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김상우 / 정리 · 신나리 기자 / 사진 정운
배우 정하담은 하담을 연기했다. 박석영 감독의 〈들꽃〉과 〈스틸 플라워〉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은 ‘하담’이었다. 초등학교 이후 길 위에서 삶을 보낸 임신한 열여섯 소녀 하담을(〈들꽃〉), 일하고 싶고 탭 댄스를 추고 싶고 무사히 살아 내고 싶은 하담을(〈스틸 플라워〉) 스크린에 선보였다. 처절하지만 간절한 삶을 그대로 내보였다는 평가는 제41회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스타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소머리 무당’을,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와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서 크지 않지만 필요한 역할을 소화해 낸 배우, 맑은 마음으로 사람을 이해하고 품고 그려 내고 싶은 배우. 김상우가 정하담을 만났다.
김상우의 들어가며
아스팔트 사이로 핀 철없이 핀 들꽃
사람들은 다만 걷고자 할 뿐
꽃이 견뎌 내는 애틋한 독백을 아무도 듣지 못했어
길을 걷다
꽃이 생각나면 눈을 감고 꽃을 다시 보았어
햇빛 바람 그리고 외로운 춤
나를 읽어 주던 꽃
나는 꽃에 물려 나를 흘리네
김상우(김) 꿈이 배우였나.
정하담(정) 고등학생 이전에는 소설가가 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 전에 다양한 꿈을 꾸긴 했는데 최종적으로는 배우를 꿈꿨다. 스무 살 때부터 연기를 했는데, 이렇게 일찍 시작할 거라고 생각 못 했다. 최종적인 나의 삶이라고만 생각했다. 학생 때 방학이면 서울 와서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며 나중에 배우를 해야지 생각했다. 열아홉 살에 대학 정치외교학과를 가서 한 학기 공부하다 그만두고 연극영화과를 준비했다. 입시 준비한 3개월이 정식으로 연기를 공부한 전부다.
김 첫 데뷔작이 박석영 감독의 영화 〈들꽃〉이다.
정 오디션을 보면서 박석영 감독을 만났다. 당시 감독님이 스무 살이니까 잘 못 해도 그냥 가라고 하기 미안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즉흥 연기를 시켜 봤는데, 그게 감독님 인상에 남았다고 했다. 감정이 드러나는 신이었는데, 옆에 사람을 때려도 된다고 하는 거다. 깜짝 놀라서 ‘사람을 때리라고요? 저는 사람을 때려 본 적이 없어요’라고 대답했는데 그게 순수해 보였다고 하더라. 다른 배역은 다 캐스팅이 됐고 그 역할 하나만 남은 상황에서 거의 한 달 오디션을 보고 합격했다. 오디션 붙고 나서도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나는 연극영화과 입시도 떨어졌는데 다른 배우들은 한국예술종합대학교나 전문적으로 연기를 배운 사람들이다 보니까 역할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박석영 감독이 시나리오 쓸 때도 계속 물어봤다. 7개월간은 계속 〈들꽃〉 생각만 했다.
김 들꽃이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했다. 무서웠다. 역할을 준비하며 노숙자처럼 지내기도 했다고 들었다.
정 〈들꽃〉에서 하담이는 오랫동안 거리에서 삶을 살았다. 다른 아이들은 가출 청소년에 가까운데 하담이는 그게 아니었다. 감독님이 노숙자의 바람맞은 얼굴, 계속 떠돌아다녀 세월이 짐작 안 가는 인물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초등학교 졸업은 했지만 떠돌고 다녔던 게 느껴졌으면 좋겠다면서. 그래서 사실 이 캐릭터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시나리오의 전체적인 흐름은 감독에게 물어봐서 이해하고 있었지만 캐릭터를 구현하는 건 어려웠다. 감독님이 지나가는 말로 “그냥 좀 걸어 다녀 봐”라고 했는데 내게는 그 말도 너무 절실했다. 불안과 열정 때문에. 그래서 들꽃의 하담이 옷이랑 가방을 챙겨서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 홍대를 갔는데 나한테는 전단지도 안 주더라. 화장품 가게에도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달라졌다. 그게 하루 이틀 사흘이 되니까 오히려 홍대 같은 번화가보다 종로가 편했다. 한번은 지하철 타고 집에 가는데 어떤 여자가 토를 했다. 가방에 휴지가 있어서 꺼내 주니까 그 여자가 나를 보고 기겁하고 도망가더라. 그래서 이상한 사람 아니라고 하면서 드렸던 기억이 있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느꼈던 부분이 컸다. 극 중에서 열여섯 살인 하담이가 임신을 하고 있어서 청소년 상담 센터에 전화로 물어보기도 했다. 되게 열심히 살았던 순간이었다. 그걸 미친 듯이 하다가 촬영이 시작되니까 외려 좀 수월했다.
