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줄거리
멸망을 앞둔 지구 문명을 다른 행성계로 복원하는 오메가 플랜이 진행 중인 가까운 미래. 오메가 플랜의 데이터 분석학자 지민은 복원을 위해 백업 중인 역사 데이터에서 주요 역사적 전환점에 개입해 역사를 바꾸는 실험을 한다.
지민은 2020년으로 가서 광범위한 정보 통신망 감청 시스템을 개발 중인 폴라리스 시스템에서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한 개인 정보를 수집한 뒤 구본석 전무와 함께 이를 빼돌린다. 지민은 폴라리스 시스템의 불법을 폭로하려고 한종철 노동당 의원과 접촉한다.
인물 소개
지민 인공 지능체 에이도스에 저장된 역사 분기점에 개입하는 시간 여행자.ᅠ
고찬욱 에이도스가 구현한 가상 세계에서 활동하는 지민의 아바타.
에이도스 새로운 행성에 복원할 인류의 문명과 역사를 백업하는 인공 지능체.
한종철 고찬욱(지민)에게 폴라리스 시스템 정보를 넘겨받고 〈사탐법〉(국가안전을위한위험 정보사전탐지에관한특별법) 저지를 약속한 노동당 국회의원.
모니터엔 붉은 화염에 휩싸인 채 카우보이모자를 쓴 해골이 말 위에 오른 이미지가 떠 있었다. 이미지 위엔 다음 같은 글귀가 붙어 있었다.
Yippie I aye!
지민은 글귀 아래에 있는 다운로드 링크를 클릭했다.
600메가바이트에 달하는 PDF 파일이 다운로드됐다. 한글 버전 이외에도 영문, 일본어, 중국어 번역본을 포함한 문서는 인터넷 해커 그룹인 고스트 라이더스(Ghost riders)가 폴라리스 시스템을 공격하여 얻은 문서들이었다. 문서에는 폴라리스 시스템을 통해 수집한 한국 정부와 의회 주요 인물의 신상 정보와 메일 내용이 담겨 있었다. 폴라리스 시스템이 일반 네트워크 보안 환경에선 얻기 불가능한 정보의 중계기가 된 셈이었다. 깊은 해자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은 도리어 자신들 무기로 그 성문을 활짝 열었다.
어나니머스(Anonymous)❷가 FBI의 집중 공격으로 와해된 뒤 생긴 자생 조직 중에서 가장 강한 해커 그룹인 ‘고스트 라이더스’는 국정원 폴라리스 시스템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공격을 탐지한 국정원은 즉시 시스템을 정지시켰지만 이미 문은 활짝 열렸다. 국정원이 자체 보안 규정도 지키지 않고 서버 안에 저장한 레인보우 테이블 덕분에 거의 모든 국가 기관 종사자의 사용자 암호가 드러났고 불과 60분이 지나지 않아 광범위한 공격을 받았다. 그 결과는 1000여 쪽의 문서로 정리됐다. 각국 자원봉사자들은 온라인에서 번역을 나눠 맡았고, 번역된 문서들은 클라우드를 통해 전 세계로 빠르게 퍼졌다.ᅠ
“고스트 라이더스가 폴라리스 시스템을 가로챈 건 단 두 시간뿐이었어요. 두 시간 동안 어떻게 그 정보들을 다 긁어모았죠? 저는 300명분을 크롤링하고 인덱싱하는 데도 그보다 오래 걸렸어요.”
지민은 무릎에 올려놓은 노트북을 닫으며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보좌관도, 핸드폰도 없이 나타난 한종철은 옷깃을 여미고 몸을 떨었다.
“크롤링을 새로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가능한 거죠. 국정원도 시험 가동 해 봤던 겁니다. 일반 국민이 아니라 정부를 대상으로요. 캐시 형태로 저장된 걸 고스트 라이더들은 그냥 가져와 암호만 풀어 버렸죠.”
한종철의 말에 지민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ᅠ
“우린 꼭 이렇게 물가에서만 만나야 합니까? 날도 추운데… 한강에 얼음 낀 거 안 보입니까?”
