 다시 시선을 돌린 모니터 속에는 바닥에 엎드려 구토를 하고 있는 혜영의 모습이 잡혔다. 통성명도 없이 지민의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형사는 지민을 향해 말했다.
“저러다 처녀 송장 치우게 생겼어. 어린애가 뭘 안다고 꼬드겨서 저런 데 올려 보내가지고는… 씨발놈들….”
형사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지휘 차량 쪽으로 성큼 걸어가서 마이크를 잡았다. 차와 연결된 대형 스피커로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공기를 울렸다.
“야, 혜영아! 너 그거 탈수 증세야! 그러다 죽어! 이제 내려와. 아저씨랑 짜장면 먹으러 가자! 너희 ‘동지’들도 다 밥 먹으러 가고 있잖아?!”
지민은 난간을 부여잡은 손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있는 혜영을 보았다. 시선을 조금만 옆으로 돌리면 보일 것이다. 조끼를 입고 들어가다가 경비원에게 제지당했던 식당, 노조 조끼를 입은 채로 식사를 할 수 없다는 공고문이 붙었던 식당으로 들어가는 동지들을 볼 수 없었다. 지민은 숨을 죽이고 모니터 속 혜영을 응시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다음 자신이 받은 모욕을 되돌려 주는 의미의 전통적인 손짓을 했다. 그리고는 한쪽이 찢어진 그늘막 밑으로 돌아갔다.
정보과 형사들이 식사를 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지민과 미강은 공장 주변을 촬영하며 경찰 이외에 이곳에서 혜영을 지켜보는 이가 있는지 찾아내려 애썼다.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 검은색 세단이 줄지어 방벽을 통과해 공장 앞으로 들어왔다. 지민은 반색을 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네요, 한 의원님.”
한종철은 난생 처음 보는 지민의 얼굴에 예의를 차려 웃음으로 인사했다. 입 밖으로 인사를 내뱉고 난 다음에야 한종철에게는 자신이 난생 처음 보는 인물이란 사실을 깨닫고 당황했다. 하지만 능숙하게 자신을 아는 척하며 예의 바른 미소를 날리는 모습을 보고는 그를 처음 만난 지 십수 년이 지났음을 깨달았다. 그가 타고 온 차, 그의 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사람 수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는 이제 노동당의 유일한 다선 의원이자 최초 5선 의원이 되었다. 지민은 기자로서 정치인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전혀 몰랐기에 인사 다음에 할 말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지민이 질문을 하기도 전에 종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삼용나노텍의 복직 노동자들과 간담회가 있어서 왔습니다. 사측이 협의를 잘 이행하는지….”
“하지만 기혜영 씨는 아직 못 내려오고 있는데요?”
말을 끊어서인지 질문의 내용이 불쾌해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종철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을 본 지민은 속으로 ‘난 절대 기자 체질이 못 되는구나’ 한탄을 했다.
종철은 잠시 주변을 둘러본 다음 말했다.
“협의가 양측에게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일은 단계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저는 그 첫 단추가 잘 채워졌나 확인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지민은 기자처럼 보이려면 녹음기라도 들이댔어야 하나 후회했지만 종철의 말을 듣고 어차피 녹음해도 쓸모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에 그 후회를 거두었다. 쭈뼛거리며 안내를 맡은 정보과 형사들의 인도로 공장 안으로 들어서는 종철의 뒷모습을 보며 지민은 자신이 바꾼 역사에서 종철이 어떤 역할을 담당하게 될지 쉽사리 감이 오지 않았다. 아직 여름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가을볕에 인상을 찡그리던 지민은 미강의 손짓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곁으로 다가갔다. 미강은 열 영상 모듈을 결합한 카메라의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열 영상 모드로 체크해 봤는데, 지금 기온을 감안하더라도, 얘, 열이 너무 높은 것 같아요. 실제 역사에서는 어떻게 되었어요?”
지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도 알 수 없었다.
Girl on Fire : Alicia Keys. 2012.
*: PT 체조의 일종인 운동 동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