‘길 위의 삶 표현하다 일상으로 돌아오니 죄책감 느꼈다’
김 길 위의 삶을 겪어 보니 어땠나.
정 영화 끝나고 친구들이랑 커피 마시고 노는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노력해서 하담이라는 사람을 표현했는데 영화 끝나고 나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게 쉽지 않았다. 길 위의 삶을 표현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커피 마시고 밥을 사 먹는 데 죄책감도 느껴졌다. 역할에 빠져 있어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눈에 밟히는 느낌, 내가 그걸 이해하기 위해 들였던 시간과 조사했던 게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걸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 (이 말을 하는 정하담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김 〈스틸 플라워〉도 〈들꽃〉의 연장선에 있나.
정 〈스틸 플라워〉를 준비하는데 감독님이 내 얼굴이 떠올랐다고 했다. 일을 굉장히 하고 싶어 하는 여자아이가 일을 구했는데 모두가 얘를 내동댕이친다. 얼굴에 눈물 자국이 나 있는데 그걸 털어 내고 화면 밖으로 나가고 탭 댄스 소리가 들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떠오른 게 나였다고 하더라. 본래 〈들꽃〉과 이어지는 내용은 아니었는데 감독이 연장선으로 역할을 만든 거 같다. 〈스틸 플라워〉는 마지막 장면을 위해 달려가는 영화다. 〈들꽃〉 하담의 5년 후 느낌으로 더 이상 청소년이 아닌 사람이라고 했다. 반면 저 스스로는 영화를 촬영하면서 〈들꽃〉의 하담이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들꽃〉의 하담이를 품고 있으니 몰입이 안 됐다. 그래서 〈들꽃〉의 하담이를 버렸다.
김 탭 댄스는 어떻게 시작했나.
정 〈들꽃〉이 끝나고 배우로 먹고사는 걸 상상하지는 못했다. 다시 입시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입시를 위해 특기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고 주위 사람들이랑 논의했다. 그때 박석영 감독님이 탭 댄스를 추천해 줬고 다른 사람들 반응도 좋았다. 감독님이 학생 때 〈사랑은 비를 타고〉 안무 감독 강연을 끝내면서 ‘나는 아직도 춤을 출 수 있어’ 하면서 탭 댄스를 추고 끝냈다고 하더라. 70살 노인이. 감독님이 눈물을 그렁그렁하면서 이 말을 하더라. 내게는 그것도 인상적이었고 잘 어울린다는 주위의 평도 있어서 시작했다.
김 〈스틸 플라워〉가 조금 불친절한 영화라 느껴졌다.
정 감독님도 이 주인공을 모르고, 알아 가는 마음으로 찍었다고 했다. 인간에 대한 숭고함을 찍겠다는 마음으로. 나 역시도 〈스틸 플라워〉의 하담이를 찍으며 알아 갔다. 개인적으로는 하담이의 삶이 이해됐다. 지친 삶의 어느 날 밤, 탭 댄스 소리가 들리고, 그건 내가 능동적으로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그게 더 좋아지고 애착이 생기지 않았을까.
시나리오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 시나리오 자체가 울림이 있는 완전한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찍는 게 기쁘고 신났는데 표현을 잘 못 하고 망치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어 운 적도 많다. 하지만 완성된 〈스틸 플라워〉를 봤을 때 인간의 숭고함이 느껴져서 표현하고 싶었던 게 다 담겼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보고 울었던 게 담겨 있더라. 계속, 삶을 이어 나가는 사람. 어찌 됐든 망가지지 않는 사람.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을 자기가 안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지만, 삶을 포기하지는 않는 사람. 〈스틸 플라워〉의 하담이는 실제의 나보다 더 위대하고 큰 사람이다.
김 영화 속 하담이는 늘 너무 빡세다. 기가 빨리기도 할 거 같다. 지금 제일 감수성이 만들어질 시기인데 너무 젖어 버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들기도 한다.
정 정말 잘 빠진다. 사실 연기할 때는 잘 모르겠는데, 후유증이 있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역할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도 안 한다. 역할과 같이 있는 것 같아서 좋지, 벗어나야겠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연기라는 게 타고나야 하는 지점도 있지만, 사람에 관심이 많아야 한다고 본다. 그런 사람이 유리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나?’ 스스로 질문을 많이 한다. 묻다 보면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다. 연기가 나라는 사람 자체에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에 관한 질문을 품고 이어 간다는 면에서 좋다.