한종철이 투덜거렸다.ᅠ
“영화에서 보면 보통 이런 데서 만나지 않나요? 다리 한가운데나.”
지민은 왼쪽 당산 철교와 오른쪽 국회의사당을 번갈아 두리번거렸다.ᅠ
“웬즈데이와 어떻게 연락했어요?”
지민의 질문에 한종철은 그의 무릎에 올려진 노트북을 빼앗아
자신의 무릎으로 가져왔다.
“이걸로 손 좀 녹입시다. 웬즈데이는 ARIA(국가 표준 암호 알고리즘) 파해법을 찾을 때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친구예요. 나이는 좀 어리지만 아주….”
좀 어린 정도가 아니지. 지민은 생각했다. 맙소사, 지금이 2020년이니까 이제 몇 살이지? 열아홉? 체포될 당시 서른도 안 된 아가씨였어.
지민이 떠올린 웬즈데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전설적인 고스트 라이더의 모습은 수갑을 찬 채로 네바다 주의 집에서 FBI에 의해 끌려나오던 20대 후반의 창백한 여성이었다. 십 년 후쯤 벌어질 일이었다. 한종철은 직접 시인하지 않았지만 지민에게 넘겨받은 폴라리스 시스템 정보를 웬즈데이에게 보냈고, 이를 바탕으로 고스트 라이더스는 폴라리스 시스템과 국정원의 상당수 네트워크를 장악했다. 그 결과는 지금 대한민국 모든 뉴스 채널을 뒤덮은 폴라리스 시스템 관련 뉴스였다.ᅠ
국정원이 비밀리에 개발, 실험 중이던 전 국민 감시망 체계가 국제 해커 조직의 공격으로 전 세계에 폭로됐다. 그로 인해 대한민국의 모든 네트워크 암호망은 완전히 무너졌다.
뉴스들은 미확인 소문이 더해져 스스로 생명을 얻어 갔다.
불안과 공포라는 새 생명체였다. 금융 네트워크도 불안하다는 소문에 뱅크런이 일어났고 주식 시장은 폐쇄됐다. 군이 전시 태세에 돌입하면서 계엄령 선포 얘기도 흘러나왔다. 초대형 국가 위기를 몰고 온 초선 의원은 콧물을 흘리며 노트북을 끌어안고 언 손을 녹였다.ᅠ
“완전 복구까지 최소 반 년은 걸립니다. 앞으로 〈사탐법〉을 입에 올리는 인간은 이 악몽을 떠올리겠죠.”
맙소사. 이 자가 지금 무슨 짓을… 아니, 내가 무슨 짓을 했지?
한종철의 태연한 말투에 지민은 두통과 구토를 함께 느꼈다. 에이도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민 씨, 바이탈 사인이 안 좋아요. 지금 현실 시간으로 두 시간째예요. 잠시 중단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잠깐, 하나만 더 확인하고 끝내.”
한종철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지민을 바라보았다.ᅠ
“좋아요, 의원님. 제가 원한 것은 폴라리스 시스템의 위법성을 폭로해 〈사탐법〉을 저지하면서 이 자료를 빼내 준 구본석 전무를 보호하는 거였어요. 구본석 전무 걱정은 접어도 될 것 같네요. 오히려 여당이 그분을 보호하고 있으니까요. 의원님은 아예 국정원을 통째로 날려 버리려고 그 자료를 외국의 해킹 그룹에 넘겼잖아요? 그것도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이건 마치 황사영 백서 사건❸ 같은 짓 아니에요?”
지민의 가시 돋친 목소리에도 한종철은 심드렁했다. 그는
지민에게 끌어안고 있던 노트북을 다시 건넸다.