김 인문학적이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
정 다큐를 보면서 사람을 따라 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 보고 듣는 이상으로 알고 싶어서. 같은 동영상을 한 스무 번쯤 다시 본다. 그러다 보면, 느껴지는 게 많아 또 스스로 질문을 많이 하게 된다. 이 사람의 언어는 어떤 거지 이렇게 말하는 게 무슨 마음이지 하면서. 내가 보고 따라 한다고 다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이 사람을 깊이 알고 관심을 두고 더 보려고 노력하는 거지. 결국에는 내 안에서 내가 보는 시선일 수밖에 없지 않나. 내가 보고 있는 게 맞나 하면서 질문을 이어 간다.
김 최근 보고 연기 연습한 다큐는 무엇인가.
정 50대 여성인데 아이를 계속 입양하더라. 직업은 잘 생각이 안 나지만 부부가 목사님 같은 분이었다. 헌신하는 삶. 내가 다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다큐를 처음 봤을 때. 빛났다. 가치 있는 사람이 가진 빛 같은 거.
김 혼자서 연습하다 보면 외로운 마음은 안 드나.
정 외로움을 좀 많이 타는 편인데 연기할 때는 안 그렇다.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갖는 편이다. 산책하거나 속이 답답해져서 하루에 한 세 번 정도 산책한다. 예능 프로 볼 때도 있고 영화 볼 때도 있고.
김 슬픈 것을 피해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어떤가. 기쁘고 밝은 것보다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이미지다.
정 잘 모르겠다. 다만 진실 되게 말하고 싶다. 진짜인지 진위를 파악하고 싶어 하는 성질이 있다. 그게 슬픔이랑 가까울 수도 있다. 내 정체를 알아보는 거니까.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은 진실과 가까운 모습이다. 조금 자애롭고 전지전능해 보이는, 사람을 다 포용할 수 있고 사람을 다 이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수녀라든지 성직자라든지 그런 사람들을 봤을 때 느껴지는 감동적인 것들이 있다. 보기만 해도 다 말할 수 있는 사람. 내가 느끼기에는 그래야만 연기를 잘할 수 있는 거 같다. 실제로 연기를 잘하는 선배들을 보면 그게 담겨 있다. 계속 진실해지려고 노력하는 게 결국 연기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김 박석영 감독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정 첫 작품의 감독님이기도 하고 인간적으로도 좋은 분이라 많이 배우고 있다. 삶을 견뎌내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은 분이라 그게 영화에서도 느껴진다. 연기라는 직업 자체를 다시 이해하게 해 준 사람이다. 감독님은 영화를 촬영할 때, 자기가 생각하는 걸 강요하지 않고 동등한 작업자로 대한다. 배울 게 많은 훌륭한 작업자,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김 출발이 참 좋다. 득이 많다.
정 인복이 좀 있는 것 같다.
김 다음 작품 역시 박석영 감독의 〈재꽃〉이다.
정 맞다. 〈들꽃〉이 생존에 관한 이야기라면, 스틸 플라워는 자립에 관한 이야기다. 〈재꽃〉은 그다음 과정인 관계에 대한 작품이다. 시골 마을에 가족이 필요한 열한 살짜리 여자애가 들어온다. ‘나’는 그 마을에서 사는 젊은 여자다. 마을 사람들이 그 아이를 좋아하고 챙기면서 벌어지는 드라마인데, 마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어른부터 아이까지 연령층이 다양하다. 관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서 내가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늘 연기를 하면서 불안하다. 자신 있었던 적이 없었던 거 같다.
김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나. 나는 눈을 살짝 감았을 때 어디 가 있는 게 예술 같다. 좋은 그림 앞에 서 있으면 내가 어디가 있는 거 같지 않나. 예술은 운동성이 있어서 항상 나를 어디로 보낸다. 좋은 영화 보면 내가 그쪽으로 가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내가 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곳으로 가 버렸다. 그래서 이해되고 나 같고 그래서 눈물이 난다.
정 (고개를 끄덕이며) 예술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예술가는 가치 있는 일을 해서 존중받는 거 같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가치 있는 일에 관심을 두고 행하려고 하고 표현하고. 가치라는 표현이 안 맞을 수도 있는 거 같기는 한데, 아무튼 그런 기분이 든다. 감동을 줄 수 있는 것. 공감하는 것. 그런 것이 예술이고 예술가가 하는 일 같다.
의상 제공: Forgotten Dots
장소 제공: Slow Coaster
김상우 – 시인, 이리카페 사장, 밴드 ‘마음’ 드러머, 은총이의 삼촌.
정하담 – 배우, 기타 치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에 대한 질문을 품고 애정을 갖고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 좋은 배우라 생각하며, 그런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그림 양유연 – 세상의 밝은 모습보다는 어두운 이면을 들여다보며 그림을 그리며 살아간다. 평생 그림쟁이로 살아가는 꿈을 꾸며 매일을 지낸다.
(워커스 17호 2016.07.04)