“에… 이거 다 식었네요. 저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닙니다. 대의 민주주의를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나섰겠습니까? 밭을 가는데 죽은 나무뿌리가 가로막고 있다면 뿌리를 뽑아야지요. 집에 쟁기뿐이라면 옆집 트랙터를 훔쳐 와야죠. 물론 이번에 국정원을 깔끔히 정리하리라 기대는 안 합니다. 하지만 정권에 강력한 경고는 해 둔 셈이죠. 당신들 칼을 칼집 안에 제대로 간수 안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라, 이런 거예요. 웬즈데이도 이번 일로 전처럼 그림자 속에 숨지는 못할 겁니다. 이제 전 세계 정보 기관의 주목을 완전히 끌었으니까요. 웬즈데이가 가진 정보의 출처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이제…”
한종철은 말끝을 흐리며 지민을 바라보았다. 지민은 소리쳤다.
“에이도스! 중단해!”
순식간에 지민은 몸에서 수분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암막에 싸였던 시야에 다시 빛이 들어오자 지민은 무릎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방호복 안의 스피커로 에이도스의 목소리가 들렸다.ᅠ
“괜찮아요, 지민 씨? 역시 한 시간 반 이상은 무리네요. 연산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하루 정도 걸려요. 일단 숙소에서 쉰 다음, 내일 결과를 보는 게 어때요?”
지민은 무의식적으로 방호복의 헬멧을 벗으려다가 손을
멈췄다. 그랬다가는 뇌가 방 안의 전자파를 견디지 못하고 익어 버릴 것이다.
“무슨… 결과?”
“당연히, 지민 씨가 복제 인스턴스의 세계에서 한 일이 미래에 미치는 영향이죠.”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어.”
지민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에이도스는 경쾌했다.
“괜찮아요. 처음에는 다들 그래요.”
“처음이라니?”
지민은 이마에서 내린 땀이 흘러들어 따가운 눈을 끔뻑이며
에이도스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이라니? 나 말고도 복제 인스턴스를 만들어서 역사를 바꿔 보려 한 사람이 있단 말이야?”
에이도스는 주저 없이 답했다. 어차피 인공 지능체는 주저하지 않는다.
“왜 없겠어요? 에이도스는 지금 당신 눈앞에 있는 것 말고도 전 세계에 127개나 흩어져 있어요. 그런 말 있죠? 네가 뭔가 멋진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면….”
“전 세계에 똑같은 생각을 하는 이가 백 명은 넘을 것이다. 알아, 무슨 말인지….”
지민은 검은색의 거대한 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른 오메가섹터의 에이도스들도 우리처럼 역사를 바꾸는 실험 중이란 말이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다요. 진부한 것에서부터 참신한 것까지, 안전하고 시시한 것에서부터 위험천만한 것까지 모두 대입해 보는 중이죠. 히틀러를 부활시킨 곳도 있고, 리한나가 크리스 브라운에게 두들겨 맞아 입술이 터지기 전에 총으로 쏴 버린 세계도 있고요. 아, 그건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물론 전부 복제 인스턴스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지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뭘 하고 온 건지 모르겠어.”
“최소한 국정원은 해체시킬 것 같은데요? 이름만 바꾼 다른 정보 기관이 나타나겠지만요. 정확한 연산이 나오기 전까지는 변수가 많아서 확언할 수 없는 게, 지민 씨는 한종철이라는 큰 변수를 수면 위로 부상시켰어요. 고스트 라이더스 사건으로 인해 웬즈데이의 인생도 지민 씨가 아는 것처럼 되지 않을 가능성이 커졌어요.”
지민은 한시라도 빨리 이 방을 벗어나 방호복을 벗고 싶어졌다.
그러나 내일까지 연산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는 에이도스의 말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좋은 쪽으로 갔으면 좋겠는데….”
지민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역사에 좋은 쪽이란 건 없어요.”
에이도스가 대꾸했다.
(계속)
❶ Johnny Cash, 1979.
❷ 무정부주의와 정보의 자유를 표방하는 해커 그룹. 단일 조직이라기보다는 가치관을 공유하는 해커들의 연대에 가깝다.
❸ 조선의 카톨릭을 탄압한 신유박해 이후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중국에 투서하여 천주교 박해를 호소하면서 프랑스 군대를 끌어들이려고 했던 사건.
(워커스5호 2016